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17 - 승덕 경추봉, 열하문묘

큰누리 2016. 9. 27. 23:50

<열하일기 따라가기 7일차 일정2>

북경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 경숭고속도로- 태사둔휴게소- 승덕(열하)- 백가춘주루에서 현지식 점심- 리프트 카로 경추봉- 피서산장(열하천)- 자건대주루에서 현지식 저녁- 강희대제 공연 관람- 승덕 가화주점 투숙.

 

<열하일기 따라가기 8일차 일정1>

가화주점에서 조식- 바로 앞에 있는 열하문묘- 외팔묘 답사(보타종승묘, 수미복수지묘, 보녕사)- 승덕 관제묘- 쌍탑산- 고속도로로 3시간 여 걸려 북경으로 이동- 북경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 앞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투숙.

 

7일차 일정인 피서산장은 분량이 많아 다음(18회)으로 넘기고 대신 분량이 작은 8일차 첫 코스인 열하문묘를 묶었다.

 

연암은 경추봉에 대해 '열하에서 서쪽 방향에 봉추산(捧捶山)의 한 봉우리가 있는데, 우뚝하게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다듬이 방망이를 세워 놓은 것 같다. 높이는 백여 길이고, 곧바로 솟아 하늘을 지탱하고 있으며, 비스듬이 비치는 노을을 받아 찬란하게 황금빛을 반사한다. 강희제가 산의 이름을 경추산(磬捶山)으로 고쳤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경추봉은 해발 596.29m이며 1.6km 길이의 리프트 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땡볕에서 20분 이상을 타려니 좀 지루했다. 일명 방망이산이라고 하고, 옥황상제의 엄지손가락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점잖게 표현한 것일 뿐이고, 누가 보아도 경추봉은 남근 모양이다. 경추봉은 열하(승덕) 어디에서나 보인다.

 

<차창으로 본 피서산장 정문인 여정문(麗正門)>

피서산장은 점심식사 후 경추봉에 먼저 들렀다 마지막에 들렀다. 그야말로 중국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중앙의 한자를 중심으로 만주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몽골어로 '여정문'이라 쓰인 편액이 있다. 

 

<승덕 백가춘주루의 만주식 김치찌개 수안차이>

유목민들이 먹던 음식으로 숙성시킨 배추에 돼지 삼겹살을 넣어 끓인 것이다. 약간 새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우리나라의 김치찌개와 맛이 비슷하다.

 

<피서산장 주변 寺廟(외팔묘) 통합 입장권>

현지 가이드가 이 입장권 말고 한장을 더 주며 분실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리프트 카 탑승권은 별도였던 것 같다. 현지 가이드는 우리 돈으로 6만원이라며 가장 비싼 입장권이라고 했는데 두 개를 합친 금액인 것 같다.

 

<경추산 보락사(普樂寺)>

경추봉 주변에는 외팔묘들이 있는데 리프트 카 노선 왼쪽에 안원묘(安遠廟), 입구 오른쪽에 부인사(溥仁寺)가 있다. 하지만 둘은 보이지 않고 리프트 카를 타자마자 오른쪽으로 둥근 지붕에 금박을 입힌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보락사(普樂寺)가 있다. 녹색 유리기와로 덮은 전각들, 욱광전 지붕 꼭대기의 둥근 장식이나 황금빛 지붕만 보아도 황실 관련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외팔묘의 하나라는 것은 여행 후 사진 정리를 하면서 알았다.

보락사는 1766년 건륭제 때 창건된 사찰로 보천동락(普天同樂)에서 따온 이름이며, 사찰 중앙의 욱광전은 북경의 천단기년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한다. 안에는 남녀불이 합체된 요염한 자태의 티베트 밀종 환희불이 있는데 승덕의 외팔묘 중 보락사에만 있다고 한다. 금색으로 도금한 웅장하고 화려한 천장의 조각도 보락사 사우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장식이다. 외팔묘 중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아담하고 예쁜 외관만으로도 눈길이 가는 곳이었다. 단체로, 그것도 리프트 카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시선에 끌려 틀림없이 들렸을 곳이다.

