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8 - 영안교, 광녕성(이성량 패루), 숭흥사 쌍탑

큰누리 2016. 9. 11. 17:00

<16. 8/4. 열하일기 따라가기 4일차 일정1>

심양 동방은좌국제호텔- 영안(석)교- 요동평원을 달리며- 한강 하류처럼 강폭이 넓은 넓은 거류하(요하)를 버스에서 내려서 보고- 신민- 소흑산 가는 평원에서 내려 수박을 사 먹고- 중간에 화장실 대신 옥수수밭에서 용무를 본 후- 북진 도착- 광녕성 성문(북진고루)- 이성량 패루- 북진 초급반점에서 현지식- 숭흥사 쌍탑- 북진묘- 의무려산- 십삼산을 스치며- 금주 금쾌자에서 현지식- 금주 금하호텔 투숙

 

 

<심양 동방은좌호텔의 조식>

입에 맞는 음식이 슬슬 줄어들고 메뉴가 빈약해지는 중이다. 빵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나마 주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슴슴한 팥죽과 삶은 계란 뿐이었다.

 

 

<객실에서 내려다 본 심양시>

 

 

<영안(석)교>

청태종 재위기인 1641년에 당시 뻘이었던 이곳을 황제가 편하게 지나기 위해 세운 다리라고 한다. 심양시 외곽 영안촌 포하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37m, 너비 14.5m, 3개의 홍예 수로로 된 석교이다영원히 편한 다리라는 의미의 영안교는 다리 양쪽 끝의 4쌍의 석수와 난간의 조각들이 아름답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이 바닥돌을 빼다 써서 남아있던 돌을 대충 맞추거나 시멘트로 보수하며 복원했기 때문에 돌의 색깔이 다르다조각 보자기 같기도 하고, 일제가 해체했다가 제대로 원상복구를 하지 못한 석굴암이 연상되기도 했다. 청나라의 발상지에 건축한 다리이고 황제 통행로라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현재 옆에 새로 다리를 만들어 통행하고 영안교는 폐쇄했다.

 

연암 일행은 1780년 7월 12일 심양을 출발해 영안교를 지나 고가자에서 숙박했다.

 

 

<영안(석)교의 비석>

이수 뒷면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御'는 확인했는데 나머지 글자는 분별이 어려웠다. 현지 가이드가 비문에 물을 뿌린 후 비석을 만든 사람 이름이라고 했지만 화려한 이수로 보아 황제와 관련된 내용일 거라 추측했다. 다리 난간이나 바닥돌의 색깔이 다르지만 양쪽 끝에 있는 석상, 난간의 조각이 품격 있다.

 

통행을 못하게 막아놓았지만 다리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수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예쁘지만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비석의 이수도 뒤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요동벌판>

영안교에서 거류하, 신민, 소흑산을 거쳐 북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요동평야가 펼쳐진다. 도시를 포함해 영역을 더 넓게 잡으면 요양부터 산해관까지 일천 이백리에 걸친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연암이 '아,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 하구나'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왜 나는 광야라는 생각이 안 드는지 의아했다.

 

요양 부근의 평야는 청석령이 막혀 고속도로로 가느라 건너뛰었고, 나머지 구간은 최대 3겹까지 심어진 백양나무 가로수가 시야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버스에서 촘촘한 가로수 사이로 옥수수 밭을 계속 스쳐 지나고, 간간이 뚫린 공간에는 휴지조각 같은 민가 한 두 채나 고압선 철탑이 보였다. 최근에는 흑룡강 주변의 대전과 더불어 가장 큰 요하 유전에 유전을 채취하는 시설이 들어서 요동이 광야라는 사실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거류하橋>

거류하는 요하의 지류이며 요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나뉜다. 강 폭이 한강 하류처럼 넓어서 다리 길이가 1950m나 된다. 이곳에서 잠시 내려 다리와 주변을 촬영했다.

 

 

 

<거류하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신민(둔)역>

신민은 요하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도시로 청이 수도인 심양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상당히 큰 전략적인 군사도시였다. 우리는 차창으로 스치며 지났다.

 

연암은 신민둔의 전당포 주인에게 주련과 문에 달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글을 써 준다. 그런데 이 글을 받고 마뜩치 않아 하는 주인의 태도에 의아해 하며 그곳을 뜬다. 다음날 소흑산의 국수가게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심지가 서리나 눈처럼 깨끗하고 밝다'는 의미의 기상새설이 아니라 '(국수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하얗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국수가게를 가리키는 말이란 것을 알게 된다.

 

 

<신민, 소흑산을 지나면서 수박을 사 먹은 곳> 

왼쪽은 이번 답사에서 가로수로 가장 많이 본 백양나무, 오른쪽의 키가 작은 나무는 열매가 성화를 닮은 봉화나무이다. 연암 일행이 신민둔을 지나 백기보의 숙소로 가던 중 이 부근에서 늙고 교활한 참외장수에게 속아 거금을 뜯기고 참외를 산다.

 

오른쪽 앞에 보이는 텐트 노점상에서 우리 일행은 참외가 아니라 겉이 노란 수박과 진녹색 수박을 한통씩 사 먹었다. 노란 수박은 속이 빨갛고 우리가 아는 단 수박맛이었고, 진녹색 수박은 속이 노랗고 약간 상큼한 맛이었다.

