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0 - 북진(북녕) 의무려산

큰누리 2016. 9. 14. 14:31

<16. 8/4. 열하일기 따라가기 4일차 일정3>

심양 동방은좌국제호텔- 영안(석)교- 요동평원을 달리며- 한강 하류처럼 강폭이 넓은 넓은 거류하(요하)를 버스에서 내려서 보고- 신민소흑산 가는 평원에서 내려 수박을 사 먹고- 중간에 화장실 대신 옥수수밭에서 용무를 본 후- 북진 도착-광녕성 성문(북진고루)이성량 패루- 북진 초급반점에서 현지식- 숭흥사 쌍탑- 북진묘- 의무려산- 십삼산을 스치며- 주 금쾌자에서 현지식- 금주 금하호텔 투숙.

 

 

<북진(북녕) 의무려산>

의무려산은 고대 순임금 시절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열두 진산 중의 하나였다홍대용은 이 산을 동이족과 한족이 만나는 곳으로 보았으며, 허목(許穆)은 이 산의 주위가 고조선의 도읍지이자 고구려의 졸본부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고구려는 거란을 정벌할 때 요하를 건너고 의무려산을 넘어 내몽고쪽으로 들어갔다

 

먼 요동벌판을 건너오느라 지친 연행단은 의무려산에서 쉬며 휴식을 취했다그 때문에 이 산은 연행록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홍대용이 이곳을 무대로 쓴 <의산문답> 이래로 연행단이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의무려(醫巫閭)’는 의사나 무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어로 '크다'는 의미라고 한다.끝 없는 벌판 한 가운데 우뚝 선 의무려산은 고대 중국인에게나 4~5일을 걸어 만난 연행단에게나 특별히 '큰 산'으로 보였을 것이다. 연행단은 의무려산에 올라 망해사, 도화동, 관음각 등을 둘러보았다망해사는 그곳에서 바다(발해)가 보인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워낙 바다와 멀리 떨어진데다 지형 변화도 있고 공해 때문에 현재 바다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연암은 북진묘를 보기 위해 일행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의무려산을 들르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의무려산과 북진묘에서 명, 청의 황제가 자주 언급되어 이 참에 청의 황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명나라 황제와 이름이 혼동되기도 하고, 묘호와 연호가 섞여 안내문이나 자료에 안내되어 한번 짚으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르하치, 홍타이지, 부의 등의 이름은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많이 쓰이고,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함풍제 등의 연호는 안내문이나 사서에서 많이 쓰인다. 청은 대만, 내몽고까지 천하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280여 년간 왕조를 유지하며 태조(누르하치)를 포함하여 12명의 황제가 있었다. 27명이나 되는 조선에 비해 왕조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황제 계보도 12명으로 생각보다 짧다. 

 

 

<청나라 황제 계보>

(1636년 ~ 1912년. 276년) : 국호가 청이 된 것은 2대 태종 때(1636)이므로 후금기였던 누르하치(태조) 통치 시기를 포함하면 1626년부터 시작된다. 청나라의 전성기는 성조(강희제) 때부터 고종(건륭제) 때까지였다. 첫 번째는 묘호, 두 번째는 연호, 세 번째는 속명이다.

 

♣ 1. 태조(천명제, 누르하치. 1616~1626. 재위 10년) 만주 건주여진 족장으로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했다.

♣ 2. 태종(숭덕제, 홍타이지. 1626~1643. 재위 17년) : 종족명을 여진에서 만주족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개칭했다. 내몽골을 평정하고 조선을 상대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 3. 세조(순치제, 복림. 1643~1661. 재위 18년) :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성경(심양)에서 연경(북경)으로 천도했다.

♣ 4. 성조(강희제, 현엽. 1661~1722. 재위 61년) : 명의 제도를 도입하고 한족을 관리로 등용했다. 5만자로 된 <강희자전>을 편찬했으며 대만을 복속시켰다.

♣ 5. 세종(옹정제, 윤진, 1722~1735. 재위 13년) : 청의 제도를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쇄국정책을 폈다.

