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창덕궁, 종묘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1

큰누리 2013. 3. 31. 16:27

<창덕궁과 종묘 주변>

 답사 경로

창덕궁 돈화문→ 금위영 터(이왕직 아악부)→ 금호문(창덕궁 경찰서)→ 경추문→ 요금문→ 북일영 터(무관학교, 신선원전)→ 중앙학교→ 후원 뒷길→ 문묘(성균관)→ 집춘문(왕의 성균관 행차로)→ 월근문과 경모궁→ 홍화문과 선인문→ 동원예식장 터(現 교직원공제회관)→ 어영청 터(동아연초, 전매국공장)→ 이현궁 터(장용영, 훈국 동별영)→ 종묘 앞→ 종묘 담장길(순라길)→ 단봉문(종묘 관통도로, 구름다리)

 

 

창덕궁 주변과 시설에 대한 개요 

창덕궁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립한 법궁 경복궁보다 10년이 늦은 태종 5년(1405)에 이궁으로 건립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고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면서 주요 관아는 경복궁 육조 앞길에 그대로 있되, 왕이 창덕궁에서 거주했으므로 조선 후기의 정변과 전란은 대개 창덕궁이 중심무대였다. 창덕궁 돈화문 앞길은 경복궁 광화문 앞처럼 육조관아 등의 일반 관청인 궐외각사가 적은 반면에 궁궐 호위와 관련된 시설이 많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과 관련된 군사 주둔지가 궁궐을 둘러싸고 설치된 특징이 있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에도 고종이 창덕궁에서 10년 가까이 머물렀으므로 근대 격변기에 발생한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도 창덕궁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이다.

 

이 답사는 daum의 <나홀로 테마여행> cafe 주최로 사학자 이순우선생님을 모시고 비정기적으로 진행한 행사이다. 2013년 들어 창덕궁, 경복궁, 경희궁 담장길을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는 행사가 진행되었고 창덕궁, 종묘 담장길은 그 첫번째 행사이다.

 

 

<창덕궁 앞길과 돈화문>

대로로 뻥 뚫린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비해 상당히 협소하다. 이 길로 돈화문을 향해 앞으로 나가면 종부시 터, 비변사 터, 금위영 터 등이 포진해 있다. 이 위치에서 뒤돌아보면 남산한옥마을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다. 그 이유는 일제 통감부가 현재의 남산한옥마을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왕을 알현하는데 편의를 위해 직선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돈화문 앞의 관청 터들>

종부시는 왕실족보와 종실을 관리하던 관청, 비변사는 중종 때 창설된 일종의 국가비상대책위원회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할 정도로 비대한 기구가 되었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돈화문 앞 금위영 터 : 現 삼환빌딩>

돈화문에서 남서쪽 대각선 방향에 위치. 금위영은 숙종 8년(1682)에 설치된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의 하나로 대궐 경비 및 서울 남쪽의 수비를 담당한 기구이다. 고종 18년(1881), 근대화 과정에서 오군영이 구식군대로 취급되어 기구가 축소되고 새로 설치한 별기군과 차별대우를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이듬 해(1882)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임오군란 이후 금위영 터는 군사관련 관청,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천황이 내린 은사금으로 양제, 양계, 제사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로 바뀌었다가 1926년에 이왕직아악대가 들어오고 해방 후에는 국립국악원이 1968년 2월에 장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 있었다.

 

 

<창덕궁 금호문 앞 송학선의사 의거 터>

1926년, 4월 28일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의 국상 때 문상을 하러 온 사이토 총독을 향해 송학선 의사가 저격 한 사건이다. 오인 공격으로 주변의 경성부 평의원 타카야마가 즉사하고 동승한 일본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인근에서 체포되어 1927년 5월에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창덕궁 서행랑문 금호문>

일반 신하(朝臣)는 금호문, 대관(臺官)은 돈화문, 내시는 단봉문, 사복시(말, 수레, 목축 등 탈 것을 관장)는 선인문으로 신분에 따라 드나드는 관행이 굳어지자 그 폐해를 없애고자 왕이 직접 나서서 원래대로 신분과 관계없이 드나들도록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금호문 맞은편에는 대한제국 시기에 강력한 경찰권을 행사한 궁내부 소속 경위원(이후 경위국→ 일제 강점기에는 황궁경찰서→ 창덕궁경찰서→ 해방 후 경무대경찰서)이 있었다.

