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4 - 봉황산(오룡산), 설리참, 통원보, 초하구, 연산관, 청석령

큰누리 2016. 9. 2. 19:30

<16. 8/1. 열하일기 따라가기 2일차 일정2>

07:30. 단동 월량도 베니스호텔 출발- 압록강단교- 압록강 보트 투어(쾌속정으로 압록강 복판에 있는 북한령 우적도와 강 건너 의주 통군정 주변을 둘러보는 50위안 옵션 관광)- 일보과- 호산장성- 구련성 터단동으로 되돌아와 해금강에서 시고 짠 냉면으로 점심식사- 압록강 지류인 애(라)하를 건너- 변문진(책문)- 오룡산(봉황산) - 설리참(설례참)통원보(시장에서 고량주 구매)- 초하구- 연산관- 청석령 정상에서 도로봉쇄로 차를 돌려 내려오는 길에 이민환열사 묘 참배- 고속도로로 요양으로 이동(이동 중 무지개, 용두모양 구름을 봄)- 요양 마마스쿡에서 삼겹살로 저녁식사- 요양빈관(호텔) 투숙.

   

봉황성 성장에게 역관을 통해 단자를 보내면 성장은 출입허가를 하고 변문이 열리게 된다. 봉황성부터는 '하정'이라 하여 청나라로부터 사행길에 소요되는 모든 물품, 음식을 공식적으로 지급 받게 된다.

 

 

<봉황산(오룡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머문 곳으로 연암이 삼각산을 닮았지만 삼각산만 못하다고 평한 산이다. 구름에 가려 정상 부분을 못 보고 입구의 대형 전광판에 랜덤으로 띄우는 봉황산 명소 사진을 보았지만 적어도 산 외형은 북한산이 훨씬 나았다. 이후에 들른 모든 산 입구에 이런 식으로 거대한 패방 비슷한 조형물이 있었다.

 

 

 

<설리참(설례참, 松站)>

설리참 주변의 넓은 평야, 산세, 하천 등이 대병력이 주둔하기에 적당하다고 하는데 버스로 이동하는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지형적인 잇점 때문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서 활약했고, 연암 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사행단이 봉황성을 들어선 후부터는 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청나라로부터 지급되니 북경(연경)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므로 일기만 좋다면 이런 작은 마을은 스치 듯 지나쳤을 것이다.

 

 

 

<통원보>

연행단은 6/29에 통원보에 도착했고,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사행단을 괴롭히던 비가 7/1, 폭우로 변해 하천이 막히자 정사 박명원은 이곳에 머물 것을 명한다. 연암은 이곳에서 5박 6일을 머물며 중국의 문화와 풍속을 경험한다.

1) 무료한 일행들은 투전판도 벌리고,

2) 낭랑한 목소리에 낚여 접근했다가 담배를 문 추한 만주 여인과 남자와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그녀의 딸의 행동을 보고 식겁하고,

3) 남의 밭에 들어간 돼지를 총으로 잡아 끌고 온 밭주인에게 돼지 주인은 쩔쩔매고 밭주인은 잡은 돼지를 당당하게 끌고 가는 문화적 차이에 놀라고,

4) 연행단 숙소를 순찰하는 청나라 군졸을 도둑으로 오인하여 소동을 벌이는 와중에 군졸이 자신을 '도이놈(되놈)'이라 자칭해 배꼽을 잡고 웃는 일화가 이곳에서 벌어진다.

 

 

<통원보의 삼발이 택시>

현대적인 택시도 있긴 하지만 빨간 이 삼발이 택시가 더 많았다. 우리가 지나친 북쪽 도시에 아래와 비슷한 모양의 세 바퀴 탈 것이 많아 신기했다.

