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7 - 초기 청나라 황궁 심양고궁(성경황궁)

큰누리 2016. 9. 8. 23:50

심양고궁은 답사 3일차인 8/2. 요양에서 심양으로 이동한 후 백탑보공원의 백탑에 이어 두번째로 들렀다. 고궁을 먼저 보고 실승사(황사)에 들렀으나 사진 분량이 많아 3일차 맨 마지막으로 내용을 돌렸다.

 

 

<심양고궁(성경황궁)>

심양고궁은 초대 칸(汗) 청태조(누르하치)가 동경에서 심양 중위성으로 도성을 옮긴 후 대정전과 십왕정을 지으면서 후금의 황궁이 되었다. 1626년 2대 청태종(황타이지, 황태극)이 칸을 계승하고 황궁을 정비한 후,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이곳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3대 성종(순치제)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북경으로 천도한 후로는 황제가 동북지역을 순회할 때 머무는 행궁이 되었다.

 

심양고궁은 자금성의 1/12 크기로 한족, 몽고족, 만주족의 양식이 혼합된 궁궐이다. 내부는 동원(동로), 중원(중로), 서원(서로)으로 나뉘며, 90개의 건물과 20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을 둘러싼 외궁이 있었으나 무너졌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동원에는 황제와 팔기군 수장들이 정사를 논하던 대정전이 있고, 대정전 앞 좌우에 두 채의 왕정과 팔기군의 정자가 있는데 이를 합쳐 십왕정이라고 한다. 중원에는 심양고궁의 정문인 대청문에 이어 남에서 북으로 숭정전-봉황루-청녕궁이 늘어서 있고, 좌우에 동소, 서소가 있다. 서원에는 건륭제 때 지은 사고전서가 수장된 문소각이 있으나 나는 시간에 쫓겨 들르지 못했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연암의 심양고궁에 대한 글은 다음과 같다. '편액에 숭정전이라 하였고, 정대광명전이란 편액도 붙어있다. 왼편은 비룡각, 오른편은 상봉각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처마의 높은 누각인 봉황루가, 그 좌우에 곁문이 있다. 곁문 안에는 군관 수십명이 길을 막고 있다.

멀리 문 밖에서 바라보니 높은 누각 겹전과 겹겹이 둘러싸인 회랑들이 모두 오색찬란한 기와로 지붕을 이루었다. 이층팔각집을 대정전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 신우궁이란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황제의 어필로 昭格, 옹정황제의 어필로 玉虛眞帝라 써 붙였다.'

 

 

<심양고궁>

대정전과 십왕정이 있는 동원(동로)의 정문이다. 자금성처럼 붉은 벽과 황, 녹의 유리기와를 주로 사용했고, 거대한 자금성에 비해 아기자기하고 밀도가 있다.

 

 

<동원(동로)에서 중원(중로)으로 가는 길에 있는 패방>

중원의 문이자 심양고궁의 정문인 대청문 앞 양쪽에 화려한 패방이 서 있다.

 

 

<심양고궁 대청문>

중원(중로)의 정문이다. 이번 답사에서 자연으로는 고북구장성이, 인위적인 건축물로는 심양고궁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성에 비해 심양고궁은 1/12 크기의 작은 궁이지만 그 오밀조밀함이 사람으로 치면 사랑스러운 막내딸이나 첩 같았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기둥과 계단 장식, 지붕의 조각들이 같은 만주족이 중국을 통일한 후 지은 거대한 자금성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규모는 작고 단순하지만 조각과 건축장식은 정말 탁월했다. 

