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6 - 고북구장성

큰누리 2016. 9. 24. 01:10

<열하일기 따라가기 7일 차 일정1>

북경 홀이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 조식- 경숭고속도로-태사둔휴게소- 고북구장성- 승덕(열하)- 승덕 백가춘주루에서 현지식 점심- 리프트 카를 타고 경추봉- 피서산장(열하천)- 자건대주루에서 현지식 저녁- 강희대제 공연 관람- 승덕 가화주점 투숙.

 

 

<고북구(古北口, 구베이커우)>

중국 베이징시 밀운현 북동부 만리장성에 있는 요새. 면적은 83.1이며, 인구는 11천 명(1997)이다.

중국 오지(奧地)에서 장성 밖으로 출입하는 관문의 하나이며, 만리장성의 유명한 관문 중의 하나이다동쪽의 시펑커우(喜峯口)와 더불어 예부터 베이징의 이중진(二重鎭)이라 하였던 요충지였으나, 최근에는 관광지로 변모하였다청대(淸代)에는 베이징과 러허(熱河)를 연결하는 요지였으며, 현재는 베이징과 중국 동북지구를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옛 이름은 '후베이커우(虎北口, 호북구)'이며, 차오허(潮河, 조하)가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관문의 길이는 22.5m이며, 2개의 절벽에 험한 길이 나 있어 예로부터 군사전문가들이 전쟁시 반드시 거쳐가는 격전지였다북방민족이 중국을 침입할 때 이용했던 통로로서, 특히 명나라 때는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과 쥐융관(居庸關, 거용관)의 중간에 위치하고북동쪽의 시펑커우와 북서쪽의 두스커우(獨石口)가 쌍벽을 이루어 수도 베이징을 몽골족의 침공에서 지키는 제일선이 되었다고 한다청나라 때는 병영지의 물자 수송을 위해 청더(承德, 승덕)'피서산장(避暑山莊)'을 건설하였는데, 특별히 이곳에는 세관을 두지 않았다.

 

시펑커우(喜峯口, 희봉구)는 허베이성(河北省) 첸시현(遷西縣) 북쪽에 있으며, 두스커우(獨石口)는 츠청현(赤城縣)의 북쪽에 있다이 세 곳에는 만리장성의 안쪽에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구축한 성벽이 남아 있다동쪽의 진산(金山, 금산)산맥에 위치한 만리장성은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곳이다남쪽에는 대규모의 미푸(密傳) 댐이 있어 수력발전과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징퉁철도(京通鐵道)와 징청철도(京承鐵道)가 통과하며, 고대 병영지의 험한 길은 오늘날 도로가 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구베이커우 [Gubeikou, 古北口(고북구)] (두산백과)- -

 

고북구장성에 대해 연암은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은 창평을 경유하면 서북쪽으로 거용관장성을 나가게 되고, 밀운을 경유하면 동북쪽으로 고북구장성을 나가게 된다고북구로부터 장성을 따라서 동쪽의 산해관까지 700리이고, 서쪽의 거용관까지 280리이다거용관에서 산해관 사이에 있는 만리장성중에서 가장 험준한 요새로는 고북구 장성만 한 곳이 없다몽고가 중국에 출입할 때 이곳이 항상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에 여러 겹의 관문을 만들어서 그 험준한 요새를 제압하고 있다.'

 

다른 블로거들의 글을 보니 고북구는 번듯한 성 출입구도 있고 주변에 큰 관광마을도 있었으며, 개방된 장성은 대체로 입장료를 받았다. 우리는 입장료조차 지불할 필요가 없는 고북구장성 중간으로 들어가 앞, 뒤를 자르고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만 본 것이었다. 고북구에 있는 몇 개의 장성 중 (사진으로 대조한 결과) 반룡성 장성이었는데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만리장성의 일부분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앞, 뒤로 이어지는 다른 장성들이 실타래처럼 줄줄이 끌려나와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검색해서 대충 꿰어맞추니 잘 알려진 장성이나 관문만 해도 수가 어마어마했다. 나중엔 골머리가 아파 괜히 건드렸다 싶기도 하고, 이 참에 대강이라도 훑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해서 일단 이 글에 올린 것까지만 하기로 했다. 

