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조선의 왕가(궁가)4

큰누리 2014. 5. 8. 00:01

<2014. 04.27. 2차 왕가답사> 

<답사 코스>

경모궁 터(연건동 서울대학교 병원) - 인평대군방(이화장) - 하어의궁 터(종로구 효제동) - 이현궁(인의동 종로 플레이스, 효성주얼리시티) - 상어의궁(피카디리극장 부근) - 영희전(중부경찰서, 영락교회) - 구)명례궁 터(계성여고, 진고개 표석 뒤) - 저경궁 터(남대문로 한국은행 뒤) -  소공주궁(원구단) 터 - 명례궁 터(덕수궁 안) - 덕안궁 터(조선일보, 서울시의회).

 

<답사 안내>

카페<나홀로 테마여행> 주최로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저자 이순자선생님.

2차 답사 코스 출발지는 서울대학교 병원 안의 경모궁 터였다. 혜화역에서 내려 서울대 의과대 정문으로 들어서니 빗속에 서 있는 히포크라테스 동상과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대 의대의 히포크라테스 동상과 히포크라테스 선서>

 

 

 

<서울대학교 연건 캠퍼스 안내도와 경모궁 터>

12번이 경모궁 터 내신문이며, 이모티콘이 있는 12번과 13번 사이에 경모궁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서울대학교 병원) 안의 경모궁 터>

경모궁은 함춘원 터에 세운 사도세자의 사당이다. 함춘원은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등에 딸린 궁궐 밖의 정원을 말하며, 둥글게 담을 두르고 나무를 심은 후 활쏘기나 말을 방목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현재 창경궁에 딸린 함춘원만 그 터가 남아있다.

사도세자의 사당은 원래 순화방(경복궁 서쪽)에 있었으나 1764년(영조 40)에 함춘원으로 옮기고 수은묘라 하였다. 1776년 정조는 즉위 직후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격상하고 격식을 갖춰 확장했다.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어 종묘로 신위가 옮겨지자 경모궁은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 경모궁이 있던 함춘원 일대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은 6.25 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정당 터와  3개의 경모궁 신문 중 내신문만 남아있다. 

 

 

<1930년대의 경모궁>

건물은 그런대로 남아있으나 사도세자의 신위가 종묘로 옮겨지고 영희전으로 잠시 용도 변경 된 후의 모습이다.

 

 

<경모궁 터의 안내도>

 

 

<서울대학교 병원(서울대 의대) 안에 남아있는 경모궁 터와 내신문>

돌 기단과 내신문 1개만 남아있다. 경모궁 내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에 풍판이 없는 맞배지붕 형태이다.

 

 

 

<서울대 의대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구)공업견습소 본관>

1908년 지은 근대 공업교육기관으로 몇개 남지 않은 구한말 건물 중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현재 한국방송대학교 우체국, 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보수하느라 어수선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을 마쳤다.

 

 

<대학로의 마로니에(칠엽수)꽃>

 

 

<대학로의  x 조형물>

세상에서 가장 예쁜 x이 아닐까 싶다.

 

  

 <인평대군방 - 이화장>

조선시대 신광한의 집 터로 '신대'라 불렸으며 효종의 아우이자 인조의 3자인 인평대군의 집이 되었다. 석양루 터 안내문은 인평대군방 본채였던 이화장과 좀 떨어져 있는데 당시에는 이 석양루 안내문까지 포함할 정도로 한양에서 내노라 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귀국 후 거처가 없는 이승만 박사를 위해 주변의 인물들이 이 집을 기증했다. 이승만은 1947년 돈암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작은 별채에서 초대 내각을 구성했다. '이화장'이란 이름은 뒤의 낙산에 배나무가 많았고 그 곳에 있던 정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는 이승만기념관이 되었다. 몇년 전의 장마로 뒤의 축대가 무너진 후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효제동(대학로) 하어의궁 터>

어의궁은 기록상 3곳이 있는데 하어의궁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가례를 올린 4년 뒤에 나와 살았던 인조, 효종의 잠저이다. 현재 종로구 효제동 한빛프라자 부근이다.

 

봉림대군은 이곳에서 공주들을 낳고 살다가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끌려가 8년을 볼모로 지냈고, 귀국 후 이곳에서 살다가 왕세자 책봉을 받고 입궁했다. 하어의궁은 인조, 효종 2대의 왕을 배출한 곳이어서 용흥궁으로도 불렸다. 이곳에서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가례식이 거행된 이래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헌종 등 역대 왕실의 가례가 거행되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현재에도 하어의궁 구역 안에 웨딩타워가 있다. 

지금은 대학로 대로가 들어서 있지만 당시에는 대로 양쪽에 걸쳐 하어의궁이 있었고, 서쪽에 있는 인평대군의 석양루와 비교하여 조양루로도 불렸다.

 

 

 

 

<종로구 연지동의 명나라 사람들 집단거주지 터>

인조, 효종의 잠저인 하어의궁 북쪽 언덕에 있다. 현재의 보령제약 빌딩 부근이다. 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굴씨녀처럼 청나라 볼모였던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 귀국할 때 따라왔거나 조선에 거주하던 명나라 사람들이 돌아갈 곳이 없어지자 봉림대군(효종)이 마련해 준 거주지일 것이다.

