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3 - 압록강 보트 투어, 호산장성, 구련성 터, 변문진

큰누리 2016. 9. 2. 00:13

<16. 8/1. 열하일기 따라가기 2일차 일정1>

07:30. 단동 월량도 베니스호텔 출발- 압록강단교- 압록강 보트 투어(쾌속정으로 압록강 복판에 있는 북한령 우적도와 강 건너 의주 통군정 주변을 둘러보는 50위안 옵션 관광)- 일보과- 호산장성- 구련성 터단동으로 되돌아와 해금강에서 시고 짠 냉면으로 점심식사- 압록강 지류인 애(라)하를 건너- 변문진(책문)- 오룡산(봉황산)- 설리참통원보(시장에서 고량주 구매)- 초하구- 연산관- 청석령 정상에서 도로봉쇄로 차를 돌려 내려오는 길에 이민환 항일열사묘 참배- 고속도로로 요양으로 이동(이동 중 무지개, 용두모양 구름을 봄)- 요양 마마스쿡에서 삼겹살로 저녁식사- 요양빈관(호텔) 투숙.

 

 

<압록강 단교 앞 풍경>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이 섞여있다. 2개의 철교 중 앞쪽은 6.25 때 미군의 폭격으로 잘린 단교이고, 뒤쪽의 철교는 뒤에 세운 것으로 지금도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철로로 이용된다. 보통 단교 위로 올라가 다리가 잘린 부분까지 다녀오는데 우리 일행은 이곳에 서서 기념촬영만 하고 자리를 떴다. 모두 여행, 역사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라 백두산 고구려 유적답사를 통해 단교를 이미 둘러본 때문이다.

 

내가 처음 들른 2009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월량도 국제관광구'라는 괴물이 압록강 복판에 들어섰고, 우리는 그곳에서 첫날을 묵었다. 당시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신의주 쪽으로 바짝 붙어서 한바퀴를 돌았고, 이번에는 좀 떨어진 곳에서 쾌속정을 타고 우적도, 통군정 부근을 한 바퀴 돌았다.

 

 

 

<압록강단교 동영상>

 

 

<쾌속정 투어를 하러 가는 길에 본 압록강과 북한>

 

 

<압록강 쾌속정 투어>

50위안을 옵션으로 지불했다. 쾌속정을 타고 승강장 바로 앞쪽에 있는 북한령 우적도와 강 건너편 의주 통군정 주변을 둘러본다. 압록강 단교 앞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것과 달리 촬영에 제재가 따랐다. 

우리가 던져주는 담배 한 보루만 신의주쪽에서 날름 받고, 사진을 찍으려는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려 하는 소년을 보았다. 우리 보트 기사는 북한쪽으로 최대한 접근하거나 서행을 하는 등 사진촬영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눈치껏 도왔다.

 

 

<쾌속정에서 본 압록강 속의 북한땅, 우적도>

풍력발전기, 풀을 뜯는 염소, 강가를 걷는 주민, 초소 주변을 거니는 병사(여군도 보였다), 지붕 고치는 사람들,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예전에 짐을 묶어나르던 철탑 모양의 목재 지지대 부근에서 목선을 타고 단동으로 생필품을 사러가는 우적도 주민을 떼로 보았다.

 

 

 

 

<예전에 신의주와 우적도 사이에서 줄에 짐을 묶어나르던 지지대>

단동으로 배를 타고 가는 우적도 주민들이 왼쪽 끝에 보인다.

 

 

<호산장성 입구>

2009년에는 없었던 조각상이고, 성루 바로 앞까지 버스가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부터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사회주의 특유의 웅장하고 호전적인 조각상 아래에 '만리장성 동단기점-호산장성'이란 웃지 못할 글귀가 보인다. 이곳으로부터 300여km 이상 떨어진 노룡두가 만리장성 동쪽 끝이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엉뚱하게 이곳을 만리장성으로 묶었다.

 

 

<호산장성 아래에 있는 일보과 입구의 노점상>

일보과(호산장성) 부근에 사는 주민들이 근처에서 직접 가꾼 오이나 해바라기씨, 과일 등을 파는데 값도 싸고 맛있다. 해바라기 씨앗을 즉석에서 볶아 파는 상인이 지나가는 내게 자두를 먹어보라며 주는 중이다. 거절했는데도 따라와서 손에 쥐어주어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먹었는데 맛있었다!

나오는 길에 이분에게 볶은 해바라기 씨를 사서 지금까지 잘 먹고 있는데 여행 내내 들고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일행들도 이분에게 볶은 해바라기 씨(7봉에 만원, 싸고 알이 잘지만 국산보다 고소하다!), 자두, 동죽살 말린 것 등을 샀다.

