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복건성, 산동성

중국 복건성 여행13 - 무이궁(무이고대명인관)과 대홍포

큰누리 2013. 9. 1. 19:54

무이구곡 1곡 선착장에서 내린 후 무이산박물관에 잠깐 들렀다가 송가(宋街)를 지나 무이고대명인관으로 갔다. 무이궁이라고 들었는데 무이궁과 고대명인관은 무슨 관계이지? 변변한 안내문이나 설명서도 없고, 외국어 같은 한국어를 하는 현지 중국 가이드는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니 짐작으로 보고, 느낄 밖에... 뭔가 엄숙함이 느껴지는 곳인데 참 답답했다.

무이고대명인관이 과거에 무이궁이었다는 것은 무이궁을 나올 때 알았다. 우리가 들어간 쪽의 패방에는 '宋街'라고 써 있었는데 나올 때 본 문에는 '무이궁'으로 써 있었다.

 

무이궁(중국어 : 우이궁)은 주희기념관 옆, 대왕봉 남쪽에 있는 무이산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 궁관이다. 당나라 때인 742~755년에 설립되어 송나라 때에는 건물이 300여 칸에 이르렀고 '충우만년궁'이란 사액을 받았다. 송나라 때에는 유학자들이 매년 가을 이곳에서 무이군에게 제사를 올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만년궁, 삼청전, 용정 등이다. 현재 만년궁에는 무이산의 명인들을 모셨고, 벽에 고대 무이산 원주민인 월족(민족) 관련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마당 중앙에는 '민월부형정'이라 쓰인 거대한 이 걸려있었다. 부근 어딘가에서 출토되었거나 가학선관의 부장품 솥을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주전 동쪽(오른쪽) 앞에는 '千古風流'란 편액이 걸린 3칸 짜리 건물 있고, 그 앞에 주희가 심었다는 900년된 고목 송계(宋桂)가 있다. 송계는 말대로 계수나무가 아니라 금목서란 나무이다. 주전 서쪽(오른쪽) 앞에는 '萬世流芳'이란 편액이 걸린 3칸 짜리 건물이 있다. 두 건물 앞에는 각각 <영만정>이라는 시와 무이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 석비에 적혀 있다. 무이궁(무이고대명인관) 밖에 거대한 정원이 있다고 하는데 왜 못 보았을까?

 

무이궁에 대한 자료나 안내를 못 받아 눈이 아리도록 자료를 찾아본 결과 '무이궁'에 대한 내 정의는 아래와 같다.

1. 무이궁은 도교의 궁관이지만 지금은 도교와 관련된 어떤 것도 무이궁에서 보기 어렵다.

2. 하지만 건물의 구조나 배치 등은 도교 궁관의 성격이 남아있어서 볼만 하다.

3. 현재는 무이산에 거주했던 고대의 월족, 혹은 민족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한다.

4. 기타 마당에 있는 석비와 송계로 불리는 금목서, 주전 앞 양쪽에 있는 전각 등을 눈여겨 볼만 하다.

 

 

<무이고대명인관(무이궁) 입구>

'송가'라고 적혀있다. 이쪽 패방으로 입장했고, 전시된 내용이 고대인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관람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두번째 사진의 석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무이고대명인관(무이궁), 만년궁>

편액이 '만년궁'이 아니라 '무이정영(武夷精英)'이다. 이러니 자꾸 헛갈릴 수 밖에... 정면에 보이는 솥은 '민월부형정'이다. 솥이라기보다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무이고대명인관(무이궁) 마당의 송계>

계수나무가 아니라 주희가 심었다는수령 900년의 금목서이다.

 

 

<무이고대명인관(무이궁) 주전 앞의 전각들>

지붕 위의 무성한 잡초와 편액, 시비들이 인상적이다.

 

 

 

<무이고대명인관(무이궁), 만년궁과 내부>

도교와 관련된 내용을 기대하고 들어갔더니 고대에 이 지역에서 살았던 월족(민족)에 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원 안의 인물상을 어떤 이들은 신농씨라고 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월족이 무이산에 들어와 살았고,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양쪽 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라도 정면에서 촬영을 했더라면 이곳에 대한 궁금증을 훨씬 쉽게 풀 수 있었을 텐데... 흔들리고 비스듬한 위치에서 찍어 해석이 불가능했다. 

