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1 - 흥성고성(영원성), 맹강녀묘

큰누리 2016. 9. 15. 02:03

<16. 8/4. 열하일기 따라가기 5일차 일정1>

금주 금하국제호텔- 금주고성, 금주고탑 외관- 흥성고성(영원성)- 흥성식당에서 현지식- 석교하를 건너 진황도시 -맹강녀묘- 각산장성을 리프트로 올랐다 시간에 쫓겨 바로 내려옴- 산해관- 노룡두- 진황도 팔도강산에서 한식- 진황도 노룡호텔 투숙.

 

 

<금주고성>

소릉하가 도심을 휘감고 흐르는 금주는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였다북경으로 가는 연행단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으며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청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진격로이기도 했다병자호란 후 청이 요청할 경우 조선군을 파병한다는 약속에 따라 1641 1,500명의 조선군 조총부대가 처음으로 명나라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청은 조선이 명을 도와 배후를 치지 못하도록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금주성 전투에 종군시켰고조총병 이사룡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공포만 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1642년 북경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금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청은 이어 송산, 행산, 탑산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현재 시내에 고탑공원이란 이름으로 당시 성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고 부근에 금주고탑이 있지만 우리는 차창으로 스치며 보았을 뿐이다촬영한 금주성 성문(점장대)을 확대해 보니 성문 너머 원경에 희미하게 중앙의 고루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그로 미루어 우리가 향하는 흥성고성(영원성)과 비슷한 구조의 성(동서남북 사방의 성문과 중앙의 고루)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금주 금하국제호텔 객실에서 본 금주시>

 

 

 <금주 금하국제호텔의 초라한 아침 메뉴> 

이쯤 되면 정말 먹을만 한 것이 없다. 내가 그동안 여행하면서 들른 호텔이란 이름이 붙은 숙소의 먹거리 중 최악이다. 한나절을 버티기 위해 배를 채울만 한 곡기 몇 가지를 가져왔다. 앞에 앉은 룸 메이트의 접시를 보면 식단이 얼마나 빈약한지 확인할 수 있다.

 

 

<차창으로 스치며 본 금주고탑공원과 금주고탑>

 

 

<차창으로 스치며 본 금주고성 성문>

이쪽 성벽은 옹성일 테고, 둥근 성문 안으로 중앙의 고루가 보인다.

 

 

<흥성고성>

흥성고성(영원성)은 둘레 3.2km, 성벽 높이 8.8m, 한쪽 성벽 길이 800m, 4개의 성문, 중앙에 종고루가 배치된 정방형 성이다. 서안고성, 형주고성, 산서 평요고성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고성이라고 한다기원 전부터 흥성으로 불렸고, 명나라 시기인 1428년에 영원위성으로 고쳤다가 청나라 때에는 영원주성, 1900년대에 들어 현재의 흥성으로 고쳐부르고 있다고성 안에는 동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흥성문묘가 있으나 지나쳤고, 장군부, 성황묘, 주씨 저택, 조대루와 조대락 형제의 패루가 있다.

 

1621년 후금의 누르하치는 요동의 중심인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광녕성까지 접수하며 파죽지세로 밀려왔다방비를 자처한 원숭환은 1623영원성을 정비하고 홍이포로 무장하는 등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1626년 누르하치가 13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원숭환은 2만의 군사로 청을 대파했고, 누르하치는 홍이포의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얼마 후 사망했다명나라가 청나라와 싸워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였다하지만 후금과 내통한다는 중상모략으로 원숭환은 북경으로 소환되어 책형(살점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 죽고 말았다.

원숭환이 처형되자 1631년 청태종(홍타이지)은 북경으로 향했고 산해관 외성격인 금주성을 공격했다금주성 외곽의 대릉하성에서 명나라 장수 조대수와 격전이 벌어졌는데 장기전으로 군사들이 굶어죽자 조대수는 항복했다항복한 조대수는 청태종의 호의로 금주성으로 퇴각하였고, 10년 후 다시 청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포위되어 군량부족으로 또 다시 항복했다조대락, 조대성, 조대명 형제는 송산, 행산 전투에서 모두 포로가 되었다청은 조선이 명을 도와 배후를 치지 못하도록 이 전투에 병자호란 후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종군시켰다.

 

흥성고성은 답사의 성격이 강하지만 관광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아담한 크기라서 부담이 없는 이동 거리, 잘 보존된 성문과 중앙의 종고루, 같은 듯 다른 조대수와 조대락 형제의 패루 등 볼거리가 많았다. 중앙의 고루에서 동서남북 성문을 따라 뻗은 4개의 중심도로에 관광인파가 붐볐지만 그 사이의 후퉁(골목)에서는 웃통을 벋은 남자들이 노닥거리거나 경운기를 끌고, 아이들이 들락거리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한껏 치장을 하고 연인이나 가족단위로 거리를 가득 매운 현지 관광객들을 통해 중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고, 관광객을 상대로 한 가게에서 고급은 아니지만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하게 진열한 상품을 들여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고성 안에 인사동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품 가격도 저렴해서 나는 3,000원을 주고 당장 땡볕을 가릴 요량으로 접이 부채를 샀는데 투박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우리가 들른 열하일기 8박 9일 코스 중에서 가장 현지인과 그들의 생활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곳이다. 

