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3 - 영평부 고성, 이제고리, 북경 古관상대

큰누리 2016. 9. 18. 02:50

<16. 8/5. 열하일기 따라가기 6일차 일정1>

노룡호텔-영평부 고성-노룡현 이제고리-북경 KFC에서 점심-동악묘-조양문 터를 스쳐지나고-북경 古관상대-북경 남당-북경 유리창-정양문, 전문대가-북경 본가 망경점에서 한식-북경 Holiday Inn Express 투숙.

 

- - 동악묘는 내용이 많아 6일 차 일정2로 미루고, 북경 남당과 유리창, 정양문(전문) 등은 일정3으로 묶었다.- -

 

진황도 노룡(루롱)호텔에서의 아침 식사는 최악이었다. 고수(향신료)는 빠졌지만 짜디 짠 밑반찬과 전혀 간이 안된 빵, 멀건 죽 일색인 호텔식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부실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먹는 아침 식단과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노룡호텔 객실에서 본 창밖 풍경과 장례행렬>

눈을 뜨자마자 습관대로 창밖 풍경을 둘러보며 촬영하는데 대로변 상가 뒤쪽에서 갑자기 폭죽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한참 관찰을 했더니 장례행렬이었고, 장의차에 관을 이송하는 중이었다. 

객실이 9층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줌으로 당겼다. 운구와 조문객을 위한 2대의 차와 만기 같은 것을 실은 용달차 1대가 대로에 주차해 있고, 폭죽을 터트린 장례행렬이 장의차로 가는 중이다. 9개의 (인조로 보이는) 화환은 나비, 화분에 심은 꽃 등으로 꾸몄고, 상주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런 상복을 입거나 두건만 쓴 이들이 있었다.  제대로 상복을 갖춰입은 이는 상주의 직계이고, 모자만 쓴 이는 우리나라처럼 사위 같은 움식구가 아닐까 추측했다. 차에 관을 실을 때 다시 한번 폭죽을 터트렸다. 아무튼 예상하지 못한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영평부 고성 바깥쪽 성벽>

영평부 고성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 성벽을 촬영한 것이다. 일부는 보수를 한 곳도 있고, 일부는 비교적 온전하고, 일부는 무너져 내렸다.

 

 

<영평부 고성>

영평부 고성 서문 맨 위에 '망경(望京)', 즉 서울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횡편이 박혀 있다. 엇갈리게 옹성과 성문을 배치한 서쪽 성문과 주변의 성벽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보수를 하지 않아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성문과 무너져 내린 성벽에서 기존의 성벽에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덧붙인 성벽을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성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북방민족과 한족이 각축을 벌이던 곳이었으니 한 때는 고구려 성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하지만 벽돌과 흙이 여러 켜 덧대어진 성벽만 보고는 험한 주변 지형을 이용한 석성이 기본이었던 고구려 성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추측했다무너져 내린 부분에서 성벽을 덧댄 과정, 성문의 벽에 성문을 어떤 식으로 끼웠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연행단이 통과하는 길목에 있던 영평의 어느 집에서 연암은 현지인이 새긴 고려진공도에 나타난 조잡한 조선 사신도를 보고 자존심 상해한다. 또 조선 유명화가들의 작품 목록이 적힌 <열상화보>를 입수하는데 한중 예술교류를 증명하는 경이적인 자료였다. <열상화보>에는 김정, 김식, 윤두서, 정선, 강세황 등 17명 화가의 작품 30점 목록이 수록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의 이정, 김식, 이경윤, 김명국 등은 중국 절파의 진경산수 화풍을 수용했고, 윤두서, 정선, 심사정, 강세황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은 한국적 화풍을 개척하고 미불, 예찬, 문징명, 동기창 등의 중국 실학풍 회화를 융합했다. 

 

연암보다 앞서 연행을 다녀오고 연행록(을병조천록)을 남긴 홍대용의 글에 표현된 난하, 이제고리, 영평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우리 일행은 일찍 노룡현을 출발하니, 다리 다리 두 강물 위에 걸려 있네. 성의 문루는 새롭게 지었는데, 관문으로 드나드는 길은 옛길 그대로네. ...중략... 서쪽으로 바라보니 고죽국이 있었다니. 이제(백이숙제)의 충절 찬가 채미가를 읊어 보네.‘

 

고죽국은 은나라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과 요녕성 조양시에 걸쳐 있었으며 백이, 숙제의 아버지의 나라였다고 한다주나라 무왕에게 은나라가 멸망 당하자 백이, 숙제 형제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먹으며 연명했다.

