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왓 답사기5 (하리하랄리아의 배꼽 바꽁사원과 쁘놈 바껭의 석양)

큰누리 2012. 5. 31. 14:23

1월 15일의 마지막(6) 답사지 - 바꽁 사원과 쁘놈 바껭 사원

<크메르 역사와 종교, 건축들>

'캄보디아'하면 우리는 곧 앙코르 와트를 떠올린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유적을 대표하는 유적임에는 틀림없지만 앙코르 톰 안의 바이욘, 삐미아나까스도 그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독특함이 있다. 크메르 역사에서 최전성기는 서기 1000년을 전후해 재위한 수르야바르만 1세 서기 1100년에서 1150년을 사이에 재위한 수르야바르만 2세그 3대 뒤를 이어 1200년을 전후하여 재위한 자야바르만 7세 치세를 크메르의 최전성기로 꼽는다.

 

수르야바르만 1세 유적과는 좀 관계가 멀고 수르야바르만 2세앙코르 와트를 37년에 걸쳐 완성한 왕. 수르야바르만 2세의 앙코르 와트는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주도했다고 보기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나 대단한 유적이기에 세계의 관광객들이 줄을 이어 찾고 세계 7대 불가사의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앙코르 톰(바이욘, 삐미아나까스)을 세운 왕은 자야바르만 7세이다.

캄보디아에 앙코르 유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300년 쯤 앞선 시기, 즉 초기 크메르 왕국의 인드라바르만 1세야소바르만 1훌륭한 유적을 남겼다. 인드라바르만 1세 축조한 사원이 바꽁과 쁘레아 꼬이고, 야소바르만 1가 축조한 사원이 롤레이이다. 앙코르 유적과 초기 크메르 유적 중간에 세계 최고 수준의 조각으로 칭송 받는 10세기의 라젠드라바르만 5세 치세기에 축조된 반띠아이 스레이가 있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따진다면 남아있는 유적, 그 중에서도 결국 좋다는 곳만 골라서 가는 것이니 내 나라 역사도 골치 아픈데 남의 나라 역사까지 알게 뭐 있냐고 생각한다면 캄보디아 관광을 할 때의 최소한의 예의라 치고 이 5명의 왕과 그와 관련한 유적만 기억해도 총체적으로 캄보디아의 유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에 집권하고 숙적인 참족(베트남)을 제압하면서 캄보디아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캄보디아 역사를 보면 베트남이나 태국에 치어 변변하게 어깨를 펴고 산 적이 없으니 크메르인에게 자야바르만 7세는 최고의 영웅일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전승의 여세를 몰아 수많은 사원을 세우고 치세에도 힘썼지만 무리한 사원 축조로 본인이 문둥병으로 죽은 후(추정) 크메르란 나라 자체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시간차가 크긴 하지만 그 자야바르만 7세를 있게 한 초기 크메르 왕국의 왕이 인드라바르만 1세와 야소바르만 1세이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9세기 말에 축조한 바꽁과 쁘레아 꼬 사원이 우리의 15일 답사 마지막 코스였다. 힌두교의 3대 신 중에서 파괴의 신 시바와 질서의 신 비쉬누를 합쳐 공양하는 형태를 하리하라(harihala)라고 한다. 나머지 신인 브라흐마는 창조를 담당하는 주신이다우리나라 불교에서 역사적으로 약사여래, 관음보살, 미륵보살 등의 신앙이 시대 상황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진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캄보디아의 최전성기인 자야바르만 7세 이전에는 힌두교의 하리하라 신앙이 우세했고, 자야바르만 7세에 이르러 대승불교를 정책적으로 강력하게 밀었지만 종교란 것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지도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백성들 사이에서는 느리게 진행되거나 아예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야바르만 7세가 주도한 대승불교와 그에 따른 사원 건축들은 힌두교 바탕에 불교를 입힌 묘한 상황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하리하라(harihala) 대승불교를 정략적으로 밀기 이전에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기저가 된 크메르인들의 신앙이다. 하리하라 신앙의 정수가 바꽁과 쁘레아 꼬 사원이다.

