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조선의 왕가(궁가)3

큰누리 2014. 5. 6. 21:38

조선의 왕가(궁가) 1차 답사지는 창의궁 터, 창성궁 터, 선희궁 터, 칠궁, 자수궁 터, 도정궁 터, 내자동 어의궁 터 및 월성위궁 터, 수진궁 터, 용동궁 터, 사동궁 터, 죽동궁 터, 순화궁 터, 안(국)동별궁 터, 경우궁 및 계동궁 터, 운현궁, 대빈궁 터, 누동궁 터였다.

 

현재 조계사 뒷편에 있는 안내표석이 한 구역에 다닥다닥 모여있는 용동궁 터를 보고 사동궁 터를 보기 위해 조계사를 지나는 중이다. 마침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조계사는 연등을 만들어 매다느라 몹시 분주했다. 4월 16일에 발생한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사고'의 여파로 시내나 절집 모두 분위기가 침울했다.

 

 

<조계사에서 제작 중이거나 매단 연등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어린 석가모니상, 연꽃, 용, 코끼리 모양의 등이 화려하다. 4월 16일에 발생한 진도 앞바다 세월호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비는 플래카드도 보인다.

 

 

 

 

 

 

 

<종로구 관훈동의 사동궁 터와 인사동의 죽동궁 터>

백악미술관과 맞은편의 SK빌딩 부근(사진 속의 주차장)에 의친왕이 살았던 사동궁이 있었다. 조계사 앞에서 인사동 수도약국 앞까지 만 여평에 이르는 큰 궁가였다고 한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서 2남)인 의친왕은 일제 강점 후 상하이로 탈출하려다 만주 안동현에서 발각되어 강제 송환된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왕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흔치않은 분이다. 사동궁은 1955년 이승만 정권 때 요정 '도원'이 되었다가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의 성매매 단속 이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죽동궁 터는 아래 사진 오른쪽 끝 뒷부분에 있었다. 순조의 딸 명온공주가 동녕위 김현근에게 출가하여 산 곳으로 부마 김현근이 정신병이 있어서 치료를 위해 대칼(竹刀)춤을 추면서 나오는 대칼이 부딪치는 소리 때문에 죽도궁으로 불리다 죽동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 때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의 소유였으며 민승호가 이곳에서 폭사를 당했다. 현재 관훈동 빌딩가로 변하였다.

 

 

<사동궁 사진>

 

 

<인사동 회화나무>

사동궁 터 주변 빌딩 숲 틈(과거 율곡 선생의 집 터)에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가 있다. 나무 높이 20m, 둘레 3m인 거목이 시내 한복판, 그것도 빌딩 사이에서 당당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정도의 나무가 표식 하나 없이 주변 회사원들의 단순한 쉼터로 이용된다는 것에 대해 모두 안타까워 했다. 

 

 

 

<인사동 순화궁 터-태화빌딩, 하나로빌딩>

처음 왕가와의 인연은 세종대왕 아들인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의 집터였다. 이후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가 이곳에서 출생했다.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살았으나 헌종 사후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고 후에 사당(순화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완용이 살았고, 요정 태화관이 되었다가 현재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들어서 있다. 33인이 1919년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이 바로 이곳이다.

 

 

<인사동 골목>

순화궁 터에서 인사동 골목을 지나 안(국)동별궁 터(풍문여고)로 가는 중이다.

 

 

<안(국)동별궁 터 - 풍문여고>

처음에는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이었으며 세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영응대군이 아들 없이 죽자 부인은 성종에게 집을 바쳤고, 성종은 부친인 의경세자의 사당(의경묘)을 만들고 형인 월산대군이 봉사하도록 했다. 

중종 때 혜순옹주, 인조 때 영창대군의 누나인 정명공주, 숙종 때 연령군의 궁가가 되었다. 고종 때 왕세자 순종의 가례소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민영휘와 최창학에게 팔렸으며 현재 풍문여고와 안국빌딩이 들어서 있다. 1944년 민영휘의 증손인 민덕기가 증조모 안유풍(민영휘의 부인)의 유지에 따라 폐교된 정신여학교를 인수하여  이곳에 풍문여학교를 설립했다.

