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고려대학교 박물관(일민박물관)2

큰누리 2013. 1. 22. 03:25

<수저집>

수저 하나 넣는데 이렇게 공력을 들였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국보 제249호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것이다. 16권의 화첩으로 제작되었으며 모두 연결하면 가로 584cm, 세로 273cm이다. 1824년에서 1830년 사이에 천,지,인이란 이름으로 3벌이 제작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구조와 배치, 규모, 자연환경을 자세히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궐반차도>

 

 

<동국여도>

 

 

<요람>

요람은 중요한 내용만 뽑아 간추려 놓은 책으로 전국의 지명이 적혀있다. 재정이나 군사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백자투각화초문필통, 찬합, 백자청화모란국화문주전자>

 

 

<신랑, 신부의 옷>

신부가 입는 활옷은 원래 공주나 옹주가 입는 대례복인데 서민도 결혼식 때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백자명기>

명기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그릇, 악기, 생활용품 등으로 상징적이기 때문에 실물보다 작게 만든다.

 

 

<백자태항아리, 태지석>

태항아리는 왕실에서 왕자나 왕녀의 태를 담는 항아리로 주로 외항아리 속에 내항아리가 들어있다. 태지석은 태의 주인공의 이름, 생년월일을 기록한 것으로 태항아리와 함께 길지에 묻었다.

 

 

<백자청화묘지석>

위쪽은 15세기의 인천 이씨, 아래쪽은 18세기의 양주조씨 묘지석이다.

 

 

<병부, 선전패, 전령패, 오마패>

병부는 조선시대에 군대를 동원할 때 쓰는 동글납작한 나무패로 반을 잘라서 한쪽은 왕이, 다른 한쪽은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 교서와 병부의 반쪽을 보여주면 지방관이 두쪽을 맞춰보고 군대를 지원해줬다.

선전패는 좌우 포도대장이 지닌 직사각형의 패이다. 오마패는 관리가 지방으로 갈 때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증표로 말의 마릿수가 다르며 어사가 인장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서대와 흉배>

서대는 일품의 벼슬아치가 두르던 허리띠로 소의 뿔로 장식했으며, 흉배는 문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학을, 무관 관복에는 범을 사각형 안에 수놓아 붙였다. 아래의 흉배는 기린과 구름 자수가 있으므로 왕의 적자인 대군의 흉배이다. 흥선대원군도 기린흉배를 했다고 한다.

 

 

 

<강경패>

차기 대권주자인 왕세자의 성적을 매길 때 사용하는 수준별 성적표이다. 通은 우수, 略은 양호, 粗는 부족하거나 미흡, 不은 낙제를 의미한다. 왕세자는 7~8세부터 하루 7시간 이상을 공부해야 하고, 매일 쪽지시험을 보고, 매달 2번씩 20명의 스승 앞에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고달픈 신세였다!

 

 

<사서죽편>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에 있는 내용을 대나무에 기록한 다음 임의로 뽑아 시험을 보는 일종의 시험지이다.

 

 

<인장들>

맨 왼쪽의 거북이는 현종비의 인장이다.

 

 

<근대의 두 지식인 민영환, 유길준전시관>

 유길준이 입었던 단령, 칙서, 사용한 물품 등이다.

 

 

<유길준의 의치, 면도 도구, 훈장, 인장 등>

서양문물을 먼저 접한 선각자 답게 당시로서는 최신식 물품을 사용했다.

 

 

<유길준의 명함과 덤머 아카데미의 기부 요청 편지>

 

 

<유길준과 관련된 칙명과 책> 

 

 

<민영환의 옷, 칙명, 혈죽>

 

 

<충정공 민영환의 혈죽>

혈죽은 민영환이 자결(1905.11)한 8개월 후인 1906년 7월에 피로 얼룩진 그의 옷과 단도를 넣어둔 헛간에서 솟아나온 대나무이다. 장판지를 바른 마루 틈 사이로 죽순이 솟았다고 한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뻘로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20세에 정3품 관직에 오른 후 러시아, 캐나다, 미국 등을 방문하면서 일찍 선진문물을 접했다. 귀국 후 서구의 신식 문물 도입을 주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4년에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반발하다 한직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다 투옥되었고 이후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다 1905년 11월 5일에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결했다.

 

 

<충정공 민영환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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