 

 

<흥성고성(영원성) 춘화문(동문)>

점장대의 깃발에는 국운이 기우는 명나라 장수로 이 성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안기고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원(袁)'이 적혀 있다.

 

 

<흥성고성 독사부(督師府)>

흥성고성 총지휘관 관저이다.

 

 

<흥성고성 연휘가(남문쪽 거리)와 고서의 명물인 땅콩강정 메치기>

웃통을 벗은 건장한 남자들이 메질에 맞춰 소리를 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인사동에서 실처럼 가는 타래 엿과 맛이 비슷했지만 더 바삭하고 고소했다.

 

 

 

<흥성고성 중앙의 종고루>

 

 

<연휘가의 골동품 가게>

손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유롭게 휴대폰 조작만 하는 노인장은 돌아오는 길에도 그 자세 그대로였다. 아가씨의 패션 센스가 돋보인다. 사진 중앙에 걸린 하늘하늘한 잠자리 날개 같은 숄이나 가운을 걸치는 패션이 최근에 중국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흥성고성의 조대수, 조대락 패루>

조대수, 조대락 형제 패루는 영원성 안 남문과 중앙의 종고루 사이에 있으며 조대수 패루가 약간 낮다조씨 집안은 중국 북서지방에서 대대로 장수를 배출한 명문 장수 가문이었고, 조대수와 조대락은 사촌형제이다연암의 글에 의하면 조대락 패루(이도패방)는 오색 문양의 돌로 짜맞추었고 조각한 솜씨가 사람의 솜씨로는 못할 수준이라고 했다.

조대락 패루에는 5품 이상의 관원에게 3대 조상을 증직하는 법에 따라 조진, 조인, 조승교를 증직했다고 써있다. 전면에는 큰 공훈을 처음 하사 받았다는 의미의 元勳初錫(원훈초석)후면에는 장수가 되어 준엄하고 열렬한 공을 세웠다는 의미의 登壇峻烈(등단준열)꼭대기에는 玉音이란 글이 있다

 조대수 패루(일도패방)에는 조진, 조인 외에 아버지 조승훈 등 4대가 증직되어 있다임진왜란 때 조승훈은 요동부총병으로 3만 기병을 끌고 조선을 구원하러 가장 먼저 온 장수이다패루 윗부분에 영토를 넓히고 깨끗하게 한 맹렬함이란 의미의 廓淸之烈(확청지열)아래에는 ‘4대에 걸친 장수 집안이란 의미의 四代元戎少傳(사대원융소전)이란 글이 있다

 

연암은 위와 같이 조대수, 조대락 (사촌)형제의 패루에 대해 묘사를 하고은나라 때부터 내려온 조씨 집안의 장수로서의 명성은 무너지고 후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패루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흥성고성 종고루와 남문 사이의 조대락 패루(이도패방)>

뒤에 보이는 것은 조대수 패루(일도패방)이다.

 

 

<조대락 패루(이도패방)의 석수>

 

 

<조대락 패루(이도패방)를 앞면에서 본 모습>

 큰 공훈을 처음 하사 받았다는 의미의 元勳初錫(원훈초석)이 새겨져 있다.

 

 

<조대수 패루(일도패방) 뒷면>

 

 

<조대수 패루(일도패방) 석수>

 

 

<조대수 패루(일도패방) 앞면>

윗부분에 廓淸之烈(확청지열), 아래에 四代元戎少傳(사대원융소전)이란 글이 있다원숭환을 상징하는 듯 원숭이 복장을 한 이가 패루 주변을 돌고 있다.

 

 

<흥성고성 남문>

 

 

<흥성고성 중앙의 종고루에서 본 春和街(춘화가, 동쪽)>

 

 

<흥성고성 중앙의 종고루에서 본 永寧街(영녕가, 서쪽)>

 

 

<흥성고성 중앙의 종고루에서 본 延輝街(연휘가, 남쪽)>

 

 

<흥성고성 중앙의 종고루에서 본 威遠街(위원가, 북쪽)>

 

 

<전병 만들기>

이 전병은 우리의 현지식 식탁에도 나와서 쌈을 좋아하는 내가 낚여서 먹어보았는데 대파와 2개의 야채에 된장을 바르고 얇은 밀떡에 싸 먹는 것이다. 맛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우리나라의 (짠) 된장과 거의 똑같은 맛과 아릿한 대파 맛만 뒤끝에 남았다. 전투가 많고 이동 거리가 긴 이 지방에서 손쉽게 먹기 위해 만들어진,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패스트 푸드이다. 현지 가이드에게 정확한 이 음식 이름을 물었더니 '전병'이라고 했다.

