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울 문묘와 성균관

큰누리 2013. 1. 10. 01:02

<서울 문묘와 성균관>

문묘와 성균관을 답사한 날,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이번 겨울 들어 눈이 많이 내리고 얼어붙는 통에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엉금엉금, 조심조심...

답사 후반, 즉 문묘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해서 그나마 날이 한 부조를 했다. 일반인들이 잘 들르지 않는 곳인데다 눈까지 내리니 문묘와 성균관은 그야말로 우리가 접수(!)했다. 예전에 <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가 상당히 떴던 걸로 알고 있다.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본 적이 없음에도 성균관을 답사하는 내내 그 드라마가 떠올랐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강학공간인 성균관과 함께 있고, 무묘는 관우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동묘가 국립이다. 서울 문묘는 국가차원에서 관리한 공자 사당으로 공자와 유학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유생들의 공부 공간인 명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을 유생들의 공부 장소로 보기엔 좀 작긴 하지만 특별한 인재들이 부속 건물들에서 묵으면서 공부한 최고 교육기관임은 확실하다. 공자 사당과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 묶여 있는 것은 유교를 통치 기반으로 삼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서울 문묘는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는데 다른 점이라면 공자를 모신 대성전이 앞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국가 최고의 교육 기관답게 식당, 동·서재의 기숙 시설 등의 부속건물이 있고 제사와 관련한 수복청, 향관청 등의 부속 기관이 있는 점이 특별하다. 가끔 왕도 이곳에 납시었기 때문에 왕의 가마를 놓는 전용 주차공간인 하마대도 동삼문 밖에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은 보물 제141호이고, 크기가 어마어마한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 2그루는 수령이 500여년으로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문묘 안내도>

안내도가 낡고 중간에 칠로 지운 부분이 많아 보기에 불편하다. 새로운 안내도를 세우고, 동삼문 앞에 있는 바로 맞은편 예식장의 주차장을 유적보호 차원에서 옮겼으면 한다.

 

전에 가끔 성균관대를 갈 때 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하마비가 궁금했다. 바로 옆에 문묘, 성균관이 있고 규모가 상당히 큰 데도 존재를 몰랐다. 답사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에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스치는 눈앞의 '사실' 혹은 '내용'들을 붙들고 싶어 답사를 하는지 모른다. 붙들어 무엇에 쓸지는 나도 모른다.^^

 

 

<성균관(문묘)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탕평비와 하마비>

하마비는 종묘, 궁궐, 문묘 앞에 세운 석비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신성한 곳이니)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1품 이하는 궐문에서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라고 상세하게 규정했다.

 

 

 

<왕의 가마인 어연의 전용 주차 공간인 하마대>

동삼문 밖에 있다.

 

 

<성균관 교사들의 숙소인 동재>

비교적 긴 건물이지만 성균관 유생들이 묵기에 너무 작아서 다시 자료를 찾아보니 선생들의 숙소였다고 한다. 일행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들른 동안 나는 아무도 없는 동재와 정록청, 진사식당, 향관청 방향으로 돌았다.

 

 

 

<성균관에서 유독 차분한 느낌을 주는 건물 정록청>

윗 사진에서 앞쪽으로 하얀 벽과 지붕의 일부가 보이는 건물(즉, 정록청 맞은편)은 직방이다.

정록청은 참하관이 성균관에서 당시의 정치나 행정에 관한 일(時政)을 기록하던 곳으로 기록된 문건(玄冊)은 외부 유출을 금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참하관들의 휴게소로 이용되거나 제사를 관리하는 관원들의 제사 준비 장소로 이용되었다. 초반에는 나름 정치에 대한 비판 기능을 담당 했을 것 같은데 후대로 오면서 그 존재가 미미해져 버린 듯 하다.

 

 

<성균관(문묘) 대기실인 직방>

 

 

<성균관(문묘) 부속건물들>

왼쪽에서부터 육일각, 향관청, 정록청이다.

 

 

<성균관(문묘) 향관청>

향관청은 제사를 주관하는 벼슬아치들이 거주하며 심신을 경건하게 가다듬던 곳이다.

 

 

<성균관(문묘) 존경각(좌)과 육일각(우)>

존경각은 성균관의 도서관으로 성종 6년(1475) 지었다가 중종 9년(1514)에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었다. 육일각은 일종의 무기 창고인데 왕이 성균관에 납시어 행하던 대사례 때 사용한 궁시(활과 화살), 웅후(곰의 머리가 그려진 과녁), 미후(흰가죽으로 된 큰 사슴머리 과녁) 등을 보관한 곳이다.

 

 

<성균관 최고의 포토 존 서울 문묘 정록청(좌)과 직방(우)>

 

 

<성균관 선생들의 숙소인 동재에 있는 이 물건(?)의 용도는?>

넌 도대체 누구며,뭐 하는 놈이냐?..........정답은 구식 소화기이다!

 

 

<조선 최고 지식인을 길러낸 요람 성균관 명륜당>

일반적인 건물보다 장중하고 크지만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이름에 비해 건물의 규모가 좀 빈약하다. 너무 특권층만을 위한 시설은 아니었는지? 대청 형식으로 된 명륜당 본 건물 천정에는 각종 현판들이 가득 붙어있고 좌, 우 건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균관 명륜당 월대와 측면>

사진 중앙에 보이는 회랑 같은 건물은 서재이다. 

 

 

 

<서울 문묘 명륜당의 현판들>

학문을 장려하는 글일 것이라 추정하지만 더덕더덕,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 현판만 연구해도 논문 몇개는 족히 나올 것 같다. 필체, 누구의 글, 무슨 내용 등...

 

 

 

 

<서울 문묘 은행나무>

앞서 설명 한 것처럼 서울 문묘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 2그루는 수령이 500여년으로 천연기념물 제59호이다. 늙은 은행나무에서 나타나는 유주(나무 줄기 부분이 고드름처럼 늘어진 것)가 많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암 은행나무와 달리 수나무라고 한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에서 대성전으로 가는 길>

왼쪽에서부터 동무, 묘정비각, 대성전이다. 동, 서무는 여러 유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앞 행각이다.

 

 

<서울 문묘 대성전>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문이 꽁꽁 잠겨있어 틈으로 들여다보니 종묘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관리되기 전 모습처럼 제기들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월대에서 본 서울 문묘 대성전과 서무>

표면적으로 내 눈에 확실하게 명륜당과 대성전이 다르게 각인된 점은 명륜당은 대청처럼 open된 공간인데 비해 대성전은 굳게 닫혀있고 기둥 아래에 흰칠이 되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