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복건성, 산동성

산동성 여행5 - 곡부의 공묘, 공부

큰누리 2014. 8. 18. 23:23

<3일차 첫번째 코스 곡부의 공묘와 공부>

3일의 답사 코스는 유방으로부터 곡부까지 4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곡부에 도착한 직후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먼저 곡부의 공묘, 공부에 들렀다가 조금 떨어진 공림으로 가서 전동 카를 타고 한바퀴 도는데 총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찜통 같은 날씨에 공자 사당인 공묘 앞은 길바닥이 전돌로 되어 복사열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공묘의 향나무 그늘이 그나마 더위를 좀 가시게 했지만 여름에 다시 그곳에 가라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이어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맹자 관련 유적이 있는 추성으로 갔다. 추성의 맹자 관련 유적(맹묘, 맹부, 맹림)은 공자 관련 유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맹자묘(아성묘)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맹부를 20여분에 걸쳐 보았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맹자와 후손들의 가족 공동묘인 맹림은 관람을 포기했다.

2시간 걸려 도착한 숙소는 다음 날의 태산 등정을 고려해 태산 근처에 있는 태안시의 태산국제호텔이었다.

 

 

♣ 곡부시 : 산동성 서남쪽에 있는 제녕(지닝)시에 있는 현급 시이다. 

제녕시에는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 취푸), 맹자의 고향 추성(鄒城, 주청) 등 오래된 고도가 많다.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다. 곡부라는 명칭은 수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873년간 노나라의 도성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魯(노)나라에서 공자가 출생했고, 공자 사후 1년 뒤부터 공자에 대한 제전을 실시한 이래 한나라 고조(유방)가 공자의 제향을 거행하고 그 자손들은 역대 조정으로부터 연성공이라는 봉상을 받은 이래 중국 제일의 명문가가 되었다. 직계장손은 문화혁명으로 핍박을 받자 대만으로 이주해 현재까지 살고 있으며 유적들은 1994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공 : 곡부시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을 말한다.

 공묘(孔廟)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공자 사후 1년 뒤에 노나라의 애공이 건립했다.

 공부(孔府) 성부(聖府)라고도 하며 공묘 오른쪽에 붙어있다. 공자의 직계 장자와 장손이 살던 사유지이며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되었고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귀족저택이다.

 공림(孔林) 원래 이름은 至聖林(지성림)으로 공자와 그 가족, 후손들의 무덤이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길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종족 무덤 및 인조임원이다.

 

 공자의 생애 :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에서 조금 떨어진 창평향 추읍에서 시골의 무사였던 70대의 아버지 숙량흘과 10대의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혼외 아들(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정실부인에게는 아홉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이 있었다. 3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무일푼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궐리로 갔으나 가난에 시달렸으며 장님이 된 어머니는 공자가 17세에 타계했다. 이후 말단관리가 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19세 때 송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하였고, 20세에 아들 鯉(리)가 태어났다.

점차 학문적인 명망이 높아지면서 제자들이 모였고 소공(노나라 왕)과 가까이 지냈다. 노나라에 난이 일어나자 소공을 따라 제나라에 가서 뜻을 펴려 했으나 실패하고 2년 뒤 노나라로 돌아와 재판과 외교분야의 고위 관리로 8년 정도 정사에 관여했다.

이후 지도자가 실정을 하고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벼슬을 사직하고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당하며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어느 곳에서도 그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는 정치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말년은 아들 리(백어)와 애제자 안회가 앞서 죽는 등 불행했다. 며느리를 개가시키고 그가 직접 기른 손자 급(자사)은 애제자인 증자의 뒤를 이어 공자의 유가사상을 이었다.

 

공묘(공자 사당)의 원래 명칭은 지성묘이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이다. 역대 황제 12명이 직접 공자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배향했다. 기원전 478년에 공자가 살았던 집을 사당으로 만들었으며, 면적은 약 14만 평방미터, 남북 길이 1,300m, 폭은 650m이다.  
궁전형태의 건축으로 정원 9개에 금, 원, 명대에 지은 건축이 100여동이고 방은 460개이다. 세계에 있는 2,000여개의 공자사당 중 가장 크다. 한나라 이래 세운 석각 1,000여개가 보존되어 있고, 한, 위, 육조시대의 비석들이 있으며 그 중 한대의 화상비석과 명, 청대의 용문양 돌기둥이 특히 유명하다.

