동물, 식물, 곤충

2009. 09. 여주-이천-안성권역 답사 식물1

큰누리 2012. 5. 31. 10:14

여주, 이천, 파주 등에는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인사의 묘가 많다. 그 이유는 도읍 백리 안의 명당자리에는 (죽은 왕실사람의 묘 자리를  위해) 묘를 쓸 수 없는 조선왕조의 이기적인 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명당자리에 이미 묘를 썼더라도 왕실에서 알면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했다.

 

이번의 안성, 여주, 이천 답사에서는 억울한 사람들과 역사에 오명을 남긴 사람들의 묘가 많았다. 서자라서 세자로서의 위치가 콤플렉스였던 광해군에게 선조 늘그막에 적통 자리를 꿰차고 태어나 죽임을 당해야 했던 영창대군명당자리에 묘를 쓴 탓에 죽어서도 누운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이인손과 이계전, 갑신정변 때 3일 만에 이상을 접고 대역죄인으로 죽은 홍영식, 폐위된 동생의 신원을 위해 노력하다 요절한 인현왕후의 오라버니 민진후 등이 억울한 사람이겠고, 간신의 대명사인 연산군대의 임사홍, 세도정치를 뿌리 내린 장본인인 안동김씨 김조순 등이 역사에 오명을 남긴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은 조선 초기, 출중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공신이었고, 그 아들은 부친의 반대편에 서서 사림파를 옹호하다 죽임을 당했지만 사림파를 갑자사화로 몰살시킨 장본인인 임사홍은 아들은 구할 수 없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받은 가장 가혹한 벌이었을 듯하다. 몇 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 대한 역사의 벌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버지 묘 근처에 자리한 임사홍의 묘는 파헤쳐질 것을 우려한 때문인지 최근에야 자손들이 비를 세운 듯 했고, 모든 묘가 추석을 맞아 말끔히 단장을 했는데도 벌초가 돼있지 않았다. 역사는 당대에는 억울한 사람에 대해 눈 감고 그저 종잇장에 기록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위의 사실들만 보더라도 결국은 정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좀 흘러야 된다는 게 유감이지만...

 

그게 내가 유적답사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을 주기적으로 찾아다닐 수 있다는 것과 식물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상품으로 쌀을 상납했던 곳(여주, 이천)이니 만큼 기름진 쌀로 점심을 먹고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들녘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복했다. ^^

 

 

 

 

 

<안성 영창대군 묘앞 나팔꽃>

 

 

<여주 민진후 묘역 골등골나물>

 

 

<여주 민진후 묘역 구절초>

 

 

<여주 민진후 묘역 며느리밑씻개>

 

 

<여주 민진후 묘역 며느리배꼽>

 

 

<여주 민진후 묘역 쥐꼬리망초>

 

 

<여주 영녕릉 물봉선>

 

 

<여주 영녕릉 산박하>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둥근잎유홍초>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며느리밑씻개>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산마늘>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쑥부쟁이>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오이풀>

 

 

<여주 임원준-임사홍 부자 묘역 환삼(한삼)덩굴>

 

 

 <이천 권균 묘역 앞 나도송이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