 

 

<심양고궁 배치도>

 

 

<심양고궁 숭정전>

중원의 정전으로 황제와 대신들이 조회, 연회를 할 때 사용되었다. 청태종(홍타이지)의 집무실로 주로 이용되었으며, 건물 앞뒤로 돌계단이 3개씩 있는데 중앙계단의 석수조각이 일품이다. 심양고궁은 청태조(누르하치), 청태종(홍타이지) 등 초기의 황제들이 건립하여 사용하다 북경으로 천도했으므로 처음 지은 동원의 대정전은 청태조가, 중원의 주요 건물은 청태종이 증축하면서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정전은 보수공사 중이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중원의 전각(숭정전, 청녕궁 등)에는 청태종과 그에 관련된 유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숭정전 계단의 돌 조각>

크기는 귀엽다 싶을 정도로 작지만 조각상이 빼어나고 생동감이 넘쳐서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숭정전 내부의 옥좌>

심양고궁에는 용 조각이 많은데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열하일기에도 표현된 '정대광명' 편액 뒤에는 청태종 이후에 황위를 놓고 골육상쟁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가 살아 생전에 (장자 세습이 아니라) 능력있는 차기 황제(황태자)의 이름을 적어 넣어두었다.

 

 

<중원에서 동원으로 이어지는 문>

문 기둥 장식이 아름답다.

 

 

<동원(동로)의 정전인 대정전>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곳으로 황제 즉위식이나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던 곳이며 , 청태조 누르하치가 심양고궁에서 가장 먼저 건립했다. 16개의 기둥에 유리지붕을 얹은 팔각형의 전각으로 이동식 텐트를 본떠 지은 만주족의 특징이 잘 반영된 건물이다. 대정전 앞의 10개의 전각(십왕정) 중 2채는 좌, 우익왕의 집무실이고, 나머지 8채는 팔기군을 위한 전각으로 궁궐 속에 당당히 자리한 십왕정은 북방기마민족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팔기군은 여진족의 사냥조직을 군사적으로 재편한 것으로 평소에는 팔기군에 소속되어 농사나 목축 등 일상에 종사하던 장정들이 전시에는 곧바로 군대로 전환하여 전투를 수행했으므로 후금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내부는 그럭저럭 보았지만 보수공사 중이라 기둥을 휘감고 있는 용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정전 내부>

 

 

<심양고궁 후원>

 

 

<청녕궁 쪽에서 본 외성과 후원>

 

 

<청녕궁 지붕의 아름다운 기와 장식>

 

 

-청녕궁-

청녕궁 일원은 황제, 황후의 처소로 심양고궁에서 가장 높은 대 위에 세워졌다. 전방 좌우의 인지궁, 관추궁, 연경궁, 수복궁, 동배전, 서배전은 주로 황후나 귀비 등 황족의 처소였다.

 

 

<청녕궁 내부>

황제의 처소치고 상당히 검소하다. 3면을 둘러 마루 같은 공간이 있고, 그 위에 보료, 화로들이 놓여 있으며 문갑 같은 나무장이 놓여있을 뿐이다. 구조로 보아 병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벽도 장식이나 채색이 없는 아주 단순한 공간이다.

 

 

<청녕궁의 청태종(홍타이지, 황태극) 초상화>

1626년 후금의 초대 칸 청태조(누르하치)가 명과의 영원성 전투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우여곡절 끝에 뒤를 잇는데 그가 바로 2대 청태종으로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청태종은 정묘호란 당시 우리에게 치욕을 안겼지만 군사를 개혁해 팔기군을 조직하고, 명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관직을 개편했으며 농공업을 장려하여 경제를 부흥시키는 등 만주족이 중국을 정벌할 수 있도록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청나라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는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심양고성(성경황궁)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청녕궁 구역 관추궁 내부에 걸린 해란주(민혜공화원비) 초상화>

전형적인 동양여인의 모습을 한 이 여인은 청태종이 많은 처첩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해란주이다. 중국의 황궁에서 여성 초상화를 본다는 자체가 신기해서 초상화와 안내문을 유심히 보았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볼수록 이끌리는 단아한 인상이다.