 

 

 

<통원보시장의 참나무 애벌레>

번데기 같지만 살아 꿈틀거리는 어른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애벌레이고, 상당히 비싼 식재료이다. 우리 식탁에도 현지 가이드가 따로 비용을 내고 익힌 애벌레를 한 접시 시켰지만 나와 남자들 몇 분만 호기심으로 맛을 보고 거의 그대로 남았다. 바삭하기만 하고 별맛은 없는 전갈튀김보다는 부드럽고 약간 고소했지만 두 번은 도저히 용기가 안 나는 비주얼이라 한 마리로 끝!

 

 

<통원보시장의 과일가게>

특이하게 익은 꽈리를 많이 파는데 현지인에게 인기가 있고, 값도 비싸다고 한다. 상인이 건네주는 꽈리 1알을 받아먹으니 약간 시큼하면서 달달했다. 중국인들이 과일처럼 먹는 꽈리를 어려서 기침(천식)에 좋다고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통원보시장 안>

현지 안내인이 술이 당긴다며 일행을 데려간 술집이 있는 시장 안이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이랑 비슷하지만 생고기를 그냥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점이 달랐다.

 

 

 

<통원보시장 안의 술집>

항아리에서 술을 퍼주기 때문에 빈 음료수병을 들고 가야 술을 사는데 나는 빈병이 없어서 술을 사지 못하고 시음만 했다. 사려고 마음 먹었다면 못 샀을까만은 그동안 중국에서 산 술의 진품 여부가 항상 미씸쩍었기 때문에 굳이 애쓰지 않은 것이다. 가격, 도수 모두 천차만별이고 술 이름은 십리향, 천리향 등이었다.

 

향기를 암시하는 술 이름은 맞았다. 열하(승덕)에서 밤에 강희대전 공연을 볼 때 일행 한 분이 이곳에서 구입한 술을 나눠주다가 술을 조금 흘렸는데 야외공연장에 술내음이 진동했다. 십리까지는 아니어도 고량주 특유의 향기가 객석에 진동해 민망할 지경이었다. 웃통을 벗은 금복주 닮은 주인은 촬영하라며 포즈까지 취해주었다.

 

 

<통원보시장>

 

 

<통원보역>

설리참, 통원보, 초하구, 연산관은 당시랑 상황이 너무 달라져서 역이나 표석을 확인하고 촬영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초하구와 초하구역>

 

 

 

<연산관>

윗사진은 이곳이 (당시와 달라져) 연산관임을 확인하기 위해 연산관역으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가로수로 심은 개오동나무의 연노랑꽃이 예뻤다. 1636년 청 황제 즉위식에 사신으로 참석했던 나덕현, 이곽이 배례를 거부하고 청 황제의 국서를 이곳에 버리고 입국하여 병자호란의 빌미를 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헛갈렸던 코스가 바로 이 지점(회령령/마운령)과 일야구도하가 발생한 조하 고북구장성이었다. 두 곳 모두 들르지 않고 지나쳤는데 개발로 인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들은 것 같다.

 

연산관을 지나 이어지는 코스인 회령령(마운령)은 한중연행노정답사회 자료에 의하면 연행노정 중 청석령과 더불어 가장 험한 코스라고 한다. 그런데 건물 사이를 버스로 스치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고, 여러 이유로 고속도로로 들어서면 연행 코스에서 이탈하기 때문에 더더욱 헛갈렸다. 어쨌거나 회령령(마운령)은 내 기억에 없다. 일야구도하가 일어난 조하는 댐인가 저수지로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사전 강연에서 들었는데,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아 위치 파악도 못했다.

   

 

<청석령 입구>

차량출입을 통제했지만 우리는 행여나 싶어 차단선을 무시하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민가 몇 채가 옥수수밭 틈으로 보이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올라가는구나' 하는 사이에 산 정상에 다다랐다. 차로 가면 무난한 이 고개가 당시엔 험했던지 연행 시 가끔 낙마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청석령이란 이름은 이 고개에서 나는 청석으로 만든 벼루가 유명해서이고, 관에서 청석을 얻기 위해 일부러 인원을 파견했을 정도라고 한다. 