 

바꽁 사원은 그래서 다섯 개의 성소가 있는 후대의 사원과 달리 힌두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형상화한 중앙의 성소탑 1개만 우뚝 솟아 있는 점이 특징이다해자 위 다리 조각도 유해교반이 아닌 나가만으로 된 점 독특하며 중앙 성소 앞쪽의 장서각 2동과 뒤편의 붉은 벽돌 탑 2동도 특이하다. 붉은 벽돌탑은 원래 2동이 아니라 20개 정도였다고 한다.

사원의 사방 귀퉁이에 화장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흔적이나마 남아있는 것은 앞쪽의 2곳뿐이다. 살아생전의 사람들에겐 평생을 걸 만큼 의미 있는 종교이거나 건물이었겠지만 후대 사람, 특히 우리네처럼 지나치는 관광객에겐 그저 ‘어떤 양식’ 혹은 ‘어떤 종교적 건축’으로 통칭되고 마는 게 지나간 역사의 현주소이다.

 

 

<바꽁 사원 전경>

 

 

<바꽁 사원 입구의 나가>

후대의 힌두교 사원에서 보이는 것처럼 유해교반(젖의 바다 휘젓기)이 아닌, 그냥 나가(7頭 뱀)만 조각했다.

 

 

<바꽁 사원 전경>

중앙 탑을 향한 가파른 계단이 건물 중앙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공포의 계단이 시작된다!

 

 

<바꽁 사원>

 

 

<바꽁 사원 중앙 성소탑 아래에서 본 입구>

공포의 계단에도 굴하지 않고 참으로 멋진(!) 포즈를...

 

 

<힌두교의 파라다이스인 '메루산'을 형상화한 바꽁 사원의 중앙 성소탑>

 

 

<바꽁 사원 뒤쪽의 오른쪽 탑>

 

 

<바꽁 사원 뒤쪽의 왼쪽 탑>

 

 

<바꽁 사원의 뒷모습> 

'난딘'의 엉덩이도 보인다.

 

 

15일의 마지막 코스는 일몰로 유명한 쁘놈 바껭('바껭 산의 사원'이란 뜻)이었다. 바꽁 사원에서 제법 떨어진 쁘놈 바껭의 일몰을 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자락을 허위허위 올랐다. 앙코르 유적과 톤레 샵을 여행하는 사흘 내내 산이라고는 우리나라의 야산만한 야트막한 산을 3개 밖에 못 봤으니 제법 가파른 산인 셈이다. 산자락을 돌아 한참을 오르니 쁘놈 바껭이 정상에 있고 입구에는 시바신을 상징하는 황소 상이, 그 위 가파른 계단 위에는 한 쌍의 사자가 버티고 있다. 지금까지 산을 오르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사원 안의 남아있는 계단을 오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메루산을 형상화한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많은 탑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높은 산 정상에 우뚝 솟은 중앙 성소는 천문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발조차 온전히 디디기 힘든 좁은 폭에 70도라는 가파른 각도의 계단임에도 일몰을 보기 위해 기어서 오르는 사람들이 또 다른 장관이었다. 우리가 정상에 올랐을 때 일몰이 진행 중이었지만 가이드로부터 지시 받은 하산 시간 때문에 마지막 일몰은 볼 수 없었다. 일몰도 떨치고 서둘러 하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을 내려왔을 때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오후 늦게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린 동행, ㅁㅈㄹㄷ님 부부의 짐을 찾은 것이다.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다른 나라의  승객이 자기 가방으로 착각해서 가져갔다가 돌려받은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쁘놈 바껭 사원 입구의 시바신의 상징인 황소 상>

 

 

<쁘놈 바껭 사원의 가파른 계단>

폭이 좁고 70도나 되는 계단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쁘놈 바껭 사원에서 본 일몰>

이 정도의 석양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이 지역이 거의 평지인 까닭에 평지보다 약간 높은 정도인 이곳이 일몰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쁘놈 바껭 중앙 성소에서 기도하는 현지인>

 

  

<쁘놈 바껭 사원의 수많은 부속 탑들>

 

 

<쁘놈 바껭 사원의 탑, 가파른 계단, 일몰을 기다리는 관광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