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2 - 만리장성(각산장성, 산해관, 노룡두)

큰누리 2016. 9. 17. 00:37

<16. 8/4. 열하일기 따라가기 5일차 일정2>

금주 금하국제호텔-금주고성, 금주고탑 외관-흥성고성(영원성)-흥성식당에서 현지식-석교하를 건너 진황도시-맹강녀묘-각산장성을 리프트로 올랐다 시간에 쫓겨 바로 내려옴-산해관-노룡두-진황도 팔도강산에서 한식-진황도 노룡호텔 투숙.

 

각산장성에서 만리장성의 일부라도 느껴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길이 막혀 늦게 도착한 탓에 다음 목적지인 노룡두 입장 마감 시간에 쫓겼다. 리프트 타고 올라가서 내리니 16:13인데 마지막 하강 리프트 시간이 16:20이라고 했다. 각산장성 정상의 적대(敵臺)까지 올랐다 하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리프트 카 승강장 너머에 있는 호수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부족해 포기하고 산해관쪽만 조망한 후 발길을 돌려 다시 리프트 카에 탑승했다.

 

각산은 산해관에서 3km 거리에 있는 해발 519m의 산으로 정상의 거대한 바위가 용머리의 뿔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각산은 동쪽 끝 노룡두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이 산해관을 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에서 첫 번째 봉우리여서 만리장성 제일산이라고 한다.

리프트 카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성곽 일부와 적대만 보았지만 다른 블로거들의 글을 보니 가파른 산세를 따라 지은 성곽이 상당히 멋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본 것은 여기까지이니!

 

 

<각산장성 입구>

 

 

<입구에서 본 각산장성>

산 능선을 따라 흰줄로 보이는 것이 각산장성이다. 왼쪽으로 돌아가면 리프트 카 승강장이 있고, 리프트 카는 성벽 옆을 따라 오른다. 오르내리는 리프트 카에서 평지에 펼쳐진 진황도시를 조망할 수 있고, 희미하긴 하지만 재색 기와가 무리를 이룬 산해관과 그 안쪽 마을이 보인다.

 

 

<리프트 카로 스치는 각산장성과 정상의 적대>

사이사이로 걸어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른 블로거들의 사진을 보니 가파른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이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리프트 카에서 가파르게만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전망이 좋아 성벽 통로에서 웨딩 사진을 많이 촬영한다고 한다.

 

 

<각산 정상 부근에 있는 燕塞湖>

리프트 카에서 내려 앞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있다는 북방의 계림으로 불리는 얀사이호 사진이다. 몸이 잰 일행 중 몇 분은 원경으로나마 이곳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리프트 카에서 내리자마자 발길을 돌려 리프트 카를 타고 내려왔으니 안내도로 만족해야 했다.

 

 

<각산 리프트 카 승차장에서 본 진황도시>

사진 중앙 약간 오른쪽의 녹색 나무 선으로 둘러싸인 회색 부분이 산해관이다. 각산에서 산해관을 지나 더 앞으로 나가면 원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발해만이 있고, 그 끝에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인 노룡두가 있다.

 

 

<이자성의 난과 각산장성>

이자성(李自成)은 섬서성 연안 출신으로 명나라 말에 농민 반란군 지도자로 급격하게 세력을 키웠다1641년 낙양을 함락시키고 자신을 봉천창의문무대원수라 칭하였으며 1644년 서안 점령 후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 황제로 즉위했다1644425일 북경을 점령하여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한편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명나라가 멸망하자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나라에 투항하여 청과 연합하여 이자성을 서안으로 몰아낸다이자성은 동관, 양양, 무창, 강서에서 연패하고 호북성 통성으로 퇴각했다가 휘하의 무장들에게 피살되었다만주족은 후금에서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했지만 난공불락 산해관을 넘지 못했는데 내란으로 쉽게 중원을 장악한 것이다.

