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다산초당과 다산 답사로

큰누리 2012. 10. 2. 20:22

<다산초당 : 전남 강진군 도암면 귤동부락 만덕산 기슭 소재>

남도 답사 1번지에 해당하는 유배의 땅 강진, 구강포 윗자락의 만덕산 기슭에 정약용의 유배지이면서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茶山은 차(茶)나무가 많은 만덕산의 별칭으로 정약용의 호인 다산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역작을 완성했다.

 

다산은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기도 장기로 귀양을 갔는데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서울로 불려갔다가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는 대역죄인이란 이유로 현지인들이 기피한 까닭에 머물 곳이 없어 주막집 뒷방에서 4년, 기타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유배살이 8년째인 1808년 봄에 외가 친척(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 뻘인 해남 윤씨 윤단의 산정이던 이곳 초당으로 옮겼다. 다산은 윤단의 초당채 좌우에 동, 서암을 짓고 주로 동암에서 머물며 독서나 저술활동을 했다. 서암은 주로 윤씨 문중 사람이었던 제자들의 거처로, 초당은 교실로 썼다고 한다.

 

원래의 초당은 1936년에 허물어지고 다산유적보존회가 1957년에 초당을, 1971년부터 1975년에 걸쳐 동, 서암을 복원하고 산마루에 천일각을 새로 지었다. 1975년 복원 당시 초당(현재는 와당^^)의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것이고, 동암에 걸린 2개의 현판 중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가 다산을 위해 직접 쓴 글씨를 확대해서 새긴 것이며, 다른 현판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 비해 호화판(?)으로 재현한 다산초당보다 초당과 동암의 글씨가 어쩌면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다산보다 24살 연하였던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글씨를 쓴 이유는 평소에 다산을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의 건물들은 대부분 복원하거나 새로 세웠지만 초당 옆의 연못(연지와 석가산), 앞마당의 넓고 평평한 바위(다조), 집 뒤의 샘(약천)과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란 각자 등 다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다. 집 뒤의 샘물(약천)은 다산이 마시던 우물, 앞마당의 바위(다조)는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 연지석가산은 다산이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돌을 쌓아 둥근 섬을 만든 후 홈통으로 물을 끌어들여 인공폭포를 만든 것이다. 약천 뒤쪽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란 글씨 역시 다산이 직접 새긴 것이라고 한다.

 

다산은 구강포 앞바다가 보이는 동쪽 산마루에 자주 올라 바람을 쐬거나 바다를 보며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정약전)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 세워진 정자가 천일각이다. 천일각을 지나 만덕산을 넘으며 이어지는 오솔길은 다산과 백련사의 혜장선사가 나이와 유, 불이라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 교유하느라 오간 길이다.

 

 

<다산초당 입구에 있는 다산유물전시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산의 저서, 발명품, 거처 등이 재현 및 전시되어 있어 들러볼만 하다.

 

 

 

<다산유물전시관에 재현한 다산초당 동암>

 

 

<다산유물전시관 뒤의 두충나무밭>

제법 오래 전에 무슨 약으로 쓴다고 두충나무가 꽤나 알려졌었는데... 줄기가 뽀얀게 자작나무 느낌이 난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의 윤종진 묘와 문인석>

윤종진은 해남윤씨로 다산의 제자이면서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의 손자이다. 하루방을 닮은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인석 때문에 꽤나 알려졌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의 삼나무(스기)들>

 

 

<다산초당의 서암이 보이는 위치>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거리는 짧지만 울창한 삼나무로 인해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땅위로 튀어나온 삼나무 뿌리들, 곧기로 유명한 삼나무 줄기가 둥글게 휜 모습도 볼거리이다.

 

 

<다산초당 서암과 다조>

당시 공사 중인지 접근 불가! 다산의 제자들인 윤씨 문중 사람들의 거처이다. 얼핏 듣기로 18명이었다는데 이 좁은 공간에 상주는 못했을 것 같다. 앞쪽에 보이는 평평한 돌이 다조이다. 다조 위에서 다산이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였다고 한다.

다산초당이 위치한 만덕산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천에 차나무가 널려있어서 다산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이다. 차나무 만큼이나 많은 것이 대나무와 동백나무이고 백련사 옆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있다.

 

 

<다산초당>

원래의 초당은 1936년에 허물어지고 1975년에 같은 자리에 복원한 지금의 초당(草堂이 아니라 瓦堂)은 귀양살이 한 사람의 집 치고 너무 화려하다 해서 복원할 당시 말이 좀 있었다고 한다. 주변의 녹음이 짙고 마당이 좁아서 겨울 아니면 어떤 이의 사진을 봐도 이 (혹은 반대편) 각도, 이 모양새이다.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1975년에 복원하면서 집자한 것. 마당의 평평한 돌은 다조이다.

 

 

<다산초당 연지석가산> 

네모난 연못 속에 돌로 만든 둥근 섬(천원지방!), 연못 위쪽으로 인공폭포였다는 홈통이 보인다. 현재의 우리 눈에는 유치하게(?) 보이지만 유배 생활을 하는 다산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소박한 사치(!)였을 것이다.

 

 

<초당 뒤의 샘(약천)>

바위 틈으로 흘러나오던 물을 다산이 우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집 뒤의 각자 '정석'>

샘 위쪽에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한다.

 

 

<다산초당 동암(송풍루)>

동암은 다산의 사랑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기거하며 손님 맞이, 독서(장서가 2,000권이 넘었다고!), 저술 활동 등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2개의 현판이 더 유명하다.

 

 

 

<다산초당 동암의 2개의 현판>

윗 사진 보정산방(寶丁山 房)은 추사가 존경하는 다산을 위해 쓴 글씨 확대해서 1975년 복원 당시에 새긴 것, 아래 사진의 다산동암(茶山東菴)은 복원 당시에 다산의 필체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

다산초당 동쪽 마루에 있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던 정자인데 초당을 복원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장소가 협소해서 사진 찍기조차 쉽지 않은데 정상 부근의 해월루 자리라면 몰라도 다산이 과연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볼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천일각부터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다산 산책로>

800m 정도라는데 실제로는 좀더 길게 느껴진다. 산책로 좌우로 자잘한 시누대와 삼나무가 촘촘하고 그 아래 볕 밝은 곳에는 차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다산 산책로의 시누대와 삼나무, 차나무>

 

 

<다산 산책로의 일본인들이 최고의 욕조 재료로 치는 삼나무>

향기가 좋고 곧게 자라는 게 특징인데 만덕산에서는 이렇게 기형으로 자란 나무들을 제법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다산 산책로> 

 

 

 

<다산 산책로의 차나무>

수많은 정약용의 호 중에서 '다산'이라는 호를 추가하고 만덕산을 '다산'이란 별칭으로 부르게 만든 당사자이다.

 

 

<다산 산책로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자 해월루>

천일각보다 이곳에 올라야 구강포, 강진만 등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해월루에서 본 구강포, 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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