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남양 성모성지

큰누리 2015. 4. 12. 01:11

≪남양 성모성지≫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화성시 남양동에 위치한 남양 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무명의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며, 성모의 품처럼 아늑한 경관을 지닌 곳이다. 이곳은 1991년 10월 7일에 성모께 봉헌되었고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되었다. 남양 순교성지가 '성모 성지' 라는 테마를 갖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가 '순교자들의 어머니'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박해 당시 순교자들은 고통을 이기기 위해 묵주기도를 올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했다고 한다.

 

1868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는데 기록에 전해지는 사람은 충청도 내포사람 김필립보와 박마리아 부부, 수원 갈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용인 것옥골 사람 정필립보 등 4명 뿐이다. 다른 순교 성지와 달리 무영인들의 순교지였기 때문에 오랫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했다. 천주교측은 1983년 남양 순교지 발굴을 한 후 성지개발에 착수하였고 광장 조성, 성모상 건립, 경당 건립 등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남양이 순교지가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당시 상대적으로 종교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둘째, 남양이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라서 행정과 사법권을 동시에 가진 남양부사가 부근의 천주교인들까지 끌어다 처형했기 때문이다. 세째, 남양과 가까운 곳에 백학 교우촌이 있어서 주변에 천주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양 성모성지 입구의 '강복 그리스도像'>

예수상 자체가 십자가 모양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 손은 '용서와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남양 성모성지 입구의 길>

 

 

<양초 봉헌실과 성모자像>

아름다운 촛불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성모자상이 경건함을 자아낸다. 남양 성모성지에는 다양하고 많은 그리스도像과 성모자像이 있다.

 

 

 

<그리스도像>

순교지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이곳을 구경(!)왔다 만난 어떤 분이 나에게 대뜸 '검은 육각형의 돌들이 묘비냐?'고 물었다. 나도 잠깐 그렇게 생각을 했기에 확인해 보니 그냥 돌로 된 야외용 의자였다.

 

 

<남양 성모성지 배치도와 이콘>

남양 성모성지의 배치가 공교롭게 중앙의 성모자상 이콘과 비슷하다는 그런 내용이다.

 

 

<십자가의 길?>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양 성모성지에는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해 어두워졌기 때문에 모든 길을 여유롭게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받침대가 천사의 얼굴이 조각된 기둥들로 보아 '묵주기도의 길' 같기도 하다.

 

 

<박지환(요한) 신부像>

잊혀진 무명 순교자들의 처형지인 이곳을 발굴하여 1982년부터 순교지로 개발하다 1985년 3월 29일 선종한 분이다.

 

 

<방울 트리>

평범한 재료이지만 살아있는 나무에 반짝이 방울을 매다니 특별한 느낌이 든다. 파손되어 떨어진 방울들을 바닥에 그대로 둔 것도...

 

많은 기독교 종파 중에서 개인적으로 천주교의 건축이나 인물조상에 눈길이 간다. 가장 전형적인 서양의 미인형으로 조성된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가 하면 가장 한국적인 성모자상을 조성한 것도 천주교이다. 성당이나 성지의 건물에 한국전통 건축방식을 도입한 곳도 유난히 많다.

 

 

 

<박지환(요한) 신부상 앞에서 본 성모성지>

 

 

 

<성모자像>

 

 

<천사像이 새겨진 돌기둥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현해 놓은 마굿간>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현해 놓은 마굿간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像>

 

 

 

<마굿간 앞의 기도하는 천사像>

다른 이들의 사진을 보니 두 여인(!) 모두 날개가 있는데 현재 사진 오른쪽의 인물에는 날개가 없다. 제작 당시에 별도로 부착한 날개가 떨어져서 그 상태로 매끈하게 처리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한 마굿간>

 

 

<예수님과 어린이, 혹은 하느님과 어린이상>

 

 

<남양 성모성지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신부(1894~1941)'像>

콜베신부는 1894년 폴란드 즈둔스카볼라 출생으로 1911년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고 1912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1917년 동료수사 6명과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 창설, 1922년 동명의 잡지 창간, 1927년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을 건설하고 사회운동을 추진했다.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 폴란드 국민에게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 때문에 1941년 나치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수용소에서 1명이 탈출하자 나치는 보복으로 10명을 아사감방에 가두었고, 콜베신부는 그 중 한 명을 대신해 독주사를 맞고 죽은 후 시신은 화장되었다. 1982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탄생 8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남양 성모성지의 '오상의 비오신부(1887~1968)'像>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프란체스코 포르지오네이고 '비오'는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할 때 받은 이름이다. 비오신부는 1918년 10월 20일 그리스도의 오상(십자가의 다섯 상처. 못에 찔린 두 손과 두 발,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로 '성흔'으로도 불림)을 받았다. 교회사에서 최초로 오상을 받은 비오신부는 50년 동안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비오신부는 손가락에 묵주가 뿌리를 내리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묵주기도를 사랑했다.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복자)되었다가 2002년 6월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성인)되었다.

 

 

<남양 성모성지의 '캘커타의 복녀 마더 테레사 수녀'像>

마더 테레사 수녀는 1910년 마케도니아(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출생했다. 1928년 수녀가 되기로 마음 먹은 뒤 1931년 로레토 성모 수녀회의 수녀가 되었다.

 

이후 인도로 파견되어 수녀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48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원 밖 거주'를 허락받아 거리로 나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했다. 1950년 캘커타 빈민가에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으로 '평화의 마을', '임종자의 집', '사랑의 선물' 등 구호단체를 인도 및 전 세계에 설립했다. 한센병(나병) 환자,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극진하게 모시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의 길을 평화롭게 인도했던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1997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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