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여주 영녕릉(英寧陵)

큰누리 2015. 6. 21. 19:10

 

 

<영릉(英陵) : 세종대왕, 소헌왕후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소재. 세계문화유산. 사적 제195호.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54세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훈민정음:199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 농사직설(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한국 지리책), 석보상절(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취(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英陵)은 원래 서울 헌릉(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이어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현지 안내문--

 

 

<영릉(英陵) 출입구>

박정희 정권 시절에 세종대왕릉을 성역화하면서 만든 특이한 시설이다. 딱히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성역화하면서 만든 세종전, 훈민문 역시 낯설다. 세종전의 경우 이왕 지을 거면 건물 외관을 왕릉에 어울리게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종대왕 부부 능(英陵)과 효종대왕 부부 능(寧陵)>

두 능은 이웃해 있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따로 들어갈 수도 있고, 숲에 난 샛길을 이용해서 옆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세종대왕릉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와 차로 효종대왕릉으로 가려 했지만 중간에 길이 막혀 밖에서 걸어들어 갔다.

 

 

<영릉(英陵) 입구 세종전>

동행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세종전을 들르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세종전 관람은 포기하고 마당에 진열된 과학기구를 보는 쪽을 선택했다. 마당에는 세종대왕 시기에 만든 다양한 과학기구들을 실물 크기로 전시해 놓았는데 자세한 설명까지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전시된 과학기구는 따로 포스팅 할 예정이다.

 

 

<영릉(英陵) 입구 세종대왕 동상>

 

 

<영릉(英陵) 재실>

영릉 재실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주차장 화장실 옆으로 추정하며 빈 터에 '영릉(세종.소헌왕후릉) 재실 터'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 재실은 성역화 사업을 할 때, 혹은 최근에 세운 듯 하다. 건물은 행랑채와 재실 두 채여서 단촐하다. 담장 안쪽에 영녕릉 관련 사진을 빽빽하게 게시해서 다소 어수선하다.

 

 

 

<영릉(英陵) 훈민문>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을 모두, 그것도 어떤 능은 몇번씩 돌아도 이런 시설은 없기 때문에 가장 당혹스러운 건물이다. 훈민문 때문에 총체적인 영릉의 배치를 판단하는데 혼동이 된다.

 

 

<영릉(英陵) 홍살문>

홍살문 기둥 받침대도 그렇고 홍살문의 원래 위치가 이곳이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기둥으로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 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들이 능을 참배할 때 절을 하는 판위가 조성되어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 절을 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던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참도 중앙의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 하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 신도로 출입할 수 있다. 

 

 

<영릉(英陵) 금천교>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어구(御溝), 금천(禁川)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의 배산임수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영릉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영릉(英陵)>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은 수라간, 오른쪽은 수복방과 비각이다. 정자각과 수복방 중간에 서면 능침이 비교적 잘 조망된다.

 

 

 

<영릉(英陵) 정자각>

정자각은 제례 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례를 드리던 건물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자와 비슷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 한다. 동쪽과 서쪽의 오르는 층계는 제례의식이 동입서출(東入西出 :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나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정자각 뒷벽 중앙의 문은 제례를 드릴 때 열어 놓으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자리(예감, 소전대)가 있다.

 

 

<영릉(英陵) 수라간>

산릉제례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 곳이다. 주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영릉(英陵) 수복방>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를 담당한 일종의 관노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에 복원했다.

 

 

<영릉(英陵) 예감(瘞坎)>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으로 제례가 끝난 뒤 철상(제례 음식을 치움) 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영릉(英陵) 능침으로 오르는 서쪽계단>

 

 

<영릉(英陵) 능상과 석물들>

관람객이 보기 편리하도록 되어 있고(일정 위치에 저지시설 설치!) 능의 관리상태도 훌륭하다. 우리처럼 역사에 관심이 좀 있는 일반인들은 왕릉이나 묘를 볼 때 멀리서 막연히 보는 것보다 능의 병풍석이나 난간석, 석물 등에 관심이 많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정자각 윗쪽은 원천 차단한 곳이 많아 아쉬웠는데 이렇게라도 해주면 정말 thank you! 이다. 능침도 손상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학구적인 호기심(?)이나마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능이며, 원래 헌인릉 서쪽에 있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병풍석이 없어진 것이 세조 때부터인데 예종 때 이장을 했기 때문에 영릉에는 난간석만 있다. 아담하고 갑옷이 예쁜 무인석에 특히 눈길이 갔다.