두번째 사진의 원시인 뒤로 구곡계와 대왕암 그림이 보인다.

 

 

 

 

 

<만년궁에서 본 맞은편 건물>

무이궁에 만년궁과 삼청전이 남아있다고 했으니 솥 뒤의 건물은 삼청궁이 아닐까? 하지만 법당일 가능성이 크다.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무이궁 주전 아래 층에 옥청원시천존(옥황상제?), 상청령보천존, 태청도덕천존의 삼청존에게 제사를 지내는 누각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윗층에는 옥황각과 빈운정이 있었다고 한다. 직접 보았는데도 무이궁의 구조에 대해 아직도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된다. 지붕의 무성한 잡초는 확실하게 기억에 남았다^^.

 

 

<무이궁 정문>

안쪽에서 본 모습이다. 앞쪽에서 보면 '점입가경'이라고 써 있다고 한다.

 

 

<무이산 대홍포경구 매표소와 안내도>

무이산 대홍포경구는 따로 입장료를 받는데 무이산을 입장할 때 6개 코스가 묶인 표를 샀는지 따로 매표했는지 모르겠다. 안내도는 '대홍포는 무이암차이고 <茶중의 왕>으로 불리며 어떠 어떠한 이름의 암차가 있다.' 대충 그런 내용 같다.

 

 

 

 <짝퉁 대홍포들>

대홍포는 6그루라 1년 생산량이 500g 정도 밖에 안 되는 고가품이기 때문에 '소홍포'라 불리는 그 후손들을 이런 식으로 많이 키운다고 한다.

 

 

 

<대홍포가 있는 바위 뒤의 바위>

걸어들어가는 도중에 수렴동 이정표가 있었다. 아마 이 바위 쯤이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폭포가 있는 수렴동이 아닐까 짐작했다. 수렴동도 무이산 안의 독자적인 관광 코스이다. 대홍포는 이 바위 앞에 있는 좀 작은 바위에 있다.

 

 

<대홍포를 바라보는 관광객들과 대홍포>

대홍포는 명나라 때 농부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려 달아났다가 돌아와 보니 차잎이 붉게 발효(우롱차)되었는데 맛이 좋아 알려졌다고 한다. 무이산 암반에서 자라는 우이암차가 특산품이며 특히 대홍포를 최고로 친다. 무이산 정산소종은 홍차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대홍포>

붉은 '大紅袍' 각자 오른쪽 단 위로 대홍포가 보인다. 모두 6그루라고 한다.

 

 

 

 

<대홍포 출구>

대홍포를 보러 가는 10여분 거리의 산길 양쪽으로 거대한 바위들이 서 있다. 대홍포 입구와 출구는 같다. 대홍포 쪽은 석양이라 난반사가 심해서 출구 방향을 촬영했다. 어찌나 볕이 뜨겁고 강한지 정면에서 비치는 태양 때문에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긴(!)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의 주파이(뗏목) 건조장>

무이산과 우리의 숙소 보도회전센터호텔은 이 개천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 있다. 대나무 뗏목을 만든 후 두 개를 묶거나 관광객이 앉을 의자를 고정하기도 하고 완성된 주파이를 차에 싣는 중이다.

 

 

<이번 복건성 여행에서 가장 맛 있었던 저녁>

무이산 입구, 우리의 숙소 근처에 있던 '비단 羅' 자가 들어가는 이름의 식당이다. 나머지 한 글자는 간자체라...

차와 더불어 무이산의 또 다른 특산품인 목이와 느타리볶음 요리가 졸깃한 게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 맛에 반해서 목이버섯을 한 봉지 사와서 아주 잘 먹고 있는 중이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는 목이버섯을 석이(石耳)라고 불렀다.

 

 

<다시 하문의 seashine 호텔로>

이 호텔은 우리가 첫날 묵었던 곳이다. 저녁 식사 후 무이산공항으로 가서 긴 기다림 끝에 하문으로 갔다. 다행히 비행기가 연착하지 않았지만 대기 시간이 길었다. 이로써 사흘째 일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하문의 고랑위(구랑위)를 관람하는 일정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