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미완의 서울성곽돌기4-북악산

큰누리 2012. 11. 11. 13:50

미완의 15차 서울 성곽돌기4 - 완주를 기약하며.

 

<북악산(백악산)에서 창의문까지의 서울성곽>

숙종 때의 반듯한 성곽 돌들을 따라 왼쪽으로 소나무 숲, 오른쪽으로 산과 성곽, 그리고 철책들을 보면서 20여분을 갔다. 그 앞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몸부림치듯이 오르니 청운대 293m라는 표석이 있다. 이곳에서 남산과 시내조망이 가능하고 서울 성곽 중에서 가장 또렷한 실명제 刻字 돌들을 볼 수 있다. 한계에 다다른 몸을 질질 끌고 따라가는데 광나루님이 아득히 보이는 눈앞의 지점을 가리키며 저곳만 넘으면 내리막이니 힘을 내라고 한다.

 

마지막 오르막이란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지금까지 본 어느 곳보다 길고 높은 눈앞의 계단을 보니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다. 일행은 점처럼 까마득한데 나와 광나루님만 처져(결국 나 때문이지만) 마지막 힘을 모으는데 광나루님이 부르는 곳으로 가니 소나무가 있다. 너무 힘들어서 역사적인 이 소나무를 놓칠 뻔 했다. 1. 21사태 때 총격전을 벌이면서 15발의 총탄을 맞은 바로 그 소나무이다.

 

 

<청운대 못미처에서 뒤돌아 본 동북쪽의 성곽> 

 

 

 <청운대 근처의 刻字 성돌> 

2개가 잇달아 있다.

 

 

<1. 21사태 소나무의 탄흔들>

 

 

얼마 전까지는 총탄자국이 그대로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시멘트 같은 걸로 총탄자국을 메웠지만 그래도 선명하다. 1. 21사태가 일어난 게 1968년이다. 대통령 관저 바로 뒷산까지 적군 게릴라가 와서 총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박대통령이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어쩌면 더 좋은 이미지로 남았을 수도 있는 박대통령을 완고하고 장기집권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니 그야말로 역사적인 나무이다.

 

1. 21사태 소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지나온 성곽과 북악(백악)산 정상까지 오르는 구간의 성곽 곡선은 정말 아름답다. 완만하게 S자형을 그리며 오르내리는 성곽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예술이 따로 없고 마음까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초소에서 눈을 번득이며 임무를 다하는 초소병들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드디어 북악(백악)산 정상에 올랐다. 일찌감치 올라 한숨 돌린 일행들과 바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바위 위를 올라갈 기력도 없어 단체사진은 바위 아래에서 찍었지만 나중에 바위 위에서 독사진을 찍었다.

 

 

<청운대와 백악(북악)산 사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 가장 아름다운 성곽의 모습> 

 

 

<백악(북악)산 정상 표석>

 

 

그냥 오르는 것만 해도 힘든 곳인데 무거운 돌덩이를 끌어올려 성을 쌓은 민초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난 태어나서 하루에 이렇게 긴 코스를 걷기는 커녕 3개나 되는 산을 오른 기억조차 없다. 이 산들 때문에 성곽 종주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그렇게 머뭇거렸던 것인데 참여해보니 정말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힘든 일정이다. 나처럼 산을 잘 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그래도 종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상에서 내려가다 보니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발로 내디디기엔 넓고 두 걸음으로 나눠 걷기엔 좁은 고약한 계단 폭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왼쪽 무릎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걸음 한걸음이 고역이었다. 관절염 환자는 등산보다 하산이 고통스럽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일찌감치 내려간 일행들이 행여 나 때문에 인왕산 성곽 돌기에 차질이 생길까봐 휴대폰으로 포기 의사를 밝히고 다른 분들의 완주를 빌었다. 나를 남기고 가는 걸 미안해했지만 천만의 말씀, 부실한 내가 이만큼이라도 따라붙을 수 있었던 것은 역사현장을 보고 싶은 내 의지, 그리고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과 통화한 이후로 숨을 돌리며 최근에 읽은 <서울, 북촌에서>와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에 등장하는 석파정, 부암, 환기미술관 등을 찾아봤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실패했다.