 

안국동 별궁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민간에게 매각되면서 건물들이 팔려나갔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골프장과 강북구 우이동, 풍문여고 안의 목조건물이 안(국)동별궁 건물의 일부로 밝혀졌다. 고양의 한양컨트리클럽이 2007년 문화재청에 목조건물을 기증하여 2009년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 복원했다. 

 

 

<경우궁 터와 계동궁 터(현대빌딩)>

조선 초기에는 이 부근에 숭문원과 극빈자를 치료하고 미아를 보호하던 제생원이 있었다. 제생원은 후에 혜민서에 병합되었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유빈 박씨(가순궁)의 사당이다. 순조 23년 유빈 박씨 사후 국왕 친위대인 옛 용호영 터에 사당을 짓고 다음해 신주를 봉안했으며 경우궁이라 하였다. 갑신정변 때 고종 내외가 이곳에 피신하였다가 개화파들이 이곳에서 많이 죽은 후 자수궁으로 경우궁을 옮겼다. 순종 1년(1908)에 제사친묘 합사 조치에 따라 경우궁은 다시 육상궁으로 이안되었다.

 

계동궁흥선대원군의 장조카(고종의 종형)인 완림군 이재원의 집 터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황제 부부가 경우궁에서 하룻만에 계동궁으로 옮겼다가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이재원 사후 민영휘 차지가 되었으며, 민영휘는 이곳에 휘문의숙을 세워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78년 휘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현대빌딩이 들어섰다.

현대빌딩을 기준으로 볼 때 빌딩 왼편 뒤쪽에 경우궁이 있었고 관천대가 남아있는 오른쪽과 그 뒷편으로 계동궁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빌딩의 서운관 관상감 관천대>

서운관의 관천대는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설치했던 받침대로, 현재 간의는 사라지고 대만 남아있다. 세종 16년(1434) 경복궁에 대간의 2개를 세우고 소간의 2개를 만들었는데 이곳의 서운관에 소간의 중의 1개를 설치한 것으로 추측한다.

 

 

<현대빌딩 뒤편의 휘문고등학교 터>

1978년 휘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있었던 곳이다.

 

 

<고종의 잠저 운현궁과 안내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한 후 흥선대원군의 2자 명복이 26대 왕위에 오름으로써 고종의 잠저가 되었다. 서운관이 있었던 고개(구름재)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 운현궁이라 불렸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어린 아들을 대신해 10년간 집정을 했다. 고종1년(1864)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고종 6년(1869)에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문 경근문과 흥선대원군 전용문 공근문을 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운현궁 전경>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거처이면서 국가주요정책을 논의한 곳이다.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이 이곳에만 남아있다. '노안당'은 아들이 임금이 된 덕에 좋은 집에서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운현궁-노락당에서 본 노안당>

 

 

<운현궁 노락당>

운현궁의 안채로 정면 10칸, 측면 3칸의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가족들의 잔치 등 중요한 행사가 열린 곳이며 명성황후가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은 곳이다.

 

 

 

 

<운현궁 이로당>

정면 7칸, 측면 7칸의 'ㅁ'자형 건물로 중앙에 마당이 있다.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여성들의 전용 생활공간으로 금남구역이다.

 

 

 

 

 

<운현궁의 뒤편>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과 채색을 하지 않은 담백한 한옥의 멋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운형궁 앞의 교동초등학교>

 

 

<종로구 익선동(낙원동) 대빈궁 터>

종로구 낙원동 종로세무서, 원불교당 부근에 있었던 숙종의 후궁(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의 사당 터이다. 희빈 장씨의 사당은 원래 정동의 사저에 있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촌하고 현재의 익선동 58번지 부근에 사당을 지었다.

고종 7년(1870)에 육상궁의 별묘로 이봉-고종 24년(1887)에 원래의 자리로 환원-순종1년(1908)에 육상궁 경내로 옮겼다.

 

 

 

<종로구 익선동 누동궁 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사저이면서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어쨌거나 번듯한 '궁'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을 하여 철종 일가는 이후에 강화도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추측한다. 철종은 즉위 후 형 영평군을 이 집에서 살게 하고 안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거행되었으며 전계대원군의 봉사손이 대대로 이 궁에 거주했다.

 

2004년 서울시의 '익선동개발계획'으로 현재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조선의 왕가(궁가) 답사' 길라잡이인 이순자 선생님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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