 

 

 <유방 부화호텔의 조식>

중국인들의 아침식사는 간단하다. 동남아나 중국에서 먹을 음식이 여의치 않으면 찐계란이나 계란후라이를 먹으면 무난하다. 이 지방에서 우리나라의 조림처럼 짙은 갈색이 도는 음식에는 향채(香菜)나 고수(픽치) 등의 향신료가 들어간 경우가 많다. 한국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향신료이다.

이 지방의 두부 역시 약간 취두부(썩두부) 향이 있어서 두부는 손도 안 댔지만 아래의 연두부는 우리 나라의 것과 맛이 비슷하다. 부추 요리나 피망 같은 고추(약간 매움)볶음은 가장 무난한 야채 요리이다.

 

 

<휴게소의 복숭아>

산동성의 특산물은 좀 웃기지만 무우라고 한다. 우리나라 무우보다 작지만 길고 단단하며 거의 전체가 짙은 초록색이다. 아래의 복숭아는 공동비용으로 사 먹었는데 개당 1,5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산동성에서 먹은 과일 중 최고였고 우리나라에 비해 가격이 반 정도 밖에 안 된다. 시기적으로 과일이 많지 않았는데 복숭아 만큼은 어디에서 어떤 복숭아를 먹어도 맛있었다.

 

 

<곡부에 도착한 직후 먹은 점심>

향신료 때문에 부추볶음, 양배추볶음, 시금치 비슷한 나물만 먹었고, 나물류는 대체로 먹을만 하다. 중앙의 국은 계란, 녹말가루, 맛살이 주재료인데 맛이 부드럽고 무난하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자의 제사 술로 쓰인다는 '공부가주'를 마셔보았다. 중간 도수이고 가장 맛이 좋다는 46도짜리였는데 뒤끝이 깔끔하다. 귀국할 때 500ml를 1병에 2만원을 주고 가이드에게 구입했다. 짝퉁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귀국 후 먼저 마셔본 일행은 우리가 산 것도 짝퉁이라고 했다.

 

 

 

<공묘 배치도>

중앙의 주건물 배치는 다음과 같다.

성적전(聖迹殿)

침전(寢殿)

대성전(大成殿)

↑ 

행단

대성문(大成門)

13비정 -       ↑       - 13비정

규문각(奎文閣)

동문문(同文門) - 제5문

대중문(大中門) - 제4문

홍도문(弘道문) - 제3문

벽수교(璧水橋) - 금천교

성시문(聖時門) - 제2문

지성묘(至聖墓) 패방

태화원기(太和元氣) 패방

영성문(靈星門) - 제1문

하마비 - 반수교(泮水橋) - 하마비

금성옥진(金聲玉振) 패방

입구

 

 

<공묘(공자 사당) 입구의 문과 패방>

공묘 본문격인 성시문 앞에 3개의 패방(금성옥진, 태화원기, 지성묘) 1개의 문(영성문) 있다. 패방에서부터 성시문 다음 문인 홍도문까지는 궁궐이나 왕릉 비슷한 삼도 형식이다. 성시문은 북경 자금성의 오문 구조이며 중앙 문에는 황제의 통로인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성시문과 홍도문 사이의 측백나무들>

패방에서부터 홍도문 좌우에는 특별한 전각 없이 측백나무들이 주로 늘어서 있다. 측백나무는 공묘 전 구역에 심어져 있고, 맹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규문각>

도서관 용도의 건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규문각 앞의 비와 13비정>

공묘 곳곳에 이런 비들이 많다. 특히 규문각과 대성문 사이에 역대 황제들이 공묘를 증축하거나 보수하면서 세운 비들은 비각까지 갖추고 13개가 따로 있다.

