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5 - 요양백탑과 광우사, 관제묘, 동경성 천우문, 십리하

큰누리 2016. 9. 3. 23:58

<16. 8/2. 열하일기 따라가기 3일차 일정1>

요양호텔에서 조식 - 호텔 맞은편의 요양백탑, 광우사 - 관제묘를 찾아 헤매다 1시간 후 관제묘 외관 관람 - 동경성(요동성) 터 천우문 - 요동벌판을 가다 십리하시장 간판으로 십리하 위치 확인 - 다시 요동벌판을 달려 심양 백탑보 - 혼하강을 건너 심양 진입 - 심양고궁 - 실승사(황사) - 실승사 앞 전시장에서 유명도요 작품인 백자, 채색 불상 관람 - 현지식으로 저녁 - 심양 동방은좌호텔 투숙

 

 

어제 촬영한 사진과 요양백탑 사진을 보내는 단체 카톡 소리에 새벽에 잠에서 깨었다. 혹시나 하고 커텐을 젖혔으나 우리 방에서는 이웃 건물만 보여 복도로 나가 반대편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으니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넓은 통유리로 너머로 아침햇살을 등진 요양백탑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지저분하고 흠집이 있는 유리가 거슬렸지만 고층건물(?)을 수평높이에서 촬영할 수 있으니 이게 웬 떡인가!

 

'군인의 날'이라 단체로 숙박한 군인단체관광객에 치이고, 새치기를 당해가며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아침을 먹었다. 연두부, 찐계란이 있어서 그럭저럭 아침을 때웠지만 인파에다 홀은 없고 작은방으로 음식을 덜어다 먹는 구조 때문에 정신이 사나웠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길 건너 호텔 맞은편의 백탑으로 갔다. 백탑이 높은 것은 맞는데 바로 아래에서 보자니 규모가 실감이 안 난다. 얼핏 보면 8면에 똑같은 환조 형태의 불상을 감실에 안치하고, 좌우에서 부조 형태의 보살이 협시하는 것 같지만 협시보살의 팔 동작이 달랐다. 아래에서 보면 하얀 탑신 1층에, 그 위로 재색의 옥개만 층층이 보여 탑의 규모나 백탑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나마 보이는 흰색도 공해 때문에 퇴색해서 백탑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다행히 조각들의 상태는 괜찮았고 탑도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같은 8각이지만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아기자기한 우리나라의 원각사지 석탑이나 경천사지 13층 석탑과 전혀 달랐다. 이후에 본 여러 백탑들도 요양백탑과 형태가 비슷했다.

 

연암은 '요동은 왼편에 창해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 아무 거칠 것이 없이 천리가 아득히 트였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로 된 북 세 개를 설치하고 층마다 추녀 네 귀퉁이 모서리에 물통만한 풍경을 달아서 바람이 불면 풍경소리가 요동을 진동한다'고 했다.

당시에 넓은 요동벌을 건너와 처음 만나는 높은 건물이어서 사행단들에게는 특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층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지금의 요양에서는 풍경소리는 커녕 백탑도 아닌 거무스름한 좀 높고 오래된 탑일 뿐이었다. 책에서 접한 요양백탑의 이미지에 훨씬 못 미치는 약간 실망스런 마음으로 백탑 소속 사찰인 광우사로 향했다.

 

 

<요양호텔 4층 유리 너머로 촬영한 요양백탑>

이곳에서 요양백탑을 보지 않았다면 '요양백탑이 아름답다, 장대하다'는 말에 공감을 못했을 것이다. 역광이라 세부 확인은 어렵지만 실루엣으로 보이는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오른쪽 건물은 요양백탑 소속 사찰인 광우사이다. 두번째 사진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파노라마 사진.

 

 

 

<윗 사진보다 1시간 20분 뒤에 일행의 방에서 촬영한 요양백탑>

 

 

<요양빈관(요양호텔) 조식>

내가 호텔에서 찐 계란을 두 개씩이나 챙겼다는 것은 그 만큼 먹을 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다. 새치기하고, 시끄럽고, 담배 냄새로 찌든 퇴역군인들과 어울려 좁은 방에서 (일행들이 챙겨주긴 했지만) 빈 자리를 찾아 먹어야 했다.

 

 

<요양백탑>

백탑은 외벽을 하얗게 칠한 불탑의 총칭으로 남북조시대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그 후에도 각 시대에서 사용하였으며 중국 각지에 있다. 요양백탑은 랴오닝성 요양의 현성 서문 밖에 있는 8각 13층의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기단의 1변 10여m, 높이 71m로 처음 금나라의 정안사 또는 수경니사 터로 금나라 세종(1161-1189) 때 개축했다. 현재는 명, 청대에 세운 광우사에 속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퍼옴--

 

 

<요양백탑>

 

 

<요양백탑을 접근해서 본 모습>

불상 위쪽에 쓰인 "流光碧漢'은 '푸르게 흐르는 빛의 강'이란 뜻으로 은하수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그 글자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천리경을 빌려주는 장사치도 있었다고 한다.

 

 

 

<요양백탑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모습>

현지에서 8면을 돌아보며 촬영 했으나 당시엔 워낙 높아서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려워 각 면의 차이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협시한 보살의 손 동작과 기단석에 자란 나무, 빛의 방향 등으로 겨우 구분했다.

 

 

 

 

 

 

<세계 최대 규모인 광우사 청석패방과 요양백탑, 광우사>

패방은 광우사를 신축하거나 개축할 때(명, 청대)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대 규모의 패방이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어찌나 큰지 어지간한 거리에서는 전체가 화각에 들어오지 않는다.