먼저 만리장성을 구성하는 주요 성을 찾은 후 일일히 블로그와 자료를 뒤져가며 각 성의 특징을 정리했다. 주요 성에 관한 것은 사학과 관련된 내용보다 산행을 하는 분들의 사진자료가 더 많았다. 덕분에 화려하거나 웅장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성벽, 적대, 망루 사진은 실컷 볼 수 있었지만 자료는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만리장성만 100여 차례, 그것도 계절별로 산행하는 이들의 글과 아름다운 만리장성 각 구간의 사진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 좀더 건강했더라면 지금부터라도 각 구간별로, 혹은 노룡두부터 가욕관까지(무리인가? ) 답사하고 싶은 욕망이 잠시 일었다. 내 나라 땅도 제대로 못 돌았는데, 그저 욕망일 뿐이다.

 

 

<주요 만리장성>

- - - - -베이징 동쪽- - - - - 

 노룡두 장성(老龍頭長城)

 산해관(山海關)

 

- - - - - 베이징 주변- - - - - 

사마대 장성(司馬台長城) : 북경에서 120km 떨어진 북부 외곽에 위치한 장성으로 명나라 때인 1368년에 축조되었다만리장성 중 칼날 같은 가장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장성 중 가장 험하고 천하의 절경으로 불린다1987년 복구공사를 했고 1990년부터 개방되었다35개의 망루가 있으며, 정상에 16개의 망루가 있으나 안전 때문에 12개만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금산령 장성(金山嶺長城) : 북경 밀운현과 하북성 난평현을 가르는 연산산맥에 축조했으며 고북구에서 동쪽 약 7.5km 지점에 있다명나라 융경 4(1570)에 축조했으며 총 15km의 구간에 70여 개의 망루가 있다성의 벽돌이 아름다워 2의 팔달령으로 불린다.

 반룡산 장성(蟠龍山長城) : 우리가 들른 구간은 다른 블로거들의 사진과 대조해 본 결과 반룡산 장성 구간이라고 판단했다비교적 험준하지 않은 지형이며, 흙담부터 명나라 시기에 조성된 벽돌 담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쌓고 보수한 흔적을 모두 볼 수 있다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으며 만리장성에서 당연히 있는 성벽 위의 통로가 남은 곳 또한 거의 없었다.

 고북구 장성(古北口長城) :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와호장성, 동쪽은 반룡장성이다반룡장성으로 오르면 금산령장성과 사마대장성으로 길이 계속 이어진다와호장성은 우리가 고북구장성이라 불리는 곳을 둘러보고 고속도로로 진입하자마자 왼쪽으로 보였던 상대적으로 험준해 보이는 장성이었던 것 같다와호장성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성이 높고 가파른 곳이 많았다.

 대진욕 장성(大榛峪長城) : 자료 못 찾음.

 황화성 장성(黃花城長城) : 이도관장성(二道關長城) 관문은 두 번째 관문이란 뜻으로 황화성 장성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져 있으며 북경 정북쪽에 있는 중요한 관문으로 황화성의 방어를 위해 명나라 때 건립되었다장성을 두 겹으로 만들었으며 전구장성 지역에 있는 북경결과 함께 외장성과 내장성의 중요한 부분이다현재 적대 주위로 마을이 들어서 끊어진 구간이 많다.

 모전욕 장성(慕田峪長城) : 북경 중심에서 약 80km 떨어진 회유현 삼도하 마을 북쪽에 있으며 1986년에 정비하여 개방했다복원 시 원형을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만리장성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다모전욕은 거용관과 고북구 산맥 가운데 있는 좁은 구간으로 명나라 성조 2(1404) 북경으로 환도한 뒤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가파른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성했다.