 

 

<각산장성 입구의 이자성像>

각산장성 입구에 이자성의 상이 있는 이유는 각산장성 서쪽의 석하(石河)에서 벌어진 석하대전에서 오삼계와 연합한 청군에게 대패하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

기원전 220년 진나라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전에 구축된 몇 개의 성벽을 연결하여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통합된 방어체계로 성벽을 확장하였다당시에 만들어진 성벽은 황하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남아 있다한나라의 무제(BC140~BC87)는 북방지역의 몽골, 투르크족, 흉노족의 침략에 대비해 중국 서쪽 둔황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渤海灣)까지 약 6,000km의 성벽을 확장했다.

 

한나라 멸망 후 북방이 안정되면서 만리장성은 방치되었다가 명나라 때 200여 년 동안 18차례에 걸쳐 5,650km의 성벽을 구축하면서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했다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으며 성벽 위에 길을 만들어 군대나 연락병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산해관, 山海關)은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복원된 자위관(가욕관, 嘉峪關)은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비행기로 7시간이 걸려야 모두 볼 수 있다는 세계 최장의 건축물이다성벽 위의 통로는 5.7~6.5m로 말 몇 필이 동시에 이동하게 만들었으며, 110m마다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만리장성의 길이가 4,000km, 6,750km, 8,851.8km, 21,196km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이유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이 있다원래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 옆의 바다로 성이 빠지는 노룡두부터 북서쪽의 가욕관까지였다그런데 2006년부터 중국 정부가 주변의 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임의로 확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만리장성 길이가 자꾸 늘어나는 것이다심지어 거리상 아무 연관도 없는 고구려의 박장성이라고 알려진 단동의 호산장성까지 이름을 바꿔 압록강까지 만리장성에 편입시켰다.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 천하제일관)≫

행정적으로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진황도, 秦皇島)시에 속하며 동북(만주)방면과의 연안 육상 교통로의 관문이다유관(楡關)이라고도 하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지이다북서쪽으로는 연산산맥,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해 있다이곳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이 남해구관(南海口關, 노룡두)이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남북조시대의 북제 때 이루어진 것이다산해관 동쪽에는 만리장성 동문 성루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만리장성 동쪽 끝 시작 지점으로 예로부터 자주 싸움터가 되어왔다.

<두산백과에서 퍼옴>

 

 

<천하제일관(산해관) 안내도>

우리는 위쪽에 보이는 호수 바깥 주차장에서 내려 산해관 동문(천하제일관) 뒤쪽으로 들어갔다. 두번째 사진은 주차장 입구에 있던 근대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산해관 안 사진이다. 

 

 

 

<산해관 성문 뒤쪽과 옹성>

왼쪽 성벽의 홍예문 위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현판이 붙은 누각이 있다. 산해관 성문 옹성은 어느 성문보다 성벽이 높고 규모도 크다. 정면의 벽은 옹성의 한면이다. 왜 난공불락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산해관 성문(천하제일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차례 제()(싹 제)인 이유는 글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문과 누각은 일자로 배치되지 않아 밖에서 보면 확연히 삐뚤어져 있다현재 문루에 걸린 현판은 똑같은 형태로 다시 쓴 것이고 원래의 현판은 누각 안 전시실에 있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오르며 본 목영루(牧营樓)와 매표소>

 

 

<산해관(天下第一關) 현판과 전시실에 걸린 원래의 현판>

글자 한자의 크기가 1m를 훌쩍 넘는다. 원래의 현판은 현재 현판 바로 아래의 전시실에 있다.

 

 

<산해관(天下第一關) 누각을 성벽 위에서 본 모습>

 

 

<산해관(天下第一關) 성벽 통로와 대포> 

만리장성 성벽 통로 폭은 평균 6m 정도이다. 말 몇 필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산해관 안 거리의 관광용 마차와 깃발을 파는 젊은이>

 

 

<노룡두(老龍頭)>

노룡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석성(石城)으로 1567년 당시 산해관 일대를 관할했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만리장성 중 맨 마지막에 축성했다노룡두 주변의 건물은 대체로 명나라 때 축성된 것이다. 발해만 속으로 20m 정도 들어가 있으며 영해성(寧海城)을 중심으로 입해석성(入海石城), 진로대(鎭虜台), 남해구(南海口), 징해루(澄海樓) 등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노룡두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영해성 앞에서 입장한다. 입장 마감 시간이 17:00였는데 도로가 막혀 도착한 시간은 17:20이었다. 현지 가이드가 인터넷 발매를 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거절 당했다.

