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큰누리 2015. 3. 15. 00:15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이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329(북성동 1가 102-2번지)

관람시간 : 19:00~18:00(17:30까지 입장)

요금 : 한시적 무료

문의처 : 안내데스크 032)440-4710~1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내용>

2층 제1전시실 : 이민의 발자취 - 도전의 출발지, 인천 - 제물포항 1902년 - 최초의 이민

2층 제2전시실 : 출항, 64회 7,415명 - 낯선 환경, 낯선 생활 - 사진 결혼 - 공동체 형성 - 또 다른 도전, 재이주 - 활발한 교류와 융합 - 뜨거운 교육열

♣ 1층 제3전시실 : 멕시코로 간 사람들 - 쿠바 한인사 - 기타 중남미 한인사 - 이민사회 구국운동 - 미주한인사회의 독립운동 -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귀향

1층 제4전시실 : 이민사회와 한인문화 - 재외 동포의 위상 - 자랑스러운 대한인 - 마음의 고향, 인천 - 우리는 대한의 형제

♣ 로비 : 기증자 명단 - 안내

 

 

 <월미도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 2층 입구>

 

 

<2층 제1전시실, 조미수호통상조약집> 

 

 

<2층 제1전시실, 1903년 최초로 이민을 떠날 때의 인천항(제물포) 전경과 월미도>

 

 

<2층 제1전시실, 개항 당시의 인천항의 상황>

인천은 개항 이후 최대의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일본, 청국 상인들의 활동과 외국 상사를 중심으로 무역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곡물을 수출하고 공산품, 직물, 면제품을 주로 수입하였다.

초창기 인천항 무역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은 일본 상인들이 독점하면서 청국 상인들과 경쟁하였으나 청일전쟁 이후 청국 상인들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구미상사로는 영국의 이화양행,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독일의 세창양행이 대표적이었다.

 

 

<2층 제1전시실, 개항 당시의 인천항(제물포) 모습>

네모속의 사진은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인천항 갑문, 인천항 부두 사진이다.

 

 

<2층 제1전시실, 유민원에 대한 설명과 하와이 이민 모집 공고>

유민원은 여권 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한 정부의 공식기관으로 초대 총재는 사진 속의 민영환이다. 오늘날의 외무부 여권 업무와 해외개발공사의 기능을 합친 기구였으나 1903년 10월에 폐지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인천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像>

존스목사는 기독교 전파와 교욱 전반에 걸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선교사로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지방의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894년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인천에 개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는 등 교육에도 힘쓴 학자 선교사이기도 하다. 1919년 마이애미에서 51세에 별세하였다.

최초 이민자 중에 인천 출신이 많은 것은 존스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2층 제2전시실, 최초의 이민선 갤릭(Gaelic)호>

 

 

<재현한 최초의 이민선 갤릭(Gaelic)호와 승선자 사진, 이민자들 유품>

처음에 제물포에서 121명이 떠났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 탈락, 102명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보건당국의 검사 결과 질병자 16명이 탈락하고 결국 86명만 상륙 허가를 받았다.

 

 

 

<2층 제2전시실, 사탕수수 농장 한인들의 일과와 보수>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교포들의 애환과 개척자로서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역사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십장인 '루나'의 감시를 받았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제도의 압박감이었다. 농장에서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 30분 기상 사이렌으로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6시부터 일을 시작해 단 30분간의 점심식사를 마치면 오후 4시 30분까지 계속 일을 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이었고, 일요일은 쉬었다.

 

농장 일은 잡초를 뽑는 일에서부터 수확 때 줄기를 자르는 일, 잎을 잘라내고 차곡차곡 쌓아놓는 일, 물 대는 일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쌓아놓은 수수를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것이었다. 한 달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번호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1905년까지 어른 남자의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들의 생활공간>

 

 

 

<2층 제2전시실, 사진 신부>

혼기를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당시 남성이 여성보다 10배나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진 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0년가지 중매쟁이를 통해 700여명 정도의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건너갔고 신랑과의 나이 차이는 대략 15살이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사진 신부들 또한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인 삶을 꾸려갔다.

 

 

<2층 제2전시실, 이민 사회의 공동체 형성, 또 다른 도전, 재이주, 활발한 교류와 융합 등의 내용을 전시> 

 

 

 

 

<2층 제2전시실, 뜨거운 교육열의 현장인 한인학교 교실>

 

 

<1층 제3전시실>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들은 에네켄(일명 애니깽) 농장에서 일했다. 에네켄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긴 다육질의 잎은 아주 두껍고 가장자리에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솟아있는 섬유식물이다. 우리말로는 '하얀 마'라고 하는데 당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한 한인들은 이것을 '어주기', '어저구', 어저귀' 등으로 불렀다. 

에네켄은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어 선박용 로프나 마대용 자루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멕시코 후기 이민사>

멕시코 후기 이민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67년에 장기철이 유학을 갔고, 1968년 미국에 거주하던 문대원이 태권도를 보급하며 정착하였다. 1969년 원단공장 기술자로 서동수가 이주하였다. 1991년 비자면제협정이 맺어지면서 한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15,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쿠바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들이 사용한 고무 가락신, 은제상자, 바늘통>

 

 

<미주 한인 사회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미주 한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는 외교 및 선전 활동의 전개이고, 둘째는 독립 자금의 모금이다.

미주 지역 독립운동은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외교적 입장에서, 안창호는 미주 본토에서 민족 교육적 입장에서, 박용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군사적 노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인 이민자들의 전세계 분포도>

 

 

<한국이민사박물관 뜰의 '첫 이민 떠난 곳' 표지>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본 월미산과 월미공원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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