 전구 장성(箭扣長城) : 회유현 발해진 내 진주천촌 서북부에 위치하며 명나라 때 축조된 8km 구간의 장성으로 만리장성 중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유명하다응비도앙, 천제, 소포탈라 등이 전구장성에 있다남쪽성벽은 거의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험하며 북쪽성벽은 비교적 완만하다사진촬영의 명소로 불려 사진자료는 많으나 정작 전구 장성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팔달령 장성(八達嶺長城) : 북경에서 약 80km 떨어진 연경현에 위치하며 현재의 팔달령 장성은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나라 홍치제 18(1505)에 축조된 것이다만리장성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고 용이 춤을 추는 듯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이 아름다워 만리장성 중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팔달령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축성했으며 황궁이 있는 북경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3리마다 병영을 지어 병력을 주둔 시켰다평균 8m 높이이며, 하단에 대리석을 깔고 양 옆에 벽돌을 쌓은 후 중간에 흙을 넣고 그 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 다른 장성에 비해 견고하다

 수관 장성(水關長城, 구문구장성 九門口長城) : 요녕성 수중현 이가향에 소재하며 남으로 산해관과 15km 거리에 있다동북지역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북경과 심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북제 때 축조된 것을 명나라 홍무 14(1381)에 확장했다1704m로 구강하에 97.4m의 석교를 세우고 9개의 수성문을 만들어서 만리장성 중 유일한 수상장성이다물살에 떠내려오는 쓰레기나 얼음으로부터 교각을 보호하기 위해 교각 양쪽에 참용검(斬龍劍)을 설치했다명나라 멸망 직후에 이자성과 오삼계가 이곳에서 일편석대전을 벌이기도 했다.

거용관(居庸關) : 거용관은 산해관, 가욕관과 함께 만리장성 3대 중의 하나로 관문이자 요새였다북경에서 60km 떨어진 창평구에 있으며 북경에서 내몽고로 통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둘레 4km의 만리장성 관문으로 남구(南口), 관성(關城), 상관(上關)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제가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관 내부에 침실, 사원, 정원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관성 남문 안에 있는 운대 좌우로 산봉우리를 따라 만리장성이 이어진다장성 초입에 모택동의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 휘호를 새긴 비석이 있다.

 삽전령 장성(挿箭嶺長城) : 삽전령 장성에 관한 자료는 없고 사진자료만 있었는데 성벽 주변에 바위들이 많아 경관이 아름다웠다.

 

 

- - - - -베이징 서쪽- - - - - 

 노우만 장성(老牛灣長城)

 임유진 북루(楡林鎭北樓)

 삼관구 장성(三關口長城)

 텐겔사막 장성(텐砂漠長城)

 단협구 장성(丹峽口長城)

 가욕관(嘉峪關)

 하창성(河倉城)

 옥문관(玉門關)

 양관(陽關)

 

<북경에서 승덕 사이의 경승고속>

그동안 광야(요동벌판)만 이어지다 경승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부터 험준한 산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연암 일행은 북경(연경)에 도착하여 잠시 머무르다 열하(승덕)의 피서산장으로 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74명의 선발대를 추려 승덕으로 향한다. 황제 생신까지 일정이 촉박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리를 해가며 250km 떨어진 승덕까지 나흘 동안 강행군을 해야 했다. 

250km라면 대략 서해안고속도로로 서울에서 군산 정도의 거리이다. 우리가 잘 뚫린 고속도로로 가는데도 3시간 이상 걸렸다. 아침 출근 시간 대에 북경에서 진입한 경승(북경-승덕)고속도로이다. 

 

 

<태사둔휴게소의 봉화나무>

우리는 경승고속도로를 이용해 중간 지점 쯤인 고북구로 빠져 나와 고북구장성을 들른 후 다시 고속도로로 승덕에 갔다. 북경과 고북구 중간에 들른 태사둔휴게소에서 본 봉화나무이다. 이번 답사에서 가로수로 흔히 보인 나무로 잎은 가중나무 같고, 열매가 성화처럼 생긴 이 나무가 궁금해서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봉화나무'라고 했다.

 

 

<고북구장성 입구>

경승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샛길로 들어서서 고북구장성 입구를 찾는데 애로가 많았다. 현지 가이드, 버스 기사 모두 초행인지 한참을 헤맸다. 고북구장성 입구의 민속촌에 잘못 들어가 좁은 골목에서 차를 되돌리지도 못하고 전선줄에 걸려 애를 먹었다.