 

 

<북진 진입>

연암은 8월 14일 밤에 신광녕에 도착했고 도중에 일행을 이탈하여 20리 떨어진 북진묘를 둘러보았다. 열하일기에는 (광녕)성이 의무려산 아래쪽에 있으며, 성 앞의 탁 트인 곳에 큰 강이 흐른다고 기록했다. 며칠을 걸어서 긴 요동평야를 건넌 후 눈앞에 펼쳐진 의무려산을 본 연행단에게 이 산은 각별했을 것이다.

 

 

<북진 광녕성(북진고루)>

광녕(현재 북녕)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로 순무와 총병의 지휘 아래 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했다. 성문 앞쪽의 현판에 있는 유주중진(幽州重鎭)이란 글은 '유주의 두터운  진지'란 뜻이다. 현재 성은 사라지고 이 고루(점장대)만 남아있다. 사진들은 북진고루 3면의 모습이다.

 

 

 

 

<광녕성 이성량패루>

북진고루와 일직선으로 광녕성 복판에 이성량패루가 있다. 산해관 북쪽의 가장 아름다운 패루로, 연행단은 이성량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총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의 부친이었기 때문에 들렀을 것이다.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인 후손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은 명나라 역사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요동을 관할하는 최고사령관인 요동총벌을 역임하면서 군사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실권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패루는 1580년 여진족을 물리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명나라 만력제의 지시로 건립되었다.

 

당시 누르하치(훗날의 청태조)의 조부와 부친은 여진족 부족장으로 이성량의 휘하에 있었고, 누르하치는 볼모로 잡혀있었다. 1582년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누르하치 조부와 부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성량은 진압군으로 종군한 둘을 다른 여진족 족장을 시켜 죽여버렸다. 혹은 여진족 반란군에 참여해 포로로 잡혀와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에게는 무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다.

그 때문인지 명나라 멸망 후 당시 요동의 방어선이었던 광녕성은 점장대(북진고루)만 남은 채 파괴되었지만 이성량패루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이성량의 장남인 이여송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 총사령관으로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참전했고,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도 참전했다.

 

 

<이성량패루를 광녕성(북진고루) 쪽에서 본 모습>

복원공사를 하는지 주변을 파헤쳐 어수선하다.

 

 

<이성량패루와 광녕성 성문(북진고루)>

 

 

<광녕성 성문을 마주하고 본 이성량패루>

 

 

<이성량패루 양쪽 측면>

중앙의 사자는 익숙하지만 양쪽 끝에 있는 갈기(?)가 길고 특이하게 생긴 동물의 정체가 궁금하다.

 

 

 

<시내에서 본 '성보건'이란 간판>

이름이 묘한 이 간판이 자주 보였는데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퇴폐업소는 아닐 텐데, 앞의 수건 말리는 것으로 보아 이발소 같기도 하고...

 

 

<점심을 먹은 북진의 초급반점에서 현지 가이드가 별도로 시킨 애벌레찜>

 

 

<버스에서 본 장의차>

전면에 '인생종점역(人生終点站)'이라 쓰여있다. 

 

 

<버스에서 본 숭흥사 쌍탑>

탑 사이의 거리가 멀어 어지간한 거리에서는 쌍탑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제대로 촬영한 것도 주변이 어수선해서 이 사진으로 대체했다.

 

 

<숭흥사 동탑>

북진 동북쪽 숭흥사 앞에 동, 서로 배치되어 있는 쌍탑이다. 요나라 때 건립된 벽돌 탑으로 높이만 약간 다른(42m, 43m) 13층 8각형의 쌍탑이다.

 

하부의 기단석은 탑신을 보호하기 위해 후대에 증축했기 때문에 층마다 무늬가 다르다. 1층 탑신 8면 중앙마다 감실 속에 좌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감실 밖 좌우에서 부조 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불상 위에 각각 보개가 있고, 상단에 1쌍의 비천상이 있다. 지금까지 본 요양백탑, 백탑보의 백탑도 모두 이런 구조이다.

 

 

<숭흥사 서탑>

 

 

<숭흥사 동탑을 클로즈업하여 촬영한 것>

고졸하고, 남아있는 색채 때문에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숭흥사 천왕전>

 

 

<숭흥사 천왕전 내부의 사천왕상>

 

 

 

<숭흥사 천왕전 내부의 조보광불>

웃는 모습이 천하에 근심걱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해맑은 얼굴이다. 북진묘 침궁 안에 봉안된 부부로 보이는 도교신 위에도 '조보광신'이란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에게 보통명사인 것 같다. 여하튼 어떤 신, 혹은 불상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숭흥사 위태전>

위태천은 불법을 수호하고 출가인을 보호하는 신으로 남방의 증장천왕이 거느리는 8대 장군이었으나 제석의 지위를 능가하는 군신이 되었다. 가네사와 함께 힌두교의 시바신의 아들이었는데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손에는 삼지창 모양의 금강저나 봉을 들고 갑옷과 봉황의 깃털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로 불렸다.

 

위태보살은 일반적으로 천왕전에 안치하고, 뒤에 전각이 하나쯤 더 있어 위태불보다 한 단계 위인 부처를 모셨음직 한데 숭흥사는 여기까지였다. 전각은 부실하고 불상은 모두 방금 조성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것으로 보아 쌍탑 때문에 후대에 들어선 절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