 

 

<영평부 고성 서문>

 

 

 

 

<영평부 고성 안쪽 모습>

 

 

<성문 통로>

보수과정, 성문을 끼었던 홈과 문턱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제고리비(夷齊故里碑), 청절묘 유지비(淸節廟 遺址), 소재지 입구>

'이제고리(夷齊故里)'는 백이와 숙제 형제의 고향이란 의미인데 현재 이제고리라 불리는 곳은 옛날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동행한 분들은 우스갯소리로 '고사리 뜯을 만한 산은 커녕 언덕도 없다, 고사리도 주나라 땅에서 난 셈인데 고사리는 왜 뜯어먹었느냐'고 했다우리가 못본 수양산은 사전 강의에서 난하 주변에 있는 것을 사진자료로 확인은 했다. 수양산과 이제묘는 연행단들이 성리학자로서 필수로 들리던 정신적 공간으로 난하 주변에 있었다. 이제묘는 사라지고 현재 제철소가 들어섰으며 수양산도 절반이 파여나갔다고 한다.

 

이제고리는 작은 시장을 지나 길가에 자혜원(慈惠園)이란 안내석이 있고, 조금 더 나가면 사찰로 보이는 건물이 언덕배기에 있다. 사찰 오른쪽 아래에 이제고리비, 청절묘 유지비 2기만 달랑 있다. 예전에는 규모가 큰 사당이 있었다는데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지금은 야산, 혹은 언덕일 뿐이다청절묘 유지비는 그나마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다른 이들의 글처럼 쓰레기더미는 아니고, 아래에 민가 몇 채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예전에 보신탕, 삼계탕집이 있던 후미진 야산 같은 곳이다그런 곳이니 주변 사람들이 무단투기를 했을 테고... 새끼 손톱만한 알을 줄줄이 단 대추나무들이 쐐기풀처럼 주변에 얽혀 있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연행단은 이곳을 지날 때 고사리로 나물을 해먹으며 이제의 충절을 기렸다. 그래서 고사리를 준비를 못한 종이 곤장을 맞고, 고사리가 사람 잡는다고 푸념하는 내용이 열하일기에 나온다.

 

 

<이제고리비, 청절묘 유지비>

두 비는 소각장 왼편 앞쪽에 있고, 길이 나 있지 않아 주변의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앞에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청절묘 유지(淸節廟 遺址)비가, 조금 떨어진 곳에 이제고리(夷齊故里)비가 있다. 유지비가 있으니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너무 후미지고 방치되어 있었다. 문화혁명 때 파괴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작살이 났겠지만 가장 기대에 못 미친 유적(?)이었다.

 

 

 

 

<노룡현에서 북경으로 이동>

노룡현에서 280km 떨어졌다는 북경까지 길이 막히는 걸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연행단들이 걸어서 이동한 이 구간을 우리는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북경 도착을 2시간 앞둔 옥전휴게소(유티안. 천진 당구=당산 소재. 중국 최대 지진 발생지역)는 지금까지 본 중 휴게소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옥전(현)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호질'의 창작 배경이 된 곳인데, 휴게소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가 고속도로로 통과한 지점은 열하일기에서 풍윤-노각장-고려보-옥전 등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화장실 해결을 하고 공비로 복숭아, 자른 메론과 수박, 알포도를 사서 나눠먹었다현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과일상인이 한국인 인줄 알았으면 과일을 안 팔았을 거라고 했단다사드 배치 때문에 과거에 우호적이었던 중국인들의 인심이 사나워진 것이다사드 한국 배치가 싫긴 하겠지만(나도 싫다!) 그렇다고 관광을 온 한국인들에게 물건까지 안 팔겠다는 건 너 댓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싸구려 군중심리라니...

 

1140분, 북경에 다가갈수록 교통체증이 극심해졌다.  속도방지 턱은 왜 그렇게 예리하게 만들었는지 한번 지나칠 때마다 온몸에 충격이 왔다우리 버스 기사의 경적소리와 함께 답사 내내 나를 괴롭힌 원흉 중 하나였다톨게이트 지나자마자 경찰 검문(省이 바뀔 때마다 양쪽에서 모두 검문), 이후 북경 출입허가증을 받는다가뜩이나 교통체증이 심한데 이런 절차들이 체증을 몇 배는 더 가중시켰다12:40에 북경에 입성했고, 13:10에 동악묘 근처에 있는 KFC 매장으로 갔다. 

 

 

<북경에 입성하여 점심을 먹은 KFC 매장>

답사 시간이 빡빡하여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곳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햄버거는 국제 공용의 음식이니 먹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칠순쯤 되는 몇 분이 군소리 없이 드시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하긴 어떤 면에서는 입에 안 맞는 현지식을 먹는 것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매장에 앉아있는 젊은이들 모두 일행이 있을 텐데 대화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휴대폰을 조작하고 있었다지하철에 앉아있으면 좌석의 7명 중 최소한 6명은 휴대폰을 조작하거나 이어폰을 꽂은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다덕분에 중국인들이 옆에 있으면 소란스러워 고통스러울 지경인데 조용해서 좋았다.