 

글을 올리면서 자료조사를 한 결과 고북구에는 와호장성, 반룡산장성, 금산령장성, 사마대장성 등이 걸쳐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자료와 사진으로 대조한 결과) 고북구장성 중에서 반룡산장성을 들른 것이다. 막연하게 고북구장성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자료를 찾느라 무지 애를 먹었다.

나는 '고북구'라는 이름 자체가 마냥 신기했고, 귀에 익은 것이라고는 '야출고북구기'뿐이었다. 현지에 가서 보고 답사기를 쓰면서 열하일기 코스에는 구(口), 참(站), 보(保), 관(關) 등이 붙은 지명이 많으며, 그런 것들이 고개, 물길, 역참제도와 관련하여 붙은 이름이고, 변방이기 때문에 군사시설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북구장성 입구의 민속촌>

우리 버스가 좁은 골목에서 차를 돌리지도 못하고 전선에 걸려 고생한 곳이다. 반듯한 일자 가옥(一字 家屋) 때문에 민속촌 같지 않지만 엄연한 민속촌이다. 만주족 전통가옥은 이런 식으로 모던한 일자형이다.

 

 

<고북구장성 입구 마을의 만리장성 축조 과정을 재현한 소상>

고북구라는 이름만 알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집이 서너 채 있었던 것 같고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자니 이런 것이 있었다.

 

 

<(우리가 본) 고북구장성의 초입의 망루>

만리장성만 파는 오타쿠 블로거들의 글을 보니 우리가 고북구장성 초입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은 고북구장성 중 중간 쯤에 해당하는 반룡산 장성이었다. 험준하지 않고 비교적 평지에 조성되어 길이 평탄하고, 흙담부터 명나라 시기에 조성된 벽돌장성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쌓고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으며 만리장성에서 당연히 있는 성벽 위의 통로가 남은 곳 또한 거의 없었다최근에 각색한 것처럼 말끔히 보수한 다른 만리장성 명소와 다른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이다.

 

 

 

 

 

<처음 들른 망루를 되돌아 보고...>

 

 

<앞으로 전진>

자료에 의하면 고북구장성에서 동쪽으로 사마대장성-북경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금산령장성이 이어진다. 우리가 나아간 방향은 동쪽에서 서쪽이었으니까 전방은 금산령장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진으로 구분하면 나는 가장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앞에 일행이 보이면 금산령장성(서쪽) 방향이다.

 

 

 

<뒤돌아 보고...>

 

 

<전진...>

뾰족하게 남은 망루 터가 특징적이어서 이곳이 반룡장성이라고 확신한 근거가 되었다. 이 망루 터는 어떤 사진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뒤돌아 보고...>

푹푹 찌는 날이었고 시계가 선명하지 않았지만 능선마다 아련하게 망루나 적대가 보인다.

 

 

<전진...>

 

 

<뒤돌아 보고...>

 

 

<전진...>

첫번째 사진 왼쪽에 보이는 망루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다. 몸이 날랜 분들은 다음 망루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 반룡산장성 망루와 주변, 내부>

첫번째 망루에서 목적지인 이곳까지 오는데 20분 남짓 걸렸다. 거리가 꽤 긴 편인데 중간에 거의 허물어진 망루 터 하나와 평평한 곳이 두 곳 더 있었다. 복원을 전혀 안 한 구간이기 때문에 최소한 그 세 군데에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최종 목적지 반룡산장성 망루에서 본 다음 망루>

앞쪽은 우리가 본 고북구장성 구간에서 성벽이 가장 온전한 곳이다. 성벽 통로가 산해관이나 팔달령 등과 달리 (벽돌이 아닌) 흙길 형태로 남아있고 성벽 좌우도 (통로보다 더 솟은 것이 아니라) 높이가 같다.

  

  

 

 

<최종 목적지 망루에서 본 고북구장성-반룡산장성)>

비교적 높은 위치라 40여분 동안 우리가 걸은 구간이 거의 전망이 된다. 장성은 현재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인 산과 하나가 되어 능선을 부각시키고 있고 이런 시각적 매력 때문에 장성 답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이 느는 것 같다. 시계가 좋았다면 더 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산하며 본 망루>

우리가 답사하는 동안 유일하게 만난 중국인 커플이다. 느긋하게 문에 걸터앉아 촬영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산하며 본 고북구장성-반룡산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