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조선의 왕가(궁가)5

큰누리 2014. 5. 8. 23:01

<2014.04.27. 2차 왕가(궁가) 답사>

 

 <답사 코스>

경모궁 터(서울대학교 병원) - 인평대군방(이화장 일대) - 하어의궁(종로구 효제동 한빛프라자 부근) - 이현궁(인의동 종로 플레이스, 효성주얼리시티) - 상어의궁(피카디리극장 부근) - 영희전(중부경찰서, 영락교회) - 구)명례궁 터(계성여고, 명동 진고개 표석 뒤쪽) - 저경궁 터(남대문로 한국은행 뒤) - 소공주궁 터(원구단) - 명례궁 터(덕수궁 일부) - 덕안궁 터(조선일보, 서울시의회) - 답사 종료

 

 

<답사 안내자>

카페 <나홀로 테마여행> 주최,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저자 이순자선생님.

 

조선시대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은 실체 확인이 되지만 대부분 터만 남아있는 왕가(궁가)가 항상 궁금했다. 이번의 답사를 통해서 왕가의 위치나 주인, 이력 등을 살펴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꽃'이 되듯 역사책이나 드라마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왕가(궁가)도 직접 위치를 확인하고 내력을 들어보아야 그 의미가 살아난다. 

 

왕가(궁가)는 아직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곳들이 많다고 한다. 500년 27대의 왕을 거친 조선에 얼마나 많은 왕손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흩어져 산 궁가들 또한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한양지도와 대조해보면 한양 도성 안 상당 부분이 궁가로 채워진다. 도대체 백성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시대에 따라 건물은 바뀌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수많은 궁 터중 몇개 정도는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궁 주소와 면적>

 

 

<구)명례궁 터 - 계성여고, 명동성당 뒤쪽>

영희전은 현재의 명동성당 아래쪽인 영락교회, 중부경찰서 부근으로 수양대군(세조)이 혼례를 치른 후 나와 산 잠저이다. 구)명례궁은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계유정난 공신으로서 적몰한 집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위치는 자신의 집(영희전 터)과 이웃해 있었고 현재로 따지면 계성여고 부근(명동성당 옆)이다. 아래 사진 중앙에 보이는 붉은 건물이 계성여고이다.

 

 

 

<진고개 표석과 현재의 명동>

명동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이 표석이 있다. 당시에 비가 오면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진흙탕이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된다.

 

 

 

 

<구)명례궁 터인 계성여고>

 

 

<구)명례궁 터를 조망하기 위해 올라간 건물의 옥상>

6층쯤 되는 건물이었던 것 같다. 명동의 건물에 치어 잘 보이지 않는 구)명례궁 터를 조망하기 위해 올랐는데 구)명례궁 터는 뒷전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명동이 너무 재미있었다. 

붉은 벽돌색 건물이 구)명례궁 터였던 계성여고 건물이다. 계성여고 앞으로 명동성당 종탑이 보인다.

 

 

 

<명례궁>

현재의 덕수궁 터에는 원래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었다. 태종이 현재의 정릉으로 능을 옮긴 후 왕실 가족들이 거처했는데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와 그의 아들인 월산군과 잘산군이 살았다. 명례궁은 월산대군 집이면서 성종(잘산군)의 잠저인 셈이다.

임진왜란이 후 피난했다 돌아온 선조는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려서 월산대군 궁가에 머물면서 주변의 집을 묶어 사용했기 때문에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경운궁' 으로 불렸으며 이곳에 인목대비가 유폐되기도 했다.

인조 즉위 후 경운궁의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기고 나머지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때 명례궁이 경운궁 안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에 명례궁과 경운궁이 혼용되었다.   

 

현종 때 인조의 서자인 숭선군이 집을 지으면서 명례궁 터를 일부 하사받아 집을 넓혀 지었다. 이후 명례궁은 대비전의 개인 재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영조 때 세손(정조)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하사 받았다가 정조 때 혜경궁 홍씨의 속궁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경운궁에 살면서 '덕수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저경궁>

선조의 서자인 정원군의 집으로 인조의 잠저이다. 정원군은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당시에 저경궁 부근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궁으로 불렸다. '저경궁'으로 불린 것은 영조 때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신위를 봉안하면서부터인데 인빈 김씨의 신위는 1908년 향사이정 때 육상궁으로 이봉되었다.

