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속리산 법주사

큰누리 2015. 6. 19. 23:43

<속리산 법주사 일원>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5,623,475평)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 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와 기암, 기석이 절경을 이루고, 크고 작은 사찰이 곳곳에 있어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의 대표사찰인 법주사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산세험준함을 보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정유재란(1597년)으로 전소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보수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등 국보 3점, 보물 12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재 25점이 소장되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속리산은 명승으로, 법주사 주변지역은 사적으로 변경 지정되었으며 산중에는 복천암, 탈골암 등 11개소의 전통사찰이 산재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호서제1가람'이라 적혀있다.

 

 

<법주사 입구의 속리산 사실기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는 1666년(현종7)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 65cm이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이 적혀 있는데 내용은 당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동국(한국) 명산에 큰 거북이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법주사 입구의 벽암대사비>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에 세웠다.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cm, 폭 110cm, 두께 35cm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000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 종합 안내도>

 

 

<법주사 금강문과 인왕상>

 

 

 

<법주사 경내의 연등>

 

 

<법주사 석련지> 국보 제64호.

성덕왕 19년(720)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희귀한 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연꽃이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기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법주사 당간지주>

당간이란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寺刹)이라 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국가재정 마련을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되었서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 이곳 철당간은 22m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과 팔상전, 천왕문>

중앙 원경의 건물은 원통보전과 대웅보전이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었는데 승병장인 사명대사가 주관하였다. 1968년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5층 목조탑으로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이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다. 처마를 장식하는 공포양식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이고 5층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이다.

 

 

<법주사 팔상전 내부>

 

 

 

 

 

 

<법주사 천왕문과 사천왕상 2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천왕문(사천왕문)은 안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천왕문은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웠으며, 혜공왕 12년(776)에 중창하고, 인조 2년(1624)과 고종 34년(1897), 197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이 때 사천왕상도 다시 고쳤다.

사천왕(四天王)은 사방을 지켜주며 국가를 수호하는 네 신이다. 수미산 사천왕천에 머무는데 동방의 지국(持國)천왕, 남방의 증장(增長)천왕, 서방의 광목(廣目)천왕, 북방의 다문(多聞)천왕을 말한다.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면서 불법을 믿는 중생을 수호한다고 한다.

 

 

 

<법주사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 건물로 지붕은 우진각 형태이며 꼭대기에 절병통이 설치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고 헌종13년(1847), 고종 29년(1892)에 중수했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좌우에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협시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원통보전으로 법주사 원통보전과 낙산사 원통보전이 있다.

 

 

<법주사 원통보전의 목조 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361호.

얼핏 보면 소조상 같은데 분명히 목조 관음상이라고 되어 있다.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보물 제1417호.

보살상은 전체 높이 213cm 규모로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믈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 옷의 표현기법 등으로 보아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주사 사천왕석등> 보물 제15호.

뒤의 전각은 법주사 대웅보전이다.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 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증축할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9m에 이르는 대형 석등으로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 창을,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 정상에는 보주 받침이 남아있다.

 

 

<법주사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개축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개축했다. 면적 402.80㎡,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으로 꼽힌다. 비슷한 기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법주사 소조비로자나불삼불좌상 안치되어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원숭이상(?)과 대웅보전을 등지고 본 모습>

 

 

 

<법주사 대웅보전의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

 

 

<법주사 대웅보전 후면과 삼성각>

 

 

<법주사 약사전>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제5호.

신라 석등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법주사 팔상전과 천왕문>

 

 

<법주사 명부전 내부>

 

 

<법주사 삼성각 내부>

 

 

<법주사 적멸보궁(능인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능인전은 석가모니 부처와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능인'이란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좌우에 각각 8구씩 모두 16나한상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은 인조 2년(1624)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목조 기와집이며 건평은 약 8.9평이다.

이 전각은 모든 안내문에 능인전으로 표기되었지만 전각에는 '적멸보궁'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적멸보궁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안에 안치된 불상으로 보아 능인전이 맞는데 적멸보궁 현판이 붙은 것은 전각 뒤에 세존사리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법주사 능인전과 세존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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