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복건성, 산동성

산동성 여행7 - 추성의 맹자 유적(맹묘, 맹부)

큰누리 2014. 8. 21. 23:12

<맹자고리 추성(鄒城)>

추성(鄒城, 중국명-쩌우) : 맹자고리(맹자의 고향) 추성은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에서 버스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직할시다. 앞의 글에서 40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한 것은 사진상의 시간을 계산한 것인데 중간에 어떤 과정을 빠뜨린 것 같다. 도시 전체가 우중충하고 낡았지만 회색 기와 건물들이 즐비하고 성까지 갖춘 공자의 고향 곡부와 비교하면 시골 수준이다. 유적들도 공자의 유적에 비해 규모가 몇분의 일 정도로 상당히 작으며 국가급 중점문물 별 포인트도 공자는 5개, 맹자는 4개이다. 게다가 맹자의 유적에는 늘 '다음, 둘째' 쯤의 뜻인 '버금 아(亞)'가 앞에 붙어서 중국에서 공자와 맹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맹자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현재의 맹모림 부근)은 공동묘지였다. 홀몸으로 자식을 키운 맹자의 어머니는 어려서 곡을 하고 장례놀이 하는 아들 때문에 시장 근처로 이사했더니 이번에는 장사하는 흉내를 냈다. 결국 서당 근처로 이사를 하자 맹자는 비로소 공부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맹모삼천에 등장하는 공동묘지, 시장은 지금도 맹부, 맹묘 부근에 남아있고, 맹자소학(초등학교)도 있다.

 

맹자의 생애와 사상 : 맹자는 학문을 익힌 후 15년 동안 천하를 떠돌며 그의 사상을 펴고자 했지만 군주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 양성에 힘썼다.

♣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선한 4단(四端)이 있다고 주장했다. 4단은 惻隱之心(측은지심,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김), 羞惡之心(수오지심,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함), 辭讓之心(사양지심, 남을 공경하고 사양함), 是非之心(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함)이다.

♣ 교육의 역할은 위의 4단을 토대로 군자가 행해야 하는 인의예지의 4덕(四德) 도달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와 같은 마음으로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왕도(王道)정치이며, 군주가 왕도정치를 하지 못할 경우 백성은 군주를 쫓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위계질서가 강한 공자의 사상에 비해 잘못하는 왕은 쫓아낼 수 있다 논리 때문에 맹자의 사상은 동양에서 정치적으로 배척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맹자의 사당인 맹묘 먼저 들렀다. 공묘보다 규모는 작지만 일반 사당에 비하면 당연히 크다. 공묘처럼 측백나무와 비석들이 많은데 측백의 수형이 아름답고, 사당 입구 동쪽에 비석들을 나란히 세워놓은 비림이 인상적이었다. 맹자부모의 사당이 별도로 있는 점도 다르다. 맹모림은 날이 어두워져서 들르지 못했다.

 

 

<맹자고리(맹자의 고향) 추성 안내도>

농산물에 대한 소개가 많다. 한마디로 추성은 깡촌이란 뜻이다.

 

 

<맹묘 배치도>

                                 아성침전                    -  맹모전

                                  아성전                      - 계성전

                                   천진우물                     - 맹묘비림

                   ↑    - 건륭비정

승성문

                    ↑    - 강희비정

태산기상문

아성묘 패방

영성문

 

 

<맹묘, 맹부 입구의 영성문>

 

 

<아성묘(맹묘) 패방>

패방 뒤에 태산기상문이 있고, 그 뒤에 승성문이 있다.

 

 

<맹묘의 태산기상문과 승성문>

 

 

<아성묘(맹묘) 강희비정>

맹묘에 황제와 관련된 비정은 승성문 앞쪽의 강희비정과 승성문 뒤쪽의 건륭비정, 2개가 있다.

 

 

<맹묘의 오통비석>

 

 

<맹묘비림>

 

 

<맹묘비림의 측백나무와 새>

운치있는 측백 고목에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 한폭의 동양화이다.

 

 

<맹묘의 계성전과 내부>

'啓聖鄒國公之位'라 쓰인 위패 뒤에 단아한 노인상이 있다. 맹자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맹자를 모신 아성전 동쪽에 있다. 바로 뒤에 맹모전 있었는데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다른 이들의 사진을 보니 위패만 봉안이 되어 있었다.

 

 

<맹자 사당인 아성전과 맹자상>

공자상은 약간 구부정하고 근엄한 모습인데 비해 맹자상은 단아하고 유순한 모습이다. 맹자상 앞에 '亞聖孟子位'라 쓴 위패가 있다.

 

 

<아성침전 내부>

아성침전이라면 맹자 부인사당인데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시물들이 있다.

 

 

<맹묘(아성묘) 동무>

 

 

<맹묘 천진정(우물)>

청나라 강희제가 아성전에서 연회를 하던 중 이 자리에 벼락이 떨어져 웅덩이가 생겼고 우물이 솟았다고...

 

 

<맹부(아성부)>

맹자 후손들의 사저이다.

 

 

<맹부 배치도>

공자 직계 후손들의 사저인 공부보다 규모가 작지만 건물들이 단아하다. 맹부대문을 들어서면 예문(의로), 의문, 맹부대당, 세은당, 사O루, 후상방 순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맹부의 예문의로(禮門義路)와 의문(儀門)>

 

 

<맹부대당>

현판의 七萹貽矩(칠편이구)는 맹자가 정치적인 입지를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공손축, 만장 등과 함께 저술한 <맹자>를 의미한다고... 

 

 

<맹자대당과 내택 사이의 건물>

 

 

<맹부 내택>

여성들의 공간으로 우리나라의 안채와 같으며, 공부의 내택처럼 입구에 내택문이 있는 사합원 형태의 폐쇄적인 건물이다.

 

 

<맹부 세은당>

사랑방이었을 듯...

 

 

<맹부 양생당>

교육기관이었을 듯...

 

 

<내택의 생활공간>

 

 

<맹부의 교육시설들>

윗사진은 습유관, 아래 사진은 오경박사원이다. 맹부는 공자 사후 1년 뒤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공부와 달리 송, 원대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맹자 생전의 모습이 남아있다기보다 맹자의 사상을 살려 후대에 지은 건물들이 많다.

 

 

<맹부 뒤편 북서쪽의 건물>

맹자 후손의 생활공간인데 윗 사진의 둥근 문들이 무척 아름답다.

 

 

<태안시 태산국제호텔>

추성의 맹자 유적 관람을 마치고 내일 코스인 태산 등정을 위해 이곳에 묵었다. 호텔에서 태산 도화곡 입구까지 20여분의 거리이다. 매일 밤 늦게까지 강행군을 하다가 모처럼 초저녁(19:00)에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간만에 느긋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태산국제호텔의 저녁식사>

마른 갈치튀김과 숙주 부추나물, 특히 마른 갈치튀김이 맛있었다. 마른 갈치튀김을 더 달라고 했더니 비싼 재료라서 별도의 돈을 내야한다고 했다. 

 

 

<태산국제호텔의 객실>

숙소는 무난했고, 와이파이가 로비에서만 터졌다. 유방의 호텔은 와이파이를 전혀 쓸 수 없었으니 로비에서만 터지는 와이파이가 그래도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