 

 

 

<대성문과 돌기둥 조각, 답도>

공묘의 핵심인 공자의 신위를 모신 대성전의 문이다. 황제의 가마가 지나는 답도가 있고, 정면 기둥의 조각들이 탁월하다. 이런 조각은 황제나 신과 관련된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역대 왕조로부터 황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공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비슷한 돌조각 기둥을 대만 용산사에서 본 적이 있다. 

 

 

 

 

<행단>

대성전 앞에 있으며 공묘에서는 비교적 작은(!) 전각인데 얼핏 강의장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하지 않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과 아름다운 돌기둥>

앞쪽의 돌기둥 조각들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성전 안에 공자의 신위(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 내부와 공자상>

초상화 앞에 '지성선사 공자 신위'라 쓰여있다. 공자는 키가 230cm가 넘고, 이마가 심하게 튀어나오고 못 생겨서 아버지조차 그를 꺼렸다고 전한다.

 

 

 

<공자의 부인 신위를 모신 침전>

공자의 첫번째 부인이며 공자의 유일한 아들 鯉(리)의 어머니인 견관씨의 사당일 것이다. 첫번째 부인과는 일찍 사별했으며, 두번째 부인은 제사상에 육포를 올리지 않아 공자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지성선사 부인 신위'라고 적혀있고 초상화는 따로 없다.

 

 

 

<공묘 사수후전(泗水候殿)>

글씨가 새겨진 벽돌이 전시되어 있는데 용도는 모르겠다. 

 

 

<공묘 앞 상가들>

중국의 전통가옥을 많이 볼 수 있다. 곡부시 전체가 대체로 이런 모습이어서 고대 도시의 느낌이 강한데 문제는 바닥의 전돌 때문에 너무 덥다. 곡부시에는 공자의 후손인 공씨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앞의 문을 지나면 공자 직계후손들의 사저인 공부(孔府)가 있다. 

 

 

<공부 입구의 사자상>

왼쪽은 새끼를 보호하는 암사자, 오른쪽은 보주를 든 숫사자이다.

 

 

<공부(孔府) 출입문인 성부(聖府)문>

공부는 성부라고도 한다.

 

 

<공부(孔府) 입구의 안내문들>

 

 

<공부 중광문(重光)문>

 

 

<공부 배치도>

중앙 앞쪽에는 대당, 2당, 3당 등 주로 학문과 관련되거나 손님을 맞는 곳으로 쓰였을 중간 크기의 전각들이 있다. 3당 뒤편에는 내택문이 있고, 그 뒤로 여자들의 공간인 내택이 있다. 내택은 전상방, 전당루, 후당루가 일렬로 늘어서있고 전당루는 공부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내당을 좌, 우, 뒤 삼면으로 둘러싼 작은 건물들은 창고나 공씨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추측한다.   

 

 

<공부 대당과 내부>

 

 

 

<공부의 작은 방 중의 하나인 계사청>

남성들의 영역 안에 있는 방이다. 문서를 다루거나 사무실 용도의 공간으로 추측...

 

 

<남성들이 석고대죄한 돌>

남성(남편)이 잘못하면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번이라도 무릎을 꿇어본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바람을 피거나 잘못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여성들의 전용공간인 내택 출입문>

내택의 기본적인 구조는 북경의 사합원처럼 폐쇄적인 'ㅁ'자 형이다. 내택 안으로 외간남자가 무단 출입하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내택 서쪽 담장의 석류(石流)>

담장 중간 높이에 있는 수조인데 어떤 용도인지 모르겠다. 담장을 중심으로 안과 밖, 둘로 나뉘어 있다.

 

 

<내택 가리개>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 내택 문 바로 안쪽에 있다. 여성들의 모습을 이중으로 가리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내택 안에서 본 문쪽>

왼쪽에 출입구와 문 가리개가 살짝 보이고, 오른쪽에 석류와 우물이 보인다.

 

 

<내택의 방 - 탕청(湯廳)>

서학, 화청 등의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곳의 방이다. '탕청'이란 현판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방안의 찻잔으로 미루어 차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서학, 화청쪽>

마당의 수석이나 구조로 보아 남자들이 쓰는 방으로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