 

 

<창덕궁 서쪽 담장길>

창덕궁 서행랑문인 금호문에서 서문인 경추문 사이의 서쪽 궁장길이다. 사진 왼편으로 현대빌딩 본관, 불교박물관이 있고 야트막한 계산 정상에 대동세무고등학교가 있으며 그 아래로 북촌한옥마을이 이어진다.

 

 

<창덕궁 서문인 경추문 맞은편의 금위영 서영 터>

 

 

<창덕궁 서문인 경추(景秋)문>

창덕궁 서장문은 요금문이고, 금호문과 요금문 사이에 있는 서문 경추문은 후대에 새로 지었거나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궁궐 서쪽문은 '秋'가 자주 들어간다. 경복궁 서문은 영추(迎秋)문...

 

 

<창덕궁 서쪽 담장길>

서문인 경추문에서 서장문인 요금문 구간이다. 이 구간은 궁궐 담장을 민가 담장으로 이용한 곳이 유독 많다.

 

 

<창덕궁 담장과 민가>

 

 

<창덕궁 서장문인 요금문과 주변>

요금문 맞은편에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계산 너머 맞은편에 대동세무고등학교가 있고 문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원서동 빨래 터가 있다. 요금문은 역대 국왕의 행차나 경우궁과 계동궁(남연군 사당), 운현궁 등에 행차할 때 자주 이용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이 개화파와 동행하여 경우궁으로 가는 피신로였다.

 

 

 

<요금문 맞은편 계산에서 본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계산은 높지 않지만 주변이 평지인 까닭에 창덕궁을 잘 조망할 수 있다. 요금문을 지나 원서동 빨래 터(신선원전)가 막다른 길이라 더 이상 창덕궁 담을 따라 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일제 때 궁궐 살림을 담당한 이왕직장관 관사 터인 대동세무고등학교를 둘러보기 위해 계산을 넘었다.

 

 

<계산에서 본 창덕궁>

 

 

<계산 정상 부근에서의 조망>

왼쪽 중앙의 숲이 창덕궁이다. 서울답사를 하면서 집의 효율성을 무시한 체 지형이나 주변 여건에 따라 심하게 각이 지거나 폭이 좁은 기이한(?) 집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사진 오른쪽의 집이 그런 경우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일군 이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계산 정상의 대동세무고등학교>

글을 쓰면서 자꾸 '계산'을 운운하다보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의 계산은 창덕궁과 가회동 북촌한옥마을 사이에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가파른 언덕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좀더 부연하면 현대빌딩 본관 뒤쪽의 언덕이다.

북촌한옥마을을 답사하는 이들은 보통 경복궁쪽에서 들어와 마지막에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에 올라 철책 사이로 <김성수가옥>까지 보고 내려가는데 대동세무고등학교 너머로 고회동가옥, 백홍범가옥, 원서동 빨래 터가 있고 창덕궁이 이어진다. 현재의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일제 강점기에 왕실 살림을 관장한 이왕직장관(궁내부대신) 관사가 있었다. 

 

 

 

<대동세무고등학교 철책 사이로 본 인촌 김성수가옥>

중앙 왼편에 보이는 인물상이 누구인가에 대해 함께한 분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김성수가옥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어느 해인가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간 적이 있는데 평소에 상당히 공들여 관리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엄청나게 크고, 순하고 잘 생긴 멜라뮤트를 마당에서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