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창덕궁, 종묘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2

큰누리 2013. 4. 1. 21:58

<창덕궁 신선원전, 중앙학교 주변>

 답사코스

대동세무고등학교(이왕직관사 터)에서 다시 창덕궁 쪽으로 내려와... 원서동 고희동가옥→ 원서동 빨래 터→ 신선원전(북일영, 무관학교)→ 원서동 백홍범가옥→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창덕궁 뒷길→ 창덕궁 건무문

 

 

 <원서동 고희동가옥, 등록문화재 제84호>

춘곡 고희동이 일본에서 유학 후 귀국하여 1918년에 직접 설계해서 지은 목조 한옥으로 41년간 거주했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미술교육과 미술 행정, 미술 운동가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처음에는 안채, 사랑채, 문간채, 곳간채로 구성되었으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된 것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 안채와 사랑채를 보수, 복원하였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이며 긴 복도와 유리문, 툇마루와 대청의 실내화, 개량 화장실 등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문 밖의 안내문을 요약--

 

 

<원서동 빨래 터>

궁궐에서 이곳으로 흘러나오는 쌀뜨물을 이용해 궁밖 백성들이 빨래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新선원전 외삼문>

新선원전은 비개방구역이기 때문에 뒤쪽 언덕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 내려다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의 작은 문이 궁금해서 이곳 저곳 뒤져보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신선원전 외삼문은 창덕궁 궁장 서쪽 끄트머리의 막다른 곳에 있고 바로 아래에 원서동 빨래 터가 있다.

 

新선원전은 창덕궁 궐내가 아니라 궁 밖 구역이며 원래 이곳은 오군영 중의 하나인 훈련도감 소속의 북영 터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이곳을 북일영이라 부르다가 1906년 7월부터 1908년 1월까지는 무관학교로 바뀌었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덕수궁이 비게 되자 덕수궁 선원전에 있던 역대 왕의 어진을 1920년에 창덕궁 舊선원전으로 옮겼다가 1921년  新선원전이 완공되면서 어진을 이곳에 봉안했다. 이곳 신선원전에는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이 남아있었으나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길에 옮겨졌다가 1954년 현지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원서동 백홍범가옥,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3호>

1910년대에 지어졌으며 집의 이름은 문화재 지정 당시 집 소유주의 이름을 따른 것이고 한 때 상궁이 살았던 집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한옥과 1930년대 이후의 집 장사가 지은 집 사이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현재는 부엌가구 회사가 인수한 듯 하며 비공개 가옥이다.

 

 

<원서동 빨래 터 앞의 지도 벽화>

 

 

<중앙고등학교 앞의 아기자기한 가게>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제281호)> 

1908년 기호흥학회가 설립한 기호학교를 모체로 1910년 융희학교와 합병하면서 사립중앙학교로 개명했다. 1915년 운영난에 처하자 인촌 김성수가 양부와 친부의 후원을 받아 인수했다. 1917년 현재의 위치(계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동년 12월에 이전한 후 중앙보통학교와 중앙중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원래 본관은 1934년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본관은 1937년에  건축가 박동진의 설계로 준공된 것이다.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과 양식이 비슷하다. 중앙학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 의거를 계획했던 곳으로 교정에 삼일운동책원 기념비 삼일기념관이 남아있다.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교정의 삼일기념관과 삼일운동책원지비>

 

 

 

<고풍스런 중앙고등학교 동, 서관(사적 제282호, 283호)>

 

 

<고려사이버대학교, 중앙중학교, 인촌도서관>

아래의 중앙중학교 뒷길은 북촌에서 성균관대학교로 넘어가는 지름길로 750m의 거리이다. 지난 겨울,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삼일천하 이후 도망가는 길을 추적 답사할 때 그 길로 걸었다.

사진 오른편의 인촌도서관 오른쪽 뒤부터 본격적으로 창덕궁 북담장 이어지고 산을 넘으면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문묘)이다. 갑신정변 개화파의 피신 루트 답사를 할 때 경복궁에서 성균관대학교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사실에 놀랐고,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호젓한 산길이 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중앙고등학교운동장에서 본 신선원전의 괘궁정>

훈국 북영의 군사들이 활쏘기를 하던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정자 현판이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기단부 바위에 괘궁암이란 각자가 있다고 한다. 창덕궁을 소개하는 어느 안내도에도 신선원전이나 이 정자와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중앙고등학교운동장에서 본 新선원전>

원래 역대 왕의 어진은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겼다 소실되었는데 지금의 선원전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죽은 왕들의 영정을 모시는 곳이어서인지 건물이 주는 느낌이 종묘나 성균관(문묘)의 대성전과 비슷하다.

 

 

<新선원전 구역 내의 의효전>

덕수궁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데 이곳으로 옮겼다. 맨 위에 첨부한 Daum에서 제공하는 지도에는 '의로전'으로 오기되어 있다.

 

 

<중앙고등학교를 지난 지점의 창덕궁 북담장>

경사진 산을 따라 층을 이룬 담장과 석양에 길게 드리운 담장 기와의 그림자가 무척 아름답다.

 

 

 

<성균관대학교 캠퍼스>

아래의 사진 2장은 2011년 12월 4일, 갑신정변 개화파 피신 루트 답사 당시에 촬영한 것이다. 위 사진의 언덕을 넘으면 성균관대학교 호암관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 성균관(문묘)이 있다. 성균관대학교는 창덕궁 북쪽 담에서 시작하여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볼 수는 없지만)을 따라 길게 캠퍼스가 있다.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앞쪽에서 본 북장문(건무문)>

철책과 잡목에 가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서에 등장하는 북장문은 광지문인데 위치 상으로 이 문이 확실하다고 한다. 하지만 접근이 어렵고 현판조차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