 

병자호란 후 18세의 나이에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던 봉림대군(훗날 효종)은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청석령을 넘으며 아래의 시를 읊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인질로서 당당하게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의 선진문물과 시세에 적응했던 봉림대군의 형 소현세자는 어떤 시를 읊었을까? 역사에 'if'는 통하지 않지만 깨인 시각으로 고생 끝에 인질에서 풀려 돌아온 소현세자가 아버지(인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음우호풍곡(陰雨胡風曲)>

청석령 지났느냐, 초하구가 어드메뇨.

호풍은 차도 찰사 궂은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 님 계신 데 보낼까 하노라.

 

 

 

<청석령을 향해 오르는 중>

 

 

<막힌 청석령 정상과 염소떼>

버스가 흙더미를 넘을 수 없어 우리는 여기에서 차를 돌려 고속도로로 요양에 가기로 했다. 더 나가면 어떤 상황이 기다릴지 예측할 수 없는데 날이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인 버스로도 우리가 넘지 못한 고개 정상을 염소떼는 주인도 없이 스스로 잘 넘어가는 중이다.

 

 

 

<막힌 정상에서 본 우리 일행과 버스>

 

 

<청석령 정상의 개쉬땅나무>

 

 

<청석령을 돌아나오는 길에 들른 이민환열사 묘>

1913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한 이민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1사 참모장은 1932년부터 무장항일투쟁에 나서 1933년 농민자위대를 창건한 뒤 이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재편했다. 1935년 만주국 치안대를 습격해 섬멸하고 경찰서까지 공격, 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지만 1936년 일본군과 마천령에서 맞서 싸우다 23세로 전사했다. 열사는 2015년 중국에 의해 1920~40년대 만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600명의 항일열사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2015.08.25.한국일보에서 퍼옴-- 

 

 

<요양행 고속도로에서 본 바깥 풍경>

우리가 회차하지 않았다면 저 산속을 통과했을까? 일행 중 한분이 용머리 모양이라며 흥분한 석양도 보고, 차창 뒤로 나타난 무지개도 보면서 3시간 여를 달려 밤에 요양에 도착했다.

 

 

<요양의 한국요리전문점 마마스쿡에서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구이>

시원한 맥주 한잔을 곁들여 먹는 삼겹살구이가 맛있긴 했지만, 석쇠에 구우니 연기 때문에 어찌나 번거롭고 부잡스럽던지 정신이 없었다. 맛은 덜하더라도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차라리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째 숙소인 요양빈관(요양호텔)>

이사 때문에 답사지 사전공부를 제대로 못한 나는 틈틈이 다음 날 갈 곳을 숙소나 이동하는 버스에서 훑으며 겨우 따라 붙었다.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져도 호텔에서 씻으면 잠이 십리 밖으로 달아나서 그럴 때는 아예 당일에 본 곳을 되짚어 보거나 내일 볼 곳을 미리 확인했다. 이번 여행은 기상 시각이 들쭉날쭉 했는데 대체로 아침 7시나 7시 30분에 버스에 탑승했다. 마지막 날 아침, 북경에 입성할 때는 지방 버스에 대한 제한 때문에 05:30에 호텔에서 싸준 부실한 샌드위치와 찐계란, 물 1병을 들고 출발했다.

 

이 호텔이 가장 좋았던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우리 방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반대쪽 방에 묵은 일행들이 실루엣 요양백탑을 창문 너머로 보며 눈을 뜬 것이다.

나는 새벽부터 단톡으로 쏘아대는 부지런한 일행의 요양백탑 사진 전송 소리에 잠이 깨어 비상구 쪽 창을 전세 내고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의 저자인 중앙일보 최정동 기자가 민가로 뛰어들어 사정사정하며 얻은 요양백탑 사진(실루엣이지만)을 쉽게 얻었다. 이 호텔에서의 요양백탑, 광우사 전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