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5 - 북경 남(천주)당, 유리창, 정양문(전문)

큰누리 2016. 9. 21. 00:35

<16. 8/5. 열하일기 따라가기 6일차 일정3>

노룡호텔- 영평부 고성- 노룡현 이제고리- 북경 KFC에서 점심- 동악묘- 조양문 터를 스쳐지나고- 북경 古관상대북경 남당- 북경 유리창- 정양문, 전문대가- 북경 본가 망경점에서 한식- 북경 Holiday Inn Express 투숙.

 

 

<북경 남(천주)당>

1601년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로부터 천주교회 설립을 허가 받아서 1605년에 세운 성당으로 중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이며 원래 이름은 선무문천주당이다베이징 동서남북에 천주당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당으로 불렸다.

동천주당은 남당과 함께 왕부정대가에 건립되었으나 수차례 불타고 1904년에 재건되었고, 서천주당은 현재의 십찰해 부근에 좀 더 후대에 지었다북천주당은 1703년 동남해 호숫가에 건립된 시수쿠성당이며 이승훈이 1784년에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남당에는 도서관과 천문대까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서양 신문물의 보고였다1650년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이 대규모로 재건축 하였고, 1703년 유럽식 건물로 재건하였으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1730년 확장 재건하였으나 1775년 소실되었고, 다시 건축했지만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다시 소실되었다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재건되었고, 1979년부터 중국 최초로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남당을 설립한 마테오 리치가 가져온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만력제 이래 황제들의 관심이 커서 재건을 할 때마다 황제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북경에 도착한 연행단 중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연암 등 서양문물에 관심이 큰 북학파 학자들은 천주당을 찾았다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 인질로 북경에 끌려가 한달 정도 머물다 귀국한 소현세자는 당시 남천주당에 있던 아담 샬과 만났고, 귀국할 때 아담 샬로부터 천문학, 수학책, 천주교 관련서적을 선물로 받아왔다.

 

연암도 이곳을 찾아서 외관을 보고 지붕이 종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였고, 천장에 그려진 벽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하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고 표현했다

그 외에도 내부 구조에 대해 상세히 묘사를 했는데 동악묘의 소상들에 대해 혹평을 한 것과 달리 아치형의 출입문과 실내장식, 색감이 다채롭고 원근감이 표현된 벽화사실적인 성모상과 예수상 등에 대해서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기해하는 연암의 모습이 상상될 정도로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관찰했고, 그것을 자세히 묘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남당은 1605년 최초로 건설된 이래 여러 차례 소실되거나 파손되어 복구와 개축을 거듭했고, 1904년에 재건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북경 남(천주)당 외관>

전면의 문이 원래 남(천주)당의 정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폐쇄하고, 왼쪽의 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북경 남(천주)당 출입문>

왼쪽은 남(천주)당 설립자인 마테오 리치, 오른쪽은 프란시스 하비에르이다.

 

 

<북경 남(천주)당 출입문의 聖 프란시스 하비에르像>

하비에르 신부 스페인 출신의 신부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등 6명과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여 로마 카톨릭의 개혁운동을 주도했다. 1541년 인도로 출발하여 1년 쯤 뒤 인도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한 이후 1549년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다. 1552년 중국으로 선교를 위해 떠났으나 쇄국정책으로 마카오에서 중국대륙으로 숨어 들어갈 준비를 하다 열병으로 숨졌다. 하비에르 신부 동상을 이곳에 세운 이유는 최초로 중국 선교를 시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경 남(천주)당 출입문의 마테오 리치. 중국명 利瑪竇(1552~1610)>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로 1577년 인도 선교단에 참가하여 1578년부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1582년에 사제가 되었다1583년 중국 광동성에 입국하여 예수회 첫 교회인 선화사를 설립하고 자명종, 지구의 등 서양의 선진 문물로 상층관료들과 친교를 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다쑤저우, 난창을 거쳐 1597년 중국선교회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북경에 들어갔지만 체류 허가가 나지 않아 난징으로 돌아갔다 1601년 다시 북경으로 왔다황제에게 어렵게 영주허가를 받고 1610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마테오 리치는 총 27년간 중국에 머물며 남(천주)당 등 여러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접목시키는 독특한 포교방법으로 동서문명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서광계와 공동으로 <기하원본>, <측량이동> 등을 번역하였고, 이지조와 공동으로 <동문산지> 등을 번역하였다<산해여지전도>, <곤여만국전도> 등의 세계지도를 제작, 간행하였고, <기독교원정중국사>를 저술하였다.

 

 

<북경 남(천주)당 순치제천주당비>

 

 

<성모동산과 북경 남(천주)당>

 

 

<북경 남(천주)당 마당>

 

 

<북경 남(천주)당>

 

 

<북경 남(천주)당 내부 중앙 제대와 성모 마리아상>

 

 

<북경 남(천주)당 오른쪽 회랑의 성 요셉상>

남(천주)당은 3개의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성모상, 왼쪽 회랑에는 예수상이 있다.

