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소재지는 파주시 광탄면 장지산 용암사이다. 2014년 7월 6일, 나홀로 테마 여행의 <의주대로 따라 가기 특별답사>에서 들렀다. 고양시 벽제관 터에서 광탄으로 향하다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보물 제93호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가람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고려 제13대 선종(宣宗 1083~1094) 때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조성한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만들어진 11세기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다. 조선시대는 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전란에 의해 절이 소실되었고, 근대에 들어 1930년대 절이 재창건되었으며,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하였다. 당시 장단군에 있던 장선환 대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수호하였는데 한 때 혜음사, 대숭사로 불리던 명칭을 현재의 용암사로 바꾸었다. 하략. --용암사 안내문--
용암사, 혹은 용미리 마애이불은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이 방문했으며 특히 이승만대통령과 얽힌 사연이 있다. 이승만대통령은 삼성각 옆에 있는 칠층석탑과 동자상을, 박정희대통령은 종을 기증(!)했다.
<용미리 마애2불입상>
1963년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시대 : 고려, 소재지 : 파주시 공탄면 혜음로 742-28.
거대한 천연 암벽에 새긴 2구의 불상으로, 머리 위에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고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어느 날 궁주가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며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고, 왕이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신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장지산 용암사 일주문>
3, 4년전 쯤에 들렀을 때에는 없었는데 근래에 신축되었다.
<용암사 대웅보전과 종각>
종은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간 후 봉덕사종을 본떠 제작하여 안치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의 미륵전, 삼성각과 옆의 동자상, 7층석탑>
일주문이나 절 앞에서 보면 나무에 가려 마애이불이나 다른 전각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이 전각만 보인다. 전각 앞에 있는 아래아래 사진의 칠층석탑과 동자상은 사연이 있다. 이승만대통령 어머니가 용미리 마애이불에게 발원기도를 하여 이승만대통령을 나았다는 속설이 있는데 1954년 이승만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동자상은 좌측 마애불의 오른쪽 어깨 앞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웠다.
이승만대통령이 4.19혁명으로 물러난 뒤 재야단체의 문화재 훼손이란 비난 때문에 1987년에 철거되어 종무소 우측으로 옮겨졌다. 2009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용미리 마애2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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