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2014 경주 남산 답사 2일차

큰누리 2014. 10. 23. 23:37

10월 4일 경주 남산 답사 2일차 오전 주요 코스는 울산 대왕암공원과 대왕암, 경주 파도소리길(양남 주상절리군)이었다. 이어 경주 봉길리 대왕암을 보고 이견대에서 다시 대왕암을 원경으로 본 후 감은사로 갔다. 감은사지는 예전에는 동탑 옆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갔는데 이번에 가니 정면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아 시계가 시원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적 제31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소재.

감은사 금당 터 앞에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하다.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올린 모습으로 처마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1959년 12월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몸돌에서 건립 당시 설치하였던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996년 동탑을 해체 보수하였는데, 3층 지붕돌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 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으로 변모한 최초의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지 동탑>

 

 

<감은사지 서탑>

 

 

<감은사지 금당 터>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무왕 2년(682)에 완성된 절이다. 감은사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 지낸 뒤,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제63호. 경북 경주시 배동 산 65-1 소재.

배동의 세 석불은 경주 남산 서쪽 자락의 삼불사에 인접해 있다. 이곳 선방사 터 부근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인데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다문 입, 통통한 뺨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나타내고 있다. 본존불 왼편은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상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쪽 연꽃 위에 선 대세지보살은 두 어깨에서부터 발등까지 구슬과 꽃송이로 엮은 목걸이를 드리우고 있다. 이 삼존불은 웃음 짓는 얼굴 표정과 뺨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는 작품인데 전체적인 조각양식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삼국말기인 7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천룡골 풍경>

남산에서도 유적이 밀집된 삼릉계 답사에 힘이 닫는 데까지만이라도 일행과 동행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일이 꼬여 혼자 천룡사지로 오르는 중이다. 몸이 부실하다고 카페지기님이 추천한 코스였는데 길이는 짧지만 가팔라서 상당히 힘이 들었다. 원치 않는 곳으로 밀려서 기분이 언짢았고 젓가락 같은 천룡사지탑과 유구 돌덩이들만 달랑 보았을 땐 화가 났다. 하지만 동행 없이(한명이 차량 문제로 동행하긴 했다.) 호젓하게 남산의 일면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 때문에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내가 보고자 했던 원래 코스에 있던 냉골의 석불, 삼릉계의 석불, 마애불, 용장사지 관련 유적, 약수골마애대불은 모두 놓쳤다. 대신 천룡사지로 오르는 길에 지천에 널린 익어서 땅에 떨어진 감을 주워먹고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익은 감과 고욤, 배초향과 참취꽃, 으아리꽃, 산박하 등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천룡사지로 오르며 본 경주의 평야>

 

 

<천룡사지로 오르는 길의 감나무>

바닥에 잘 익은 감들이 지천에 널려있어서 가끔 감들을 주워먹으며 올랐다. 재래종이라 크기는 자잘하지만 아주 맛있다.

 

 

 

 

<천룡사지로 오르는 길의 풍경들>

 

 

 

 

<천룡사지 앞의 고욤열매>

 

 

<천룡사지 앞의 폐가와 폐가에서 보이는 천룡사지 삼층석탑>

마당에 귀부가 있다.

 

 

 

 

-≪천룡사지≫-

천룡사는 고사(高寺)라고도 하였는데, 남산의 고위산을 뒤로 하고 해발 300m의 산중 평지에 조성되었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한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671년에 당나라 예부시랑 악붕구가 사신으로 와서 천룡사를 보고 "이 절이 허물어지면 신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볼 때 늦어도 7세기 후반 이전에 이 사찰이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천룡사는 고려시대 정종 때 최제안에 의하여 대규모로 중수되었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호국의 대가람이었다.

1996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금당지를 발굴조사하여 세번이나 중수되었던 사실을 밝혀내었다. 지금까지 절터에 남아있는 것은 삼층석탑, 귀부, 석조, 맷돌 등이다.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과 유구>

삼국유사에는 남산 남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고위산이라 하고, 산 남쪽의 절을 고사 또는 천룡사라 기록하고 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7개소의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몸돌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태로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천룡사 터에 넘어져 있었으나 1990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조사단의 발굴 조사 후 1991년 기단의 일부와 꼭대기 부분의 머리장식 대부분이 없어진 것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축조수법으로 보아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룡사지의 개화기를 거스르고 핀 개나리>

 

 

<천룡사지 입구(틈수골)의 감나무>

 

 

<하산길의 천룡사지 입구(틈수골)>

 

 

 

≪천룡사지에서 너무 지체되어 부랴부랴 서둘러 삼릉계로...≫

천룡사지는 탑보다 오르내리는 길의 풍경이 더 좋았다. 하지만 나를 태워다 줄 동행이 천룡사지에서 헤어져 잠시 뒤에 내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오른 후 해가 뉘엇뉘엇 기울어도 내려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틈수골로 내려와 택시를 타고 해가 지기 전에 삼릉계로 가려는데 동행으로부터 곧 내려온다는 연락이 왔다. 멀지 않은 삼릉계에 나를 떨군 동행은 삼릉계를 넘어간 일행을 태우러 떠났고 해는 이미 꼴딱 넘어가버렸다, 흐미...

 

 

<삼릉계 옆의 남산 입곡 석불두 소재지 입구>

입곡(笠谷)은 삿갓골이라고도 한다. 남산을 답사하면 수많은 골짜기들을 만나는데 한자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지만 옛이름을 간직한 곳도 많아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온다. 부엉골, 틈수골, 삿갓골, 냉골, 바람골, 가늘골, 절골, 부처골... 경주 남산 문화유적탐방로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찾아보니 80km가 넘는 경주 유적을 두루 훑는 코스였다. 이 루트를 따라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남산 입곡 석불두>

남산 북쪽의 금오봉이 서쪽으로 쭉 뻗어내린 그 남북에 약수계곡과 냉골이 있고, 그 사이에 위치한 삿갓골 입구에 이 불두가 있다. 바로 남쪽에 경애왕릉과 삼릉이 있다. 이 불상을 받치던 대좌는 주위에 흩어져 있었는데 근래에 가지런히 옮겨 놓았다.

 

불상은 둥그스름하고 잘 생긴 얼굴에 약간 근엄한 표정인데 코 부분이 파손되었다.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하고 그 위에는 큼직하게 상투모양을 조각하였다. 귀도 큼직하게 생기고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가 있다. 옷은 양어깨에 걸쳤는데 양다리에 타원형으로 드리운 것 같다. 불상의 대좌는 여러 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윗면 중앙에 불상을 세웠던 큼직한 사각형 홈이 있고 옆면에는 아래 위로 연꽃을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조각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경애왕릉>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릉이다. 밑둘레 약 43.7m, 높이 약 4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기린내)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으로 보이는 자연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경애왕은 제53대 신덕왕의 아들로 황룡사에서 백좌경설을 설치하였는데, 대규모 선승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927년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삼국사기에는 남산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동 삼릉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은 재위 당시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으며, 이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로 효공왕이 자손 없이 죽자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는 견훤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 차례에 걸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굴식돌방무덤으로서 돌방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신라의 무덤으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재위 기간 동안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결국 삼릉계는 오르지 못하고 말았다...

 

 

<이틀째 저녁 들깨칼국수>

삼릉 앞 고향칼국수집에서 먹은 들깨칼국수이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맛있게 먹지는 못했지만 음식맛이 괜찮고 종업원과 주인이 서글서글하고 친절하다. 저녁을 먹고 서악동의 도봉서당에서 숙박을 하러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