♣ 6. 고종(건륭제, 홍력. 1735~1796. 재위 63년) : <사고전서> 편찬. 황제 중 가장 장수(89세)하고, 가장 오래 재위(섭정 포함 63년)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했으나 만주족을 비하하는 한족(漢族)을 억압하는 '문자의 옥(獄)을 53차례나 일으켰다.

7. 인종(가경제, 옹염. 1766~1820. 재위 24년) : 강희제에서부터 건륭제까지의 전성기가 지나고 관료들이 부패하기 시작했으며 백련, 천리의 난이 일어났다.

♣ 8. 선종(도광제, 민녕. 1820~1850. 재위 30년) : 아편전쟁에 패해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상해를 개방했다.

♣ 9. 문종(함풍제, 혁저. 1850~1861. 재위 11년) :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는 등 정세가 불안했다.

♣ 10. 목종(동치제, 재순. 1861~1875. 재위 14년) :  동태후, 서태후 섭정을 받다가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 11. 덕종(광서제, 재첨. 1875~1908. 재위 33년) : 서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며 청일전쟁 패배로 대만을 일본에 넘겼다.

♣ 12. 공종(선통제, 부의. 1908~1912. 재위 4년) : 3살에 즉위하였고 7살에 청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일제가 세운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평민이 되었다.

 

 

<의무려산 입구>

모양이 빼어난 하얀 화강암 바위들이 많아서 산세가 우리나라의 북한산과 비슷하다. 의무려산에는 맨 앞에 거대한 기둥 2개가 있고 이어 청 황제상 6기, 전각모양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황제는 태조, 성조, 세종, 고종, 인종, 선종상이었는데 2대 태종과 3대 세조가 빠진 것으로 보아 재위 순서는 아니었고,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다. 중국의 인물 석상이 대부분 그렇 듯 거대하고 표정이 모두 근엄해서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의무려산 입구의 여인상>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거대한 바위에 쓴 醫巫閭山 각자는 건륭제의 친필이다.

 

 

<의무려산의 명소 미니어처>

 

 

<의무려산 입구의 복을 기원하는 패들>

 

 

<의무려산 재신전, 보살전>

 

 

<從善如登(종선여등) 刻字>

종선여등(從善如登)은 '착한 일을 쫓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 만큼 힘들다는 내용이다. 안내문에 건륭 16년이 언급되어 있고 왼쪽에 覺羅慶齡이란 글로 보아 황제와 관련된 각자로 보인다. 이런 붉은 칠을 한 각자들이 의무려산 도처에 있고 크기도 엄청나다.

 

 

<성수용담>

원래의 폭포 아래에 인공으로 폭포를 연장한 것인데 일행을 놓쳤기 때문에 폭포 아래로 올라갈 시간이 없어 통과했다. 이 지점에서 길이 둘로 갈리는데 인적이 없고 일행의 꼬리를 놓쳐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판단이 어려웠다. 그래서 계단이 있는 왼쪽으로 올랐는데 케이블 카 승강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일행은 오른쪽으로 올랐다고 한다. 하산할 때 내가 올라간 왼쪽길로 내려오면서 일행들은 오른쪽 등산로가 특별한 볼거리는 없고 코스가 가팔라서 고생들을 했다고 한다.

 

 

<폭포 왼쪽 갈림길에서 올려다 본 백운관 석병대(망해사)>

성처럼 둥근 정상의 바위는 석병대(石屛代), 붉은 처마의 전각은 도교신을 모신 진O천황후박물관이다. 연행록에 언급된 망해사는 제대로 된 전각을 갖춘 절이 아니라 박물관에서 석병대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옆 암굴 같은 곳에 있고 불상 1기가 안치되어 있다.  

 

 

<의무려산 케이블 카 승강장 입구>

색도(索道)가 케이블 카를 뜻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이곳에서 병풍대가 보이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처럼 동작이 굼띠고 등산이 어려운 중생에 대비해 현지 가이드가 최종 목적지는 석병대이고 언제까지 내려오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 빼고 모두 현지 가이드를 제대로 따라갔던 일행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현지 가이드나 지기님 모두 의무려산 등산은 초행인 듯 했다.