 

 

 

 

<영릉(英陵)>

왕과 왕후의 합장릉이기 때문에 상석(혼유석)이 2개이다.

 

 

 

<영릉(英陵) 능침에 내려다 본 모습>

중앙의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은 비각과 수복방, 오른쪽은 수라간이다. 능이나 건물은 앞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뒤쪽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총체적인 파악에 더 도움이 된다.

 

 

<영릉(英陵) 동쪽 계단에서 본 석물들>

왼쪽 무인석의 갑옷을 입은 뒤태가 예쁘다.

 

 

<세종대왕 영릉비(英陵碑)>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지금의 강남구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했으며,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 때에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효종 영릉(寧陵) 재실>보물 제1532호.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로 영릉재실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현 구리시)에 능 조성시 인근에 건립되었으나, 1673년 영릉(寧陵)을 천릉하면서 현위치로 옮겨 지었다.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 수법에 있어서는 짜임새 있게 건립되었고, 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대문 포함)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조선왕릉 재실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대부분 멸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 있었으나, 이곳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영릉(寧陵) 재실 협문과 향나무>

껑충 솟은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이 협문 오른쪽 안에 수령 300년의 천연기념물 회양목이 있다. 협문은 재실과 제기고 사이에 하나 더 있다.

 

 

<영릉(寧陵) 재실>

향나무 왼쪽 앞으로 보이는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종된 300년 수령의 회양목이다. 나홀로 껑충 솟은 향나무도 그렇고 협문1의 담장에 기댄 느티나무의 수형도 그렇고 건물부터 나무까지 연륜이 팍팍 느껴지는 재실이다. 

 

 

<영릉(寧陵) 재실과 제기고 사이의 협문>

그리고, 느티나무...

 

 

<영릉(寧陵)>사적 제195호. 세계문화유산.

영릉(寧陵)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볼모로 있다가 귀국한 후 3개월만에 돌아가시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조선조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여 1659년에 승하하니 재위 19년에 춘추가 41세였다.

 

효종은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을 수 없는 한으로 생각했다. 왕위에 오른 후 효종은 이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여 대내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를 널리 보급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북벌계획을 추진하여 성채를 쌓고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즈음 러시아가 시베리아쪽으로 남하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하고 청나라의 군사 정세를 탐지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군대를 보내 송화강,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북벌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갑자기 승하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現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으로 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현종 14년(1673)에 여주로 옮겼다.

 

영릉(寧陵)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 위로 배치한 동원상하릉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따른 이런 동원상하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이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도 같은 형식이다.

 

 

<영릉(寧陵)>

홍살문 너머에 금천교가 있고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에 수라간, 오른쪽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영릉(寧陵) 예감>

 

 

<영릉(英陵) 재실에 있는 영릉(寧陵) 사진>

야트막한 언덕에 능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관람 통로는 왕릉과 왕비릉 사이에 나 있어서 동시에 두 개의 능을 촬영하기 어렵다. 정자각 바로 뒤의 능(아래쪽)은 인선왕후릉이고, 위쪽의 능은 효종릉이다.

 

 

<서쪽에서 본 영릉(英陵)>

 

 

 

<영릉(寧陵)의 효종릉>

 

 

 

<영릉(寧陵) 효종릉에서 내려다 본 인선왕후릉과 전면의 모습>

이쯤에서 디카 배터리가 방전되어 휴대폰으로 촬영했고, 그나마 비각과 수복방 촬영도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