 

 

<유리창(流璃廠)>

유리창의 원래 명칭은 해왕촌으로 원, 명대에 황궁이나 황사(皇寺) 등의 축조에 필요한 유리기와를 굽던 공부 산하의 관제 도요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유리창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기와를 굽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자연스럽게 서점가가 형성되었다자금성 완성 후 유리기와를 굽던 도요가 사라지면서 서점가로 자리 잡았고 지식인들이 즐겨 찾게 되었다건륭제 시기에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전국의 서적을 수집했는데 진귀한 책들이 유리창에 모여들면서 서점, 미술품이나 문방사우 등을 파는 문화거리로 자리 잡았다.

 

연행단에게 중국의 서적과 문물 등을 접하고 중국의 인사들과 교류하던 중요한 공간이었다당시 황궁 밖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과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였다홍대용은 유리창 부근의 간징후퉁에서 중국의 지식인 엄성, 육비, 반정균 등과 필담으로 교유하였고, 연암은 유리창 동가의 양매죽사가 후퉁의 육일루에서 거인 황포 유세기 등과 교유하였다.

 

 

<유리창신건랑교(流璃廠新建廊橋)>

 

 

<유리창신건랑교(流璃廠新建廊橋) 아래의 웅보당>

유리창교 건너편만 유리창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편도 넓은 의미의 유리창이었던 것 같다. 문방사우를 주로 파는 곳인데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이란 글이 보인다.

 

 

<유리창신건랑교(流璃廠新建廊橋)를 건너기 전 이 편의 패방형 건물 장식과 건물을 내려다 본 모습>

 

 

 

<유리창신건랑교(流璃廠新建廊橋) 건너편의 유리창 입구>

 

 

<유리창 거리>

현재 200여개의 관련 가게가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1리 정도의 짧은 거리에 인적도 뜸해서 옛날의 영화를 느끼기 어려웠다. 맹강녀묘와 더불어 가장 실망스러웠던 곳이다.

중앙의 중심도로와 십자형으로 후퉁들이 연결되어 있고 후퉁에도 서점이나 골동품,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비슷하지만 훨씬 한산하다.

 

 

 

 

 

 

 

 

<정양문(正陽門, 前門), Front Gate , Qiánmén>

중국 베이징의 중심지 천안문광장 남쪽 끝에 위치하는 과거 베이징 내성의 정문이다1419년 명()의 영락제 때 처음 건축되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인해 여러 번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4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과거 베이징 성은 황제의 거주지인 내성과 일반인의 거주지인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두 20개의 성문이 있었다이 중 내성에 설치된 9개의 성문 중에서 외성에서 내성의 중심부로 출입할 수 있는 정문이 바로 정양문이다이 문은 황제가 천단으로 제사 드리러 가기 위해 통과하던 문으로, 과거 명청시대에는 황제의 마차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그러나 장례행렬이나 장례마차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중국 당국에 의해서 베이징성의 성문은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정양문은 그 웅장함과 독특한 모양 때문에 과거 베이징의 상징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높이는 42m로 베이징에 있는 문루 중에 가장 높다1949년 공산당이 승리한 후 중국인민 해방군 베이징 수비대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1980년까지 군대가 주둔하였다.

 

정양문의 남쪽 정면에는 과거 화살을 쏘는 망루로 이용되었던 전루(箭樓)가 세워져 있다원래는 정양문과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도로를 직선으로 정비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현재는 망루만이 남아있다정양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전루는 개방되지 않는다.

  - -[네이버 지식백과] 에서 퍼옴- -

 

 

<정양문(正陽門, 前門)>

 

 

 

<정양문 전루(箭樓)>

전루 문 뒤로 정양문이 보인다. 

 

 

<전문대가(前門大街)>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앞 육조거리인데 이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현지 가이드와 지기님은 일행을 전문대가로 인도했지만 나는 이 때쯤 한발짝도 더 떼기 힘들 정도로 지친데다 발에 쥐가 나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혼자 처져 정양문 주변만 둘러보고, 폭염으로 지치고 목이 말라 구멍가게에서 맥주 캔 하나를 사서 마시며 쉬엄쉬엄 걸어 우리 버스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북경 본가 망경점(望京店)>

이곳에서 두 번 저녁을 먹었다. 맛은 글쎄, 우리집에서 먹는 맛 수준? 빨리 먹으려고 비빔밥을 시켰더니 밭에서 나물을 캐다 데치고 무쳐서 비벼오는지 무지무지 오래 걸려 나왔다.

 

 

 

 

<열하일기 따라가기 6일 차 숙소인 북경 Holiday Inn Express와 객실>

Holiday Inn이 들어간 체인호텔은 대체로 객실이 약간 좁지만 꼭 필요한 건 갖추고 있고, 누구나 예측 가능한 시스템이어서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