 

중국의 유적을 처음 봤을 때에는 사실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조각이나 건축이 흥미로웠지만 이제는 틀에 박힌, 크기로 밀어부치는 거대한 조형물을 보면 부담스럽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세계 최초, 세계 제일'도 같은 맥락이겠지만, 적어도 크기 만큼은 절대 중국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광우사에 그런 건축, 조형물이 상당히 많다. 이 패방을 비롯하여 대웅보전과 현판, 그 안의 본존불 등...

 

 

 

<광우사 앞의 조형물 '마차출행'>

이 조형물과 짝을 이룬 '무학신선' 조형물은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린 표정이 더 극적이다.

 

 

<광우사 천왕전>

 

 

<광우사 천왕전의 미륵보살>

반나신의 이 양반이 (금복주 모델이 아니고) 미륵보살이라고? 내 기억에 의하면 조보광불인데... 설명에 분명히 양쪽의 사천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렇다고 써 있다(내가 착각한 듯).

 

 

<광우사 본전인 대웅보전과 현판>

현판이 어마어마하다. 이 정도면 중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장대한 규모의 사찰이다.

 

 

 

<광우사 대웅보전>

불상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하단에 선 사람과 비교하면 크기가 짐작이 된다. 삼면에 사천왕과 그 수준의 불상들이 도열해 있다.

 

 

 

 

<광우사 대웅보전 후면>

대웅보전 본존불 뒤에 봉안된 화려한 불상군이다.

 

 

<관제묘를 찾아 헤매다 밖에서 본 광우사>

왼쪽부터 차례로 천왕전, 백탑, 왕생전, 대웅보전이다. 

 

 

<관제묘를 찾아 헤매다 본 광우사 옆 골목 풍경>

오른쪽에 광우사, 왼쪽에 냇가가 있고 주민들로 보이는 이들이 물건 몇 가지를 들고 나와 팔거나 이발소, 안마, 솜 틀기 등을 하고 있다. 관제묘 위치를 착각한 지기님의 착오로 헤맨 이런 상황이 여행의 묘미이다. 쫓기 듯 하나라도 더 보는 것보다 느긋한 이 시간이 좋았다. 내를 건너 허름한 아파트도 보고, 좁은 골목을 끼고 늘어선 허름한 민가와 그 주변에 활짝 핀 호박꽃과 접시꽃도 보았다.

 

 

 

 

 

<광우사 옆 골목의 안마사, 이발소, 솜 틀기>

추억 당긴다!

 

 

 

 

<요양 관제묘 입구>

30여분을 헤매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찾은 요양 관제묘 입구에 있던 대형 쇼핑센터에 걸린 한류스타 송중기 사진이다.

 

 

<요양 관제묘>

징그럽게 뜨거운 날이었지만 옆에 냇가를 낀 이곳은 그 나마 좀 나았다. 지기님의 착오로 어렵게 찾은 관제묘는 공사 중이었고,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 촬영조차 어려웠다. 맞은편에 있는 상가 2층에 올라 촬영한 것. 

 

 

<요양 동경성 천우문>

요녕성의 동북지역은 여진족과 만주족의 주무대였고, 한 때는 고구려가 지배했던 지역이다. 그 중심도시인 요양을 1621년에 장악한 후금의 누르하치는 심양에서 요양으로 천도한 후 요동성을 놓아두고 동경성을 새로 쌓는다. 후금이 요동을 장악한 후 천하의 대세는 명에서 후금으로 기울고, 후금은 청으로 국명을 바꾼다.

 

동경성은 사라지고 천우문만 남아있으나 복원공사를 하려는지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는 중이었다. 현재의 천우문도 자료를 보니 거의 폐허가 된 것을 현대에 복원한 것이었다.

 

두번째 사진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오래 전부터 안의 가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진입로의 비포장도로에 고인 썩은 물에서 나는 곰삭은 시궁창 냄새는 신발에 묻어 버스까지 따라와서 악취를 풍겼다.

 

 

 

<천우문과 노부부가 가꾼 백일홍, 옥수수 밭>

몸도 성치 않아 보이는 분들이 예쁘게 천우문을 둘러 화단을 가꾸었다. 평상 시에는 천우문을 두른 담장 울타리의 문을 잠구었다가 관람자가 연락을 하면 열어준다. 왼쪽의 아치가 천우문이고 담장처럼 보이는 것은 누각 아래 부분이다.

 

 

<천우문 아래에 있는 전시실>

전시물들의 상황이 좋지 않고 낡았지만 상당히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여진족과 관련된 역사와 자료들, 요양지역 소사, 동경성 배치도, 천우문과 동경성에 관한 자료, 팔기군의 깃발 사진도 있었다. 유적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낡은 자료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 요동지역과 동경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요동벌판 속의 십리하>

다른 도시와 달리 이곳은 낡은 단층 건물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한산했다. 이곳이 십리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중앙의 노란 삼각형 벽면 안에 '十里河綜合市場'이라 쓰인 글귀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오른쪽 건물 벽에 붙은 '십리하공관사'인가 하는 글 중에서 '十'자는 떨어져 나가고 없다.

 

끝없이 펼쳐진 요동벌판을 지나는 당시의 연행단에겐 (당시에 민가가 있었다면) 그나마 물 한 바가지라도 얻어 마실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십리하 시장 앞의 수레를 끄는 말>

시장 맞은편에 서 있던 수레를 끄는 말이다. 촬영을 하다가 수레에 탄 두 명의 노파에게 촬영하지 말라는 제지를 받았다. 요동지역에서 종종 수레를 끄는 말이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