 

 

<교직원공제회, 서울특별시 재향군인회>

과거의 동원예식장 터이다. 동원예식장은 정원에 비합법적으로 입수한 고달사 쌍사자 석등을 장식으로 놓았다가 물의가 일자 국가에 헌납(!)했다. 건물 오른쪽 뒤로 종묘 담장이 일부 보인다. 길 건너 이쪽이 광해군 잠저인 인의동 이현궁 터(효성주얼리, 종로 플레이스)이다.

 

 

<이현궁>

광해군이 결혼 후 궁궐에서 나와 산 잠저이며 종로구 인의동에 있다. 선조가 승하할 당시 광해군은 34세, 영창대군은 3세로 서자라는 약점 때문에 광해군은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후 적자인 영창대군, 형인 임해군 등을 제거한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잠저인 이현궁에 모셨다.

 

인조 반정 후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원종으로 추존하고, 생모인 연주부부인 구씨(인헌왕후로 추존)가 이현궁으로 들어가 살면서 계운궁으로 개명한다. 이현궁은 숙종 때 연잉군을 낳은 숙빈 최씨에게 하사되어 숙빈방이 되었다가 연잉군이 창의궁으로 옯겼고, 영조 때에는 화평옹주와 금성위가 살기도 했다.

정조 때에는 비어있는 이현궁에 왕의 친위대인 장용위영을 설치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주둔지동아연초주식회사 공장과 사택→ 1987년부터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가 사용하였다.

 

현재는 궁의 원형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장용영(정조 친위부대 주둔지) 서울 본영을 그린 '본영도영'과 그림 속의 은행나무를 보고 위치를 추정하고 있다. '본영도영' 중앙 쯤에 그려진 나무 현재 인의동 48-55번지에 남아있는 보호수(은행나무)로 추정하고 있다.

 

 

<이현궁 터의 일부인 종로 플레이스>

이현궁은 종묘 동쪽에 위치했으며 종로 플레이스와 옆으로 이어진 효성주얼리, 서울혜화경찰서, 서울특별시 선거관리위원회를 아우르는 넓은 구역이었다.

 

 

<'본영도영'과 이전의 이현궁길 이정표>

 

 

<'본영도영' 중앙 쯤에 그려진 나무로 추정되는 보호수 은행나무>

이 나무와 윗 사진 왼쪽 윗부분의 나무는 동일한 나무로 추정되며 그렇게 볼 때 이현궁의 위치나 규모도 추정이 가능하다. 

 

 

 

<상어의궁 터로 추정되는 피카디리극장 부근>

상어의궁은 인조, 효종의 잠저이며 효종이 태어난 곳이다. 종묘의 서쪽에 있다.

 

 

<영희전 터로 가기 위해 청계천 수표교를 건너는 중...>

이곳이 원래 돌다리 수표교가 있던 곳이며 원래의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 안에 옮겨져 있다.

 

 

<수표교에서 본 청계천 상류쪽>

 

 

<을지로 3가역의 조형물>

 

 

<중부경찰서, 영락교회 맞은편 쪽의 고당기념관>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관이다. 초등학교 반공교과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관련해서 몇번 듣고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영희전>

수양대군이 혼인 후 나와 산 세조의 잠저이다. 세조는 즉위 후 잠저를 혼인한 의숙공주와 정현조에게 하사했지만 후사가 없이 비어있었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 이곳에 모시고 '봉자전'으로 격상시킨 후 태조, 세조 어진 모시면서 '남별전'으로 고쳐불렀다. 인조는 생부 원종의 영정 추가로 봉안하고 '숭은전'으로 개칭했으며 숙종은 경기전의 태조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다시 '영희전'으로 개칭했다. 영조 때에 숙종 어진, 정조 때 영조 어진, 철종 때 순조의 어진 봉안하는 등 많은 어진을 모셔서 1년에 5차례 제사를 지내고 종묘와 사직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1900년(고종 37)에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어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경모궁이 비자 영희전에 있던 여섯 왕의 어진을 이봉했다. 그리고 빈 영희전에는 창의궁에 있던 의소(사도세자 장자)묘와 문효세자의 사당(문희묘)을 이건했으나 8년 후인 1908년의 향사이정 정책에 의해 의소세손과 문효세자의 신위를 땅에 묻고 영희전은 사라지고 국가에 귀속되었다.

1924년 경성본정경찰서가 영희전 터에 들어섰다가 해방 후 '중부경찰서'가 되었으며 그 옆에 1945년 12월에 한경직목사가 설립한 베다니교회는 영락교회로 바뀌었다.

 

 

<영희전 터 - 영락교회>

 

 

 

<영희전 터 표석과 영희전 터인 중부경찰서>

영희전 영역인 영락교회와 중부경찰서는 붙어있다. 두 건물 사이의 골목 끝으로 구)명례궁 터인 명동성당 ~계성여고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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