1927년 이곳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와 부속병원을 착공하고 1년 뒤에 완공되면서 저경궁은 사라졌다. 경성치의전은 8.15광복 후 경성치의학대학원으로 바뀌었다가 1969년 연건동의 새 교사로 이전하고 현재 한국은행 별관이 들어서 있다.

 

<저경궁 터>

한국은행(화폐박물관) 건물이다. 한국은행 오른쪽 끝부분(사진 속의 신호등 부근)에 저경궁 터 표석과 하마비가 있다. 윗 지도를 보면 저경궁 터였던 한국은행 위로 소공주궁 터였던 웨스틴 조선호텔(환구단)이 있다.

 

 

 

<저경궁 표석과 하마비>

저경궁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인빈 김씨(인조의 조모)는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되었지만 제사를 받들 봉사손이 역모로 사사되어 신위가 이리저리 떠돌았다. 인빈 김씨 사당은 영조 때에 겨우 저경궁으로 승격되면서 하마비가 세워졌기 때문에 하마비 후면에는 영조 치세기인 을해년(1755)이라고 새겨져 있다. 인빈 김씨는 1908년 칠궁으로 이봉되었으므로 이곳의 하마비도 함께 옮겨졌어야 마땅하다.

 

 

 

<소공주궁 터 - 웨스틴 조선호텔, 환구단>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조대림과 혼인 후 출궁하여 산 곳이다. 둘째 공주가 사는 곳이라 하여 소공주궁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소공동'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소공주궁은 선조 때 의안군이 살면서 남별궁으로 불렸고,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들의 진지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관소 되었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후 황궁이었던 덕수궁 앞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황궁우와 환구단을 설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환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을 지었다가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현재는 황궁우와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석고만 남아있다.

 

 

<소공주궁 터의 황궁우>

 

 

 <조선호텔 방향의 삼문과 삼문을 통해 본 황궁우>

계단과 황궁우를 둘러싼 석물들이 정교하고 생동감 있다.

 

 

 

 

<황궁우와 환구단 사진 자료, 환구단 정문>

아래쪽 페이지의 환구단 정문은 1960년대 말 철거된 후 소재불명이었다가 2007년 강북구 우이동의 그린파크 호텔 정문으로 사용될 당시의 사진이다. 여러 논의를 거쳐 시민들과의 접근성을 고려해 현 위치에 옮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며 가운데 칸은 넓고 양 측칸은 좁다. 기둥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세월호 탑승객의 생환을 기원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덕수궁 앞의 노란 리본들>

 

 

 

<덕안궁 터를 찾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Seoul Anglican Cathedral, Sts Mary and Nicholas)은 1890년 우리나라에 온 초대주교 고요한(Charles John Corfe)이 세운 한옥 성당이 있던 자리에 3대 주교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가 1922년 9월에 착공하여 1926년 5월에 완공했다. 일제 치하에서 서양인에 의해 설계된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건물이다. 1978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완공 후 70년 만인 1996년 5월 원 설계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되었으며 비잔틴식 모자이크 제단화, 조마가 주교 동판묘비, 동방교회 이콘성화 등이 있다.

화요일에서 토요일.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되며 안내 및 해설자가 있고, 성당 소개 팜플랫(한글, 영어, 일어)이 비치되어 있다.

 

 

 

 

<덕안궁 터 - 서울시의회, 조선일보사옥>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당이다. 덕안궁은 경운궁의 일부였던 명례궁 터에 지은 엄황귀비를 위한 '경선궁'이었으나 사후에 사당을 짓고 '덕안궁'이라 불렀다. 1929년 엄황귀비의 신위가 육상궁에 마지막으로 옮겨진 후 '육상궁'은 '칠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4년 덕안궁 터에 경성부민관이 세워지고 광복 후에는 시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민관은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다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1935년 현 서울시의회 청사 뒤에 세워진 조선일보 사옥에 덕안궁 일부가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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