 

 

<혼자 헤매다 만나 뜻밖의 선물>

돌로 된 고개를 넘기 직전에 있던 감실 속의 마애불 3기이다. 안내문은 없었지만 이끼나 마모 상태로 보아 조성된 지 오래된 불상으로 보였다. 감실이 뒤로 약간 젖혀진 맨 오른쪽의 불상이 가장 마모가 심했다.

 

 

<돌 고개 정상의 '북진명산' 각자>

 

 

<고개 넘어 일행과 조우한 도화동 앞의 만년송>

밑에서 카메라 앵글로 좀처럼 잡기 어려울 만큼 키가 크고, 껍질이 아름답게 갈라져 있는 소나무이다. (간자로) '요나라 태자와 그의 비에 관한 내용, 건륭제가 의무려산을 순찰할 때 운소송(云巢松)이라 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풍정(風井과 도화동>

만년송 안내문에서 본 요나라 옐뻬이 왕자가 도화동을 만들었다는 안내문이 풍정 앞에 있었지만 딱히 어디가 도화동이란 내용은 없었다. 석병대, 백운관, 만년송이 있는 이 일대는 거친 골산 가운데에 있는 평지이고 특정인이 만들었다는 안내문으로 보아 도화동은 이 부근을 통칭하는 말인 것 같다. 연행단들은 망해사, 도화동, 관음각 등을 둘러보았다.

 

 

<망해사(석병대)로 오르는 관문 백운관>

이곳 역시 붉은 칠을 한 각자들이...

 

 

<백운관에서 본 재신전>

왼쪽 끝에 케이블 카 승강장이 보인다.

 

 

<백운관 위의 진O천황후박물관>

망해사인 줄 알았던 이 건물 내부에 건국이나 의무려산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상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천황후박물관에서 올려다 본 석병대>

혼자 유유자적하다 석병대 위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일행들을 만났다.

 

 

<백운관에서 조망한 의무려산 풍경>

이 지점에서 조망한 풍경이 연행단들에게 가장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의 사찰이 연행록에서 언급된 관음각이다. 아래에 있는 관음각을 둘러본 후 연행단들은 이곳에 올라 의무려산의 풍경을 감상하고 넓은 벌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름은 망해사이지만 보이지 않는 바다(발해)를 찾아 눈을 부릅뜨기도 했을 것이고...

 

 

 

 

<의무려산 석병대>

 

 

<백운관(망해사)에서 본 북진(북녕)시>

 

 

<백운관(망해사)에서 의무려산>

이곳에서 본 풍경은 북한산 같다.

 

 

<의무려산 석병대>

석병대 위에 먼저 오른 일행들이 보인다. 우리가 들른 날, 중국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석병대 아래의 망해사와 내부>

이 앞을 지나 사진 중앙의 가파른 계단으로 석병대에 오른다.

 

 

 

<의무려산 정상>

체력 좋은 일행 다섯 분이 정상에 올라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미련 없이 포기...

 

 

<석병대에서 관음각쪽 조망>

 

 

<석병대에서 본 문수원(文殊院)?>

들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을 확대해 보았지만 글씨 판독이 어려웠다. 문수원은 산 입구의 안내도와 사찰 같지 않은 건물 구조를 보고 추측한 것이다.

 

 

<북진을 떠나 금주로 가는 길의 석산(십삼산)>

길가에 석재상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앞에는 조각한 불상, 사자상들이 있었다. 이곳이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십삼산(석산)으로 추측된다.

 

 

<금주 금하국제호텔>

3시간 정도 이동하여 밤에 금주에 도착했다. 호텔 부근의 식당 금쾌자(金筷子:금젓가락)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인 금하국제호텔에 도착했다. 침대 머리맡이 금빛으로 휘황찬란하다. 하지만 점점 음식 내용이 빈약해 지고 숙소도 낡고 불편해 지는 중이다.

 

 

<이튿날 아침에 본 금주 금하국제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