 

만주족, 여진족은 일부다처제 사회였기 때문에 황제도 여러 명의 정실부인(정복진)을 둘 수 있었는데 정복진 중 으뜸을 대복진이라 했다. 몽고족의 일족인 대복진 철철이 아들을 못 낳자 차기 대권에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한 철철의 오빠는 자신의 딸 포목포태를 측복진(후궁)으로 보냈지만 딸만 낳았다. 다시 큰딸인 해란주를 측복진으로 보냈는데 청태종은 그녀를 지극히 총애했고 아들까지 낳았다.

여러 아들을 물리치고 낳자마자 황태자로 봉해진 해란주의 아들이 2살에 죽고 해란주마저 이어 병으로 죽자 청태종은 애통해 하다 몇 년 뒤에 죽었다. 그 와중에 낳은 해란주의 동생 포목포태의 어린 아들은 우여곡절 끝에 다른 비나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을 재치고 황위를 이어 받아 순치제가 되었다. 포목포태의 후손들은 이후 강희제-옹정제로 이어졌다.

 

우리 역사의 숙종과 장희빈과 인현왕후, 딸 둘을 두 명의 왕에게 시집 보낸 한명회, 고려의 천추태후와 김치양, 포목포태와 도르곤 등이 오버랩되었다. '해란주'를 검색하자 두 사람의 사랑을 소재로 한 중화TV의 드라마 <산하련(원제 : 미인무루)>에 대한 내용이 줄줄이 떴다. 고모(제1 정실부인인 철철)와 두 조카(포목포태와 해란주), 두 자매(포목포태와 해란주)가 한 명의 황제를 남편으로 모셨으니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청태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해란주(민혜공화원비)의 처소, 관추궁>

아기 요람으로 보이는 그네가 인상적이다. 그네 밑에는 고양이 모양의 인형 1쌍이 있고, 그 옆에는 커텐으로 둘러싸인 침대가 있다.

 

 

 

<심양고궁 외성>

앞의 담장은 청녕궁 구역이고 뒤의 담장이 외성이다.

 

 

<청녕궁 봉황루에서 본 숭정전 뒷 모습>

 

 

<청녕궁 문루인 봉황루>

봉황루는 당시에 심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청녕궁을 건립한 청태종(홍타이지)은 이곳에서 연회나 의식을 치렀다.

 

 

<숭정전 처마의 이무기 조각>

 

 

<심양고궁 서소 적광전의 지붕>

적광전은 건륭11년~13년(1746~1748)에 건립한 건물로 건륭제가 순시를 하러 성경(심양)에 들렀을 때 군사들을 집결시키던 곳이다.

 

 

<심양고궁 서소 적광전 내부>

 

 

<심양고궁 서소>

 

 

<심양고궁 서소 정방(淨房)>

건륭11년~13년(1746~1748)에 건립한 황제의 화장실이다. 놓여 있는 기구는 매우 틀(왕이 용변을 보는 곳) 같다.

 

 

<심양고궁 보극궁과 내부>

건륭11년~13년(1746~1748)에 건립한 건물로 동쪽은 황제의 침실이고, 서쪽은 황제가 독서를 하거나 대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심양고궁 서소 계사제, 숭모각>

계사제는 건륭11년~13년(1746~1748)에 건립한 건물로 황제가 이곳을 순찰할 때 동행한 비들의 침실이었다. 숭모각 역시 계사제, 보극궁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으며 청나라 실록을 보관한 곳이다. 오른쪽 앞의 파도 같은 지붕을 한 계사제는 지붕의 곡선만으로도 여성들의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비들의 침실인 계사제 내부의 모습>

 

 

<심양고궁 서소>

황제와 황후, 후궁, 가족들의 처소가 모여있는 서소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주변에 중요한 붉은 전각들이 있는데 모여있는데 가림막 같은 담장만 있어서 한숨 돌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심양고궁 외곽의 정자>

바깥에 외성이 있고, 앞에 괴석들이 늘어선 곳이다. 자금성으로 따지면 북쪽 끝의 어화원(후원)과 신무문 쯤에 해당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