 

 

 

<조양문 터>

연경(북경)에 도착한 연행단은 조양문 밖 2리에 있는 동악묘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문무반열에 맞춰 조양문을 통하여 숙소인 옥화관으로 향하였다. 조양문은 사라지고 그 터에 사진과 같은 표식만 남아있고, 우리가 건너 뛴 옥화관 터는 현재 최고인민법원 터로 남아 있다.

연암 일행은 1780년 8월 1일에 북경에 입성하여 현재 민족문화궁 뒤로 추정되는 서관에서 4일간 머물다 건륭제의 부름을 받고 8월 5일, 열하로 출발했다.. 

 

- - 중간에 연행단이 의관을 갖춰입었던 동악묘는 분량이 많아 다음 차수로 빼고- -

 

 

<북경 古관상대>

북경 관상대는 천주당(동,서,남,북당), 유리창과 더불어 연행단들이 신문물을 접하는 장소였다. 옥상에 천문시설이 있어 연행단으로 참여한 식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보려 했으나 관리들이 뇌물만 받고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연암도 청심환을 뇌물로 쓰고 들어가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도 10년만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비공개를 했는지도 모른다.

 

연행록에 청심환이 돈과 맞 먹는, 혹은 그보다 더 귀한 거래수단으로 자주 등장한다. 

연행단들은 은자 외에 개인적으로 부채나 청심환을 구입하여 연행 시 사례를 할 때 자주 이용했고, 중국인들은 청심환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고북구의 절에서 말린 오미자 하나를 집어먹었다고 연암을 도둑으로 몰았다가 연행단 하인에게 따귀를 맞은 승려의 목적도 청심환을 얻기 위함이었다.

중국이 원산인 청심환을 중국인들이 조선의 청심환에 집착했던 이유는 가짜가 많은 중국 청심환에 비해 조선은 국가가 직접 관리해서 약효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경 고관상대 배치도>

 

 

<둥근 문이 아름다운 고관상대 내부>

입구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잔날개여치로 보이는 곤충이 초록색 통에 담겨 '찌릿 찌릿' 울고 있어서 신기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학창시절 생물시간에 배운 것처럼 여치가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답사하는 동안 플라스틱이나 보리집으로 만든 얼개 통에 여치처럼 소리를 내는 곤충이나 새를 가두어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을 종종 보았다.

어쩌면 이런 나의 소소한 호기심도 연암의 호기심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

 

 

<고관상대 전청(展廳)>

천문학자 4명의 소상과 천문기구들을 전시해 놓았다.

 

 

<고관상대 전청(展廳)의 천문학자 4명의 소상>

위는 조충지와 일행(승려)이고, 아래는 장형과 서광계이다.

 

 

 

<고관상대 전청(展廳)의 간의>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구이며, 혼천의를 간편하게 개량한 것이다.

 

 

<고관상대 전청(展廳)의 성구>

항성 별자리를 관측하던 기구이다.

 

 

<고관상대 전청(展廳)의 월구(달시계)>

 

 

<고관상대 전청(展廳)의 정방안>

방위를 바로 잡아서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수평판이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의 지평무일구>

바늘 같은 형태와 바닥의 숫자판, 일구라는 이름으로 보아 해시계의 일종이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의 규표>

정확한 1년의 길이(365일 1/4일)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한 기구이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의 영롱의>

이 기구의 용도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세종시대에 제작된 혼상과 모양이 같으므로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 천문관측기구가 아닌가 한다. 혼상은 별들의 위치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구로 별이 뜨고 지는 것,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던 기구이다. 그런데 이 영롱의에는 별자리 표시가 안 보인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의 정방안>

방위를 바로 잡아서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수평판으로 전청에도 쇠로 만든 정방안이 있는데 이것은 중앙의 바늘침이 없어졌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 원나라의 곽수경이 이슬람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과 형태가 같은 간의>

간의는 혼천의를 간편하게 개량한 것이다.

 

 

<고관상대 야외 전시장의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역할을 한 기구이다. 우리나라에도 세종대왕 시대에 제작된 비슷한 모양의 혼천의가 있고, 만원권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북경 고관상대 옥상>

 

 

<북경 고관상대 옥상의 천문관측기구들>

황도경위의, 신혼천의, 천체의, 지평경위의, 상한의, 기한의, 적도경위의 등 대체로 규모가 큰 천문관측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