노룡두를 보려고 허위허위 왔는데 물러설 수 없어 일행 모두 매표소 직원에게 불쌍한 표정을 짓고, 한국 관광객이란 것도 부각 시키고, 애원도 하며 매달렸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두 (상부) 단계를 거쳐 상급 실무자가 나와 어렵사리 문을 열어 주었다. 산해관만 보고 말았더라면 만리장성 동단의 의미가 희석될 뻔 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나도 노룡두 현지를 둘러볼 때까지 (사전공부가 미흡했기 때문에) '만리장성이 바다로 빠진다'는 말 외에 노룡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노룡두 영해성(寧海性)>

 

 

<노룡두 징해루(澄海樓)>

징해루는 노룡두에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가장 큰 2층 누각이다2층에 '웅금만리(雄襟萬里)' 편액이 걸려 있고 양쪽 벽면에는 명, 청대 명사와 청나라 황제들이 쓴 친필이 있다명나라 만력제 39년(16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00년 서구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노룡두 징해루(澄海樓) 벽면의 서각>

각면에 명나라, 청나라 명사들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사진은 명나라 명사와 청 도광제(선종), 청 강희제(성조)의 글이고, 맞은편 벽에는 명나라 명사와 청 세종(옹정제), 청 고종(건륭제)의 친필이 있다. 그만큼 많은 황제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의미인데 이곳 외에 어비정, 비림에 황제들의 친필이 몇 개 더 있다.

 

 

<노룡두 입해석성(入海石城)>

입해석성(入海石城)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성이란 뜻으로 만리장성이 산해관을 지나 이곳 노룡두에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며 끝난다는 뜻이다만리장성을 용에 비유하고 노룡두를 용머리에 비유한 것이다

 

 

<노룡두 징해루와 천개해악(天開海岳)비>

징해루에서 입해석성(入海石城)을 향해 내려가면 '하늘을 여는 바다와 산'이라는 의미의 천개해악(天開海岳)가 있다.

 

 

<노룡두 흙 포대 유적>

남아있는 흙 포대 유적을 유리로 보호하고 있다. 노룡두는 1900년 서구열강 8국 연합군 군함에 의해 징해루와 함께 파괴되어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원래의 노룡두 터>

원래의 노룡두 입해석성 터는 현재 위치보다 동쪽에 있고 바위덩어리로 보이는 이곳에 철망을 쳐놓았다.

 

 

<노룡두 입해석성(入海石城)>

지긋지긋하게 변방 이민족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바다 속까지 방어벽을 쌓은 중국인들의 노고가 안쓰러웠다. 이렇게 바다 속까지 성벽을 쌓으며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려 했지만 난공불락의 산해관은 문을 한번 열어 청에 무너졌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는 신무기를 앞세운 서구열강 함대의 대포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입해석성(入海石城)에서 본 해신묘>

바다를 지키는 해신과 천후성모를 모신 도교 사당이다바닷가에서 석양에 물든 전각이 아름다웠지만 노룡두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행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기 때문이다아쉬웠던 것은 해신당 쪽에서 보아야 입해석성이 바다로 빠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놓쳤다는 것이다일행 중의 어떤 이는 발해만이라는 사실 때문에 물에 발을 담구거나 손을 적시기도 했다.

 

 

<입해석성(入海石城)에서 본 징해루>

 

 

<입해석성(入海石城) 끝>

 

 

 

<입해석성(入海石城)에서 본 징해루>

 

 

<노룡두 비림>

 

 

<노룡두 어비정>

징해루 동쪽에 비림이 조성되어 있고 어비정도 있다어비정 안에는 이곳을 4번이나 들른 건륭제 친필인 淑碑가 있다그 외에도 벽에 붙은 2쌍의 황제 친필이 있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했다.

 

 

<현공사(顯功祠)>

일행이 모두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길에 현공사가 눈에 띄어 눈총 받을 것을 감수하고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 노룡두를 축성하거나 수비했던 것으로 보이는 장수들 소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