 

 

<일보과>

두번째 사진 오른쪽은 호산장성이다. '한발짝만 건너면 된다(국경이다)'는 뜻으로 표석 뒤의 작은 개울을 건너면 북한인 최접경지역이다. 주변에는 북한쪽으로 물건을 던지지 말라, 밀수를 하거나 마약을 판매하지 말라, 월경하지 말라, 군인들을 촬영하지 말라는 등의 간자, 한글 경고문이 붙어있다.

 

 

 

<호산장성>

단동의 압록강에 이어진 성으로 성문 1개와 성곽 일부가 남아있으며, 고구려의 박작성이라고 전한다. 현재 만리장성처럼 남아있는 성곽을 통째로 검은 벽돌로 리모델링해서 미리 알고 가지 않는 한 이 성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정상에 오르면 연암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 장마로 발목이 잡혀 머물렀던 압록강 너머의 통군정을 볼 수 있으나 나는 포기했다. 거리는 짧지만 정상 부분이 상당히 가팔라서 완주하면 진이 빠지는데 2009년에 모두 돌아보았고, 날이 더운데다 몸 상태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이 다녀올 동안 망루까지만 올라 느긋하게 감상을 하고 목이 마를 일행을 위해 오이를 준비했다. 

 

 

 

 

 

 

 

<압록강 중국쪽 지류인 애(라)하>

연암 일행이 압록강을 도강하기 전 머문 통군정을 (일행들은) 호산장성에 올라서 보고, 중국으로 넘어와 첫날 밤 야숙을 한 구련성 터를 보러 가는 중이다.

 

 

<연행사가 중국으로 넘어와 첫날 밤 야숙을 한 구련성 터>

구련성은 금나라가 고려를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 가에 잇달아 쌓은 9개의 토성이지만 연암이 다녀간 당시에도 토성은 흔적도 없었다. 연행단은 구련성 터 근처 강가에서 첫날 밤에 노숙을 했는데 호랑이를 쫓기 위해 밤에 교대로 일어나서 떼로 소리를 질렀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사행단의 숙소와 먹거리는 상대국이 제공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곳에서 노숙을 한 이유는 청(만주족)의 발상지라 봉금지대로 묶인 당시엔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의 구멍가게 앞에 최근에 세운 '구련성고성지'라는 표석이 남아있을 뿐이다.

 

 

 

<청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변문진(책문)>

청은 중국대륙 1800리 구간을 나무 울타리로 국경을 두르고 청으로 들어오는 17개의 관문을 두었는데, 청으로 들어가는 조선의 관문이 바로 변문이다. 변문은 연암 일행이 당도했을 당시 상당히 번화한 임시 시장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는 당시와 주변상황이 달라져 안내문만 보고 이곳이 변문진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먼저 답사한 지기님과 현지 안내인이 이 안내문을 보고 아니라고 해서 다시 찾는 중이다. 

 

 

<변문진 부근의 염소떼>

진짜 변문진은 이곳에서 가까운 다음 철로에서 마주 보이는 산쪽에 있었다. 변문진이라고 착각했던 이 철길 건널목에 염소떼가 나타났다. 목에 붉은 띠를 두른 대장 염소가 무리를 리드하는데 예민한 염소들, 그 중에서도 대장은 사진촬영을 하는 나를 끝까지 경계하며 힐끔거렸다. 걱정마, 난 염소고기 좋아하지 않아!

 

 

<진짜 변문진 터>

변문진은 오늘날의 국경 검문소(국경 초소)인데 울타리로 대충 막아서 조선인들은 '책문(柵門)'이라고 불렀다. 신영담(신춘호) 선생의 자료에 의하면 변문진은 사진의 산 아래쯤에 있었다고 한다. 압록강에서 한참 들어왔는데 이곳이 국경인 이유는 이 지역이 만주족 발상지라 봉금지대였기 때문이다.

 

봉황성 성장의 허락을 받은 관리가 문을 열어줘야 중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관리에게 바치는 선물에 따라 사신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고 한다. 연암 일행이 이곳을 통과할 때 선물이 변변치 않다고 실랑이가 벌어지자 경험이 많은 통역관이 '살위공법'으로 제압하여 통과했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상인들도 통상(무역)을 하러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 때마다 짐 수색을 했다고 한다. 열하일기에 연행단에 대한 검문 상황이 표현되어 있는데 신분이 낮은 하인이나 마부 같은 수행원의 경우 짐뿐 아니라 몸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지금은 '변문진'이란 표석 외엔 그  어떤 것도 옛날의 상황을 가늠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한국 관광객임을 눈치 챈 현지인이 바구니 가득 싱싱한 버섯을 가져와 박근혜대통령과 TV 출연을 들이대며 팔려고 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발등이 갈라지고 누추한 차림의 주민이 안쓰러웠지만 여정이 멀고 생음식을 반출할 수 없는 우리는 그 생버섯을 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