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경술국치의 현장 답사1(경무총감부 터에서 통감관저 터)

큰누리 2012. 6. 9. 01:33

≪남산골한옥마을(경무총감부 터)에서 통감관저 터≫

제2치 특별답사(경술국치의 현장) 후기는 다른 회원님이 아주 상세하게 올렸다. 이 글(사진)은 그 분 글을 보완하는 정도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답사지에 대한 지식으로 상세한 설명하신 이순우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사실 추운 날씨에 꼼짝 않고 서서 설명을 듣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 추위에도 거의 전원이 5시간이나 되는 답사에 끝까지 동행한 것도 놀라웠다. 그냥 보면서 지나치면 넉넉히 잡아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

 

남산골 한옥마을과 남산, 명동일대는 일제 치하에서 핵심적인 시설이 모여있던 곳이고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시의 건물들이 거의 사라지고 터만 남아있다. 답사를 하는 내내 그렇게 자주 오가던 곳인데 무심히 지나치고, 지난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반성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남산 정상쯤에서 조망한 답사지 개략>

제2차 특별답사가 끝난 열흘 쯤 뒤에 다시 남산을 갈 기회가 있어서 케이블카 상부(위) 정류장 레스토랑에서 답사한 곳을 촬영해 보았다. 똑딱이 디카라 성능이 여의치 않지만 총괄적으로 특별답사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출발지 남산골 한옥마을>

자주 같던 곳인데도 이 곳이 일제 강점기 통치의 정점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초기 일제의 거점이었던 헌병, 경찰의 본부인 경무총감부 터이고 바로 앞의 한국의 집은 정무총감(후에 총독으로 변경된 통감 바로 아래 직위-부통감)의 관저였다. 한옥마을은 조선시대의 남별영터에서 일제 때 경무총감부 - 해방 후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용산의 미군부대처럼 한번 군사주둔지는 반영구적인 군사주둔지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전경>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에서 위 오른쪽에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터>

 

 

<수도방위사령부 터 안내석 앞에서 열강 중이신 이순우 선생님과 일행>

 

 

 

<남산골 한옥마을 정문에서 바라본 창덕궁과 경무총감부를 일본 측에서 편하게 오가게 하기 위해 뚫은 일자도로>

 

 

<한국의 집 입구의 박팽년 집 터 표석>

'감히 내 집 터에 왜놈의 정무총감 관저라니...'  사육신인 박팽년 선생이 무덤에서 눈을 부릅뜨며 했을 말이다. 일제 시기의 정무통감(통감 바로 아래의 부통감 격) 관저였는데 건물이 워낙 쓸만 해서 해방 후에도 남아 미소공동위원들의 숙소 혹은 사무실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뒤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다고...

 

 

 

 

 

<한옥마을 바로 앞의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 터>

왼쪽 앞에서 두번 째 건물(노란 세로 간판이 달린 곳). 남산골 한옥마을과 그 일대는 일제 통치 시기의 핵심 시설이 모여있던 곳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웅진빌딩 맞은편)의 남학당 터>

동, 서, 남, 북, 중학당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의 교육기관으로 요즘으로 치면 일류고등학교 쯤 되겠다. 동학당-대학로, 서학당-시청 앞 조선일보 근처, 남학당-사진의 위치(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왼쪽), 북학당-경복궁 옆, 중학당-現 한국일보 옆에 위치했다.

 

 

<히노데소학교-일출소학교-일신초등학교 터(극동빌딩 - 現 웅진빌딩)>

히노데소학교는 고종황제의 서녀였던 덕혜옹주가 다닌 학교 유명하다. 당시에는 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최신 시설을 갖춘 곳이어서 요인들의 행사장소로도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순우선생님이 당시의 신문을 뒤져 찾은 자료사진을 보니 아름답고 견고해보이는(건물이 무슨 죄인가!) 무척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소학교 주변에는 말을 탄 일본기병들이 즐비했고...

 

 

<대한적십자사(일본 적십자사 터)>

한옥마을 오른쪽 뒤쪽에 위치한 통감(후에 총독)관저 터로 오르는 길의 맞은 편에 있다. 바로 앞(남산애니메이션선터 못미친 곳)에서는 도로 폭이 좁아 제대로 촬영하기 힘들다.

 

 

<통감(후에 총독)관저 터와 극동빌딩(히노데소학교 터)>

see you again!이라 쓰인 간판이 있는 곳이 통감관저 터이고 정면의 흰색 고층건물이 극동빌딩(현 웅진빌딩)이다. 통감관저 터 현재 일반인들에게는 남산유스호스텔(舊 안기부 터) 입구 더 잘 알려있다. 그러고보니 지금의 답사와 관련된 건물들은 명칭이 두어 개씩은 붙는다. 현) 무엇, 구) 무엇무엇 하는 식으로... 머리 나쁜 사람은 근대사 공부도 못한다, ㅎㅎ...

 

 

<통감(후에 총독)관저 터 입구>

이곳은 해방 후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가 몇몇 학자들의 노력으로 겨우 되살아난 장소이다. 아무 것도 없는 빈터에서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고목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였다. 일제 때 발행한 신문의 통감관저 사진과 아래의 두 나무를 비교해서 찾은 것이다. 지금은 보호수가 된 은행나무가 사진 왼쪽에, 느티나무 일부가 오른쪽에 보인다.

 

 

<통감관저 터 표석>

원래 녹우정인가 하는 정자 터라 서울시에서 그 이름으로 안내표지를 세우려던 것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잽싸게(!)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운, 말하자면 불법 표석이라고 한다.^^

 

 

 

<통감관저 터 안쪽에서 바라본 입구> 

오욕의 역사현장을 묵묵히 지킨 보호수들, 느티나무(수령 450년)와 은행나무(수령 400년)가 보인다. 이미 낙엽이 다 졌는데도 이 곳의 은행나무는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