 

 

 <마지막 쉼터인 코끼리쉼터 소나무 사이로 본 인왕산> 

 

 

<보안구간 통행 패찰>

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까지의 구간에서는 이 패찰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뻗정다리로 걸어보기도 하고 옆으로도 걷고, 뒤로도 걸었지만 남은 계단이 너무 많고 통증이 심했다. 마지막 휴게소인 코끼리휴게소에서 주저앉아 쉬다가 문화재보호재단 소속인 젊은 가이드를 만났다. 어차피 종주는 포기한 상황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리의 통증을 호소했더니 운동선수들이 타박상에 쓰는 분무형 파스를 뿌려주며 더 필요하면 가면서 쓰다가 창의문 관리소에 맡기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젊은 김두환 가이드님, 고마웠습니다!

그 파스의 힘으로 겨우 창의문 관리소에 내려온 시간이 3시 54분이었다. 출입증을 반납하고 안도감과 아쉬움으로 앞의 인왕산을 바라보니 우리 일행이 막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따라붙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누르며 그 분들이 완주하기를 다시 빌었다.

 

 

<창의문안내소에서 본 인왕산>

바로 왼쪽 철책 아래로 창의문이 보인다.

 

 

<창의문안내소에서 본 인왕산과 교회 왼쪽으로 이어진 성곽>

 

 

허탈한 마음으로 창의문 문루에 올라 가장 온전하게 보존이 됐다는 누각을 둘러봤다. 창의문(북소문)은 서북 방향의 소문으로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며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남은 곳이다. 고지식하고 편협해서 조선 후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장본인, 그래서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국가로 봐서는 더 나았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인조반정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이 문으로 인조가 반군을 끌고 입성했기 때문이다.

 

고풍스런 누각을 멍하니 바라보다 내려오니 빗물의 흐름을 유도하는 연꽃 홈(수구)이 문 위 양쪽으로 있고 문 중앙에 봉황이 보인다. 봉황에 대해서는 이 동네에 지네가 많아서 지네의 천적인 닭을 형상화한 거란 이야기가 있다.

 

 

<창의문(자하문)과 인왕산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

언덕의 일행이 점으로 보인다, ㅠㅠ...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창의문 누각>

 

 

<창의문(자하문) 뒤쪽 모습> 

북악산에서 내려오면 뒤쪽과 만난다. 문 위 중앙에 봉황이, 좌우로 빗물을 유도한 연꽃무늬 수구(빗물 홈통)가 보인다. 

 

 

<성밖에서 본 창의문(앞쪽)>

 

 

<창의문과 북악산으로 연결되는 성곽>

 

 

<성 안쪽에서 본 창의문>

 

 

창의문 쉼터에 윷판과 투호기구가 있고 일반인 몇이 제기를 차고 있다. 길가로 내려서니 1. 21사태 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동상, 추모비가 보였다. 길을 건너 버스를 기다리면서 온몸에 걷잡을 수 없는 한기가 들기 시작해서 집에 도착하기까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1.21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추모비>

 

 

 

 <집으로 오는 버스를 갈아탄 연건동 조계사 구역의 우정총국 복원 건물>

이 건물 개관식 날,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우정총국 앞의 중수 기념비>

 

사진을 정리하고 이 글을 쓰는 사흘 동안 완주를 못한 서울 성곽돌기 후유증이 심각하다. 입술은 부르트고, 종아리는 알이 박히고, 어제부터 가슴에 통증까지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웃으면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미답의 인왕산 코스는 더 공부를 한 후에 혼자라도 도전할 작정이다. 나홀로에서 주관하는 서울 성곽돌기는 코스가 바뀌건 안 바뀌건 여건이 허락된다면 몇 번이라도 더 참여하고 싶은 매력적인 답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