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서산 해미읍성과 천주교 순교현장

큰누리 2012. 6. 9. 01:02

서산의 해미읍성은 사적 116호이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을 제압하기 위해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축성되어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요약 발췌-

 

 

<해미읍성 안내판> 

 

 

<해미읍성 남문(진남문)>

진남문은 정문 역할도 했다. 수문장 옷을 입은 현지 어르신 두 분(한 분은 아주머니)이 관광객이 출입을 할 때마다 "안녕하셔유, 어서오셔유~"라며 반갑게 맞았다. 돌아올 때 보니 교대를 했는지 인물이 바뀌었다.

 

 

<해미읍성 남문(진남문)의 천정>

새 그림이 잘렸는데 방위로 보아 주작일 듯...

 

 

<해미읍성 남문(진남문)을 성안에서 본 모습>

붉은 각자 중 신해년에 만들었다는 의미는 이해가 되는데 皇明弘治 4年은 무슨 의미인지?

 

 

<성에 전시한 무기들 중 하나>

<신기전>인가 하는 영화에서 본 무기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신기전>에서는 화살 대신 화약을 장전했던 걸로 기억... 이 외에도 재현한 천자총통이 있다.

 

 

<천주교 관련 유적 중 가장 유명한 호야(회화)나무>

'호야나무'라는 명칭은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인데 나무에 얽힌 사연 때문에 고유명사처럼 쓰인다고 한다. 1790년부터 1880년까지 천주교신자들의 머리채를 이 나무가지에 매달아 고문했으며 아직까지도 철사줄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래 사진 중간 아래 쯤의 가로선이 그 철사줄을 묶은 흔적인 듯 하다.

회화나무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를 지닌 학자樹라서 서당이나 향교, 궁궐 등에 단골로 심은 나무이다. 그런 나무를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머리끄덩이를 매달아 고문하는 잔혹한 도구로 썼다. 그것도 일종의 지방 사령부 앞마당에서...

 

 

 

 <호야(회화)나무 근처의 순교기념비>

 

 

<해미읍성의 옥사>

제대로 복원한 것인지? 감옥치고 너무 호화(?)롭다. 2동의 건물과 뒷간이 1개 있다. 네모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실물 크기의 죄수상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제작해 놓았다. 마당의 형틀에 관광객들이 엎드려 곤장을 치는 흉내를 내며 한가롭게 사진들을 찍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인 김대건신부의 부친도 이 곳에서 옥고를 치뤘다고 한다.

 

 

<해미읍성 옥사 마당의 형틀과 곤장>

 

 

<옥사 안의 죄수상(여)>

종교적인 신념을 염두에 두고 제작을 했는지 죄수들의 표정이 담담하다 못해 잔잔하다.

 

 

<옥사 안의 죄수상(남)>

 

 

<서리 가옥 안의 짚풀공예 작품>

해미읍성에서 볼 거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전통공예이다. 옥사 옆에 충청도 지방의 전통가옥 몇 채를 재현해 놓았는데 그 가옥에 어르신들이 한 분씩 앉아서 전통공예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빈 집으로 놔두는 것보다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해미읍성의 상인 가옥과 죽세공예>

 

 

 

<상인 가옥 마당의 수세미>

조롱박이나 수세미 같은 덩굴작물들을 아래처럼 몇 군데에 심고 통로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나이 드신 분들이 취로사업처럼 보이는 풀 매기나 성 안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 게 흠이었지만 어르신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관광차원이라고 치더라도 유적관리에 공력을 들이는 지자체의 노력이 돋보였다. 얼마 전에 본 낙안읍성과 여러 모로 대조가 되었다. 

 

 

<해미읍성의 부농 가옥과 돌담>

 

 

<해미읍성의 조롱박 터널>

빈터를 깔끔하게 잔디로 두는 것보다 텃밭으로 가꾸는 것도 괜찮아보인다. 원래는 그 자리에 관청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었다고 한다.

 

 

<해미읍성 동문>

 

 

<해미읍성 동헌>

 

 

<해미읍성 동헌 관아문(외삼문)>

지금은 작은 면에 지나지 않지만  '호서좌영'이라는 현판으로 보건데 옛날에는 이 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 동헌>

동헌 옆, 뒤로 책사와 부속사가 있고 주변에 내아와 객사가 있다. 

 

 

<해미읍성 동헌 내부>

 

 

<해미읍성 동헌 뒤의 정자 - 청허정>

안내판에는 정자 이름이 있는데 정자에는 현판이 없었다. 어르신 몇 분이 한가하게 솔바람을 맞으며 쉬고 계셨다. 청허정 뒤의 소나무 숲이 깊고 무척 아름답다.

아라메길을 포함하여 서산지역을 훑으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 중의 하나가 소나무 숲이었다. 옛날 이미지 사진을 보니 생뚱맞게 정자 양쪽으로 커다란 히말라야시더가 2그루 있었다. 지금은 잘라버려서 시계가 툭 트였다.

 

 

<청허정 뒤의 소나무 숲과 성곽>

동문에서 북쪽 암문 사이의 성곽이다.

 

 

<성곽에 올라서서 본 청허정>

앞쪽의 지지대를 받친 소나무...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난장이 소나무인데 밉다고 자르지 않고 남겨둔 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청허정 뒤의 소나무숲>

 

 

<북암문-동문 사이의 성곽>

가볍게 뛰어내리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높이의 계단이다. 여장(성가퀴)이 없는 해미읍성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서 성곽 위를 걸으면 기분 '짱'이다!

 

 

<산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부분의 성곽(북암문-동문 사이)>

해미읍성벽의 외곽은 바닥은 굵은 돌로 시작해서 위로 올라갈수록 잔돌로 쌓았다. 성곽 안쪽은 흙이다.

 

 

<해미읍성 동문>

 

 

<해미읍성 동문에서 본 전통가옥들>

오른쪽부터 부농 가옥, 상인 가옥 순이다.

 

 

<해미읍성 동문>

 

 

 <성곽 위에서 본 정문(진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