 

 

<흥성고성 춘화문(동문)과 성곽>

성루에 올라가려 했더니 요금을 따로 받았다. 일행들이 이미 성을 나선 터라 포기했는데 이곳에 오르면 원숭환이 청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대파한 홍이포를 볼 수 있다.

 

 

<흥성고성 모서리의 괴성루(魁星樓)>

괴성루는 경복궁 십자각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점심을 먹은 흥성식당의 메뉴>

맨앞의 가지볶음과 중앙의 해파리냉채가 맛있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보다 가지볶음을 많이 먹는 것 같았고 어느 식당이건 모두 맛이 괜찮았다.

 

 

<석교하>

석교하를 넘어 조금 더 가니 산해관, 노룡두가 있는 진황도市였다. 강폭이 상당히 넓으므로 연암 일행은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에 물이 불어 서장관의 비장이 물에 빠져 죽을 뻔 했고, 의주 상인은 돈이 든 전대를 물에 빠뜨리고 강가에 앉아 통곡한 곳이다.

 

연행단이 통과하는 길목에는 이곳처럼 폭이 넓은 강이 많고, 그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나뉘거나 전쟁이 벌어진 곳이 많다. 연암 일행도 한 여름에 이곳을 통과했기 때문에 비를 만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거나 물이 많이 불으면 앞 마을에서 며칠씩 체류하기도 했다. 강과 관련해 가장 무리수를 두며 강행한 것은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일정에 쫓겨 하룻밤에 조하의 강 아홉개를 건넌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거류하를 제외하고는 그냥 스쳤기 때문에 사진 촬영조차 쉽지 않았다.

 

 

<맹강녀 묘 앞의 관광용 낙타>

 

 

<맹강녀묘()>

산해관 앞에 있는 맹강녀를 모신 사당으로 맹강녀의 전설은 망부석이 되었다는 내용과 아래의 전설 두 가지가 있는데 아래의 전설이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만리장성 축조에 강제노역을 시킨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래도 신라로 떠난 석공 남편을 찾아왔다가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물에 빠져죽은 아내라는 줄거리가 우리나라의 무영탑 전설과 비슷하다. 전설에 지나지 않는, 그것도 여성 사당인 맹강녀묘에 연행단이 굳이 들른 것은 남편에 대한 절개나 지순한 마음을 부각하려는 유교적 이념 때문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당대의 중국인들에게는 만리장성을 축조하면서 무리한 노동으로 죽어나간 백성들의 비극과 폭정을 전설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리장성 축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공사였기 때문에 장성을 축조하는 지역을 따라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인구변동이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쌓은 것(BC259~BC210)이 아니라 한나라 무제 때 6,000km에 이르는 대대적인 확장을 거치고명나라 때에 5,650km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여 완성(1368~1644)된 것이다.

 

맹강녀는 진나라 여성으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에 징발된 남편 범기량이 1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겨울옷을 지어 남편을 찾아갔다하지만 남편이 힘든 노동으로 이미 죽고 시신은 성벽에 묻혀 찾을 수 없었다맹강녀가 성 밑에서 대성통곡을 하자 10일 만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유골들이 나타났고 맹강녀는 그 속에서 남편의 유골을 찾아냈다맹강녀의 미모에 반한 진시황이 첩으로 삼으려 하자 맹강녀는 남편의 제사를 잘 지내주는 조건으로 응했다남편 제사가 끝나자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안고 산해관 앞 바다에 뛰어들어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맹강녀묘에 들렀을 때 많이 실망스러웠다. 필부의 전설이니 뭐 대단한 게 남아있을까만은 산동성 복여동해에서 본 것처럼 중국인 같지도 않은 두상의 맹강녀상을 여기저기 조성해 놓고, 관련 없는 건물을 최근에 지어서 급조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망부석 하나만 제 모습인 것 같았다. 이어 갈 각산 전망은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맹강녀묘 맹강녀전>

 

 

<맹강녀묘 관음전>

 

 

<맹강녀묘 망부석>

 

 

<맹강녀묘 소심정>

 

 

<맹강녀묘에서 본 각산>

 

 

<맹강녀상>

 

 

<맹강녀묘 수사(水榭)>

 

 

<맹강녀묘 진궁(秦宮)>

 

 

<맹강녀묘 진궁(秦宮) 패방>

 

 

<맹강녀묘 진궁(秦宮)의 맹강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