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화성시 융건릉

큰누리 2015. 4. 6. 00:24

≪융건릉≫ 사적 제206호.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비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왕후)를 모신 능이다. 건릉(建陵)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능이다. 정조가 양주(현재의 휘경동)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으나 고종 때 황제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바꾸었다. 정조가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부자를 한 구역에 모시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으로 빚어진 화려한 아름다운 왕릉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개혁군주의 왕릉도 만날 수 있다. 주변에는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가 있다.

 

 

 <융건릉 종합안내도>

사진 상의 왼쪽은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인 건릉, 오른쪽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합장릉인 융릉이다. 정조의 능은 원래 융릉의 동쪽(사진 상의 오른쪽)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승하한 후 합장하면서 현 위치인 서쪽으로 천장했다.

 

 

<융릉, 건릉 역사문화관>

 

 

<융릉, 건릉 역사문화관의 장조와 정조 가계도>

영조 - 사도세자(추존 장조) - 정조 - 순조 - 헌종으로 이어지던 계보는 후손을 보지 못하고 단명한 헌종의 외아들 효명세자(추존 문조)에서 끊어진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을 응급수혈(!)한 왕이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궁이었던 숙빈 임씨 소생인 은언군 - 전계대원군의 아들(사도세자의 증손)이다. 하지만 철종 역시 후사가 없어 같은 숙빈 임씨 소생의 은신군 - 남연군 - 흥선대원군 아들인 고종(사도세자의 고손)으로 이어진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명에 갔지만 아이러니하게 그의 자손들은 정비 소생은 물론 후궁 소생까지 줄줄이 왕이 되었다.

 

 

<능(陵), 원(園), 묘(墓)>

: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 왕세자나 왕세자빈 무덤(순창원, 의령원, 효창원, 소경원, 영회원, 숭인원, 영원)과 '빈'급 후궁의 무덤(수경원, 수길원, 소령원, 순강원, 휘경원, 영휘원)을 말한다.

  : 왕세자를 제외한 왕자나 공주, 후궁 등 왕족의 묘를 말한다.

 

장조(사도세자)의 무덤은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능, 원, 묘 3단계를 모두 거친 왕릉이다. 1762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묘는 처음에는 현재의 휘경동에 있었고 사당의 이름(수은묘:垂恩廟)을 따 '수은묘'로 불렸다. 정조는 즉위 후 1776년에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꾼 뒤 1789년 현 위치로 천장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왕릉에 준하는 석물을 재조성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2년이 지난 1899년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현륭원'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지칭하는 '융릉'으로 높였다.

 

 

<융, 건릉 산림 전통고유수종들>

융건릉은 넓은 구역 만큼이나 숲이 울창하고 수종도 다양하다.

 

 

<융건릉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활엽수림>

 

 

 

<융릉 금천교(원대황교)>

금천교는 왕릉과 속세를 가르는 돌다리로 홍살문 앞 20~50m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폭은 대략 3~4m 정도이다. 융릉의 금천교는 독특하게 '원대황교'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고 확실한 다리 형태를 하고 있다.

 

 

<융릉 곤신지>

 

 

<융릉(隆陵)>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莊祖, 1735~1762)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1735~1825)의 합장릉이다. 소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운 사도세자는 당시 주류인 노론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1762년(영조38)에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당시 양주에 있던 영우원을 이곳으로 옮겨와 현륭원이라 하였다. 1899년 고종이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혜경궁 홍씨를 헌경의황후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였다.

 

봉분 아랫부분은 십이지신상 대신 모란과 연꽃 문양을 새긴 병풍석이 감싸고 있으며, 봉분과 지면이 맞닿는 부분에 와첨석을 깔아서 장식하는 등 정교한 조영 기술이 돋보인다. 융릉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빚어낸 작품으로 조선왕릉 중 가장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합장릉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능에 모신 형태

 추숭 :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를 주는 것.

 

PS : 융건릉은 몇 차례 들렀으나 불행하게 촬영은 못했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부터 왕의 능침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졌고, 전에 들렀을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렀거나 공교롭게 카메라가 고장나서 촬영을 못하고 대신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융릉의 석물은 특별한 점이 많고 아름다운데 안타깝다! 

 

 

 

<융릉 수라간>

정자각 서남쪽에 있으며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거나 데우는 건물로 부엌이 있다.

 

 

<원경으로 본 융릉 능침과 석물들>

 

 

<융릉 비각>

 

 

<융릉 현륭원비>

융릉에는 현륭원비와 의황제비 2개가 있다. 현륭원비 전면 글은 '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다. 후면에는 탄생과 죽음, 최초의 장지와 정조가 장헌세자로 추상하고 영우원으로 바꾼 것, 화성으로 묘를 옮기고 현륭원으로 고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융릉 의황제비>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황제)으로 추숭하면서 세운 비로 전면에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건릉>

건릉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 김씨(1753~1821)의 합장릉이다. 1899년 고종이 정조를 정조선황제, 효의왕후를 효의선황후로 추존했다. 원래 정조의 능은 융릉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융릉 서쪽인 이곳에 합장하였다. 

 

봉분을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둘러싼 것 외에는 규모와 형식이 융릉과 매우 비슷하다. 문인석, 무인석은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며 문인석은 금관 조복을 입고 있는 등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금관 조복 : 문무백관이 국가 행사 때 입는 대례복.

 

 

 

<건릉 정자각 앞의 지적 기준점>

 

 

<건릉 비문>

1900년 고종 때 세웠다. 전면의 내용은 '대한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이다. 후면에는 정조와 효의왕후의 탄생과 죽음, 융릉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장, 1899년에 추존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융건릉 앞의 가야한정식>

융건릉 앞에는 단체로 식사할 수 있는 1만원대의 약식 코스 요리를 파는 곳이 몇 곳 있는데 음식의 질이 훌륭하다. 우리가 들른 곳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아래의 한식집이다. 세 차례에 걸쳐 음식이 나오는데 양이 적당하고, 기다리지 않고 빨리 음식이 나오고, 맛도 좋아 모두 만족스러워 했다. 두번째 사진은 두번째까지 나온 음식들이다. 먹다 생각나서 찍었더니 모양새가 좀 험하다^^.

달콤하고 고소한 배추겉절이, 쫄면, 잡채, 야채 샐러드, 돼지갈비, 도다리 튀김, 홍어무침, 들깨 야채샐러드 등이다. 뒤에 감자전이 더 나왔던 것 같고 이어 돌솥밥, 된장국과 나물, 김치, 젓갈류의 밑반찬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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