 

<리프트 카에서 본 경추봉>

 

<집표소에서 내려 걸어오르며 본 경추봉>

경추봉까지는 집표소에서 내려 한참 걸어올라야 한다.

 

<경추봉 입구 보산사 외벽의 마애불상>

윗사진은 종객파像으로 티베트 승려 지도자들이 쓰는 삼각형 두건을 쓰고 있다. 총카파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후로 승덕의 외팔묘 곳곳, 심지어 북경의 옹화궁에서도 소상이나 조상을 볼 수 있었다. 총카파(宗喀巴. 1357~1419)는 청해성 아무르 지방의 총카에서 태어난 라마교 황모파의 창시자이다. 7세에 출가하여 16세에 티베트로 가서 현교를 공부한 후 타포산에서 거루파(겔룩파)라는 독자적인 밀교체계를 확립했다. 도솔사를 세우고 타락한 라마교 개혁에 힘쓰다 1419년에 입적했다.

신도들은 총카파를 아미타불, 문수보살, 대흑천의 화신으로 여긴다. 거루파는 노란 승복을 입고 노란 모자를 써서 이전의 홍모파, 흑모파와 비교하여 황모(黃帽)파, 황의(黃衣)파라고도 한다. 총카파의 제자인 겐덴둡빠가 1642년 제 1대 라마가 된 이래 티베트를 통치하고 있다. 연암 일행이 열하(심양)의 수미복수지묘에서 알현한 판첸라마는 티베트의 2인자이다. 두번째 사진은 라마교에서 숭배되는 여성보살인 백도모(白度母)녹도모(綠度母)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경추봉 입구 보산사(寶山寺)와 마애불상>

 

<경추봉>

경추봉은 그저 '신기하다'는 정도였다. 경추봉 앞으로 이어진 절벽길을 따라가서 조망하면 승덕시와 피서산장, 다른 외팔묘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데 일행들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놓쳤다. 이 위치 쯤에 작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여성이 그 위에 올라 다리를 벌리고 거리 차를 이용해 사진을 찍으면 아주 민망하지만 재미있는 사진이 된다. 결과는 상상에... ^^

 

<경추봉과 두꺼비바위(합마석 蛤蟆石)>

 

<근접해서 본 경추봉>

 

<경추봉 정상에서 조망한 모습>

중앙 끝에 있는 건물은 보산사, 왼쪽에 있는 건물은 집표소이다. 두 번째 사진은 경추봉 바로 아래의 쉼터.

 

<경추봉 리프트 카 매표소 앞의 초경공예품>

밀집을 엮어서 만들었는데 정교하고 예쁘다. 지금은 플라스틱통에 밀려 사라졌지만 우리 어릴 적에도 밀집으로 방아깨비 같은 곤충 집이라며 비슷한 것을 만들었었다.

 

<승덕시>

 

<열하일기 따라가기 7일차 숙소인 승덕 가화주점>

다음 차수에 올려야 할 7일차 숙소와 열하문묘를 먼저 올린 이유는 사진 분량 때문이다. 다음(18차)에 올릴 피서산장의 내용이 많아 부득이 다음날 첫 코스인 열하문묘를 이곳에 묶었다. 이곳은 이번 여행에서 최악의 숙소였다. 이름부터 주점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장급 여관 쯤 된다. 옷장은 곰팡이가 퍼렇게 피어서 옷을 걸기는 커녕 근처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객실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7일차 밤에 강희대전 공연을 보고 버스에 타자마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쏟아진 비는 배수구가 없는 도로 위로 넘쳐 난리도 아니었다. 호텔 앞까지 온 버스는 전깃줄에 걸려 호텔까지 들어갈 수 없다며 대로에 세우고 각자 짐을 들고 걸어서 가라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캄캄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도 안 되는데다 불은 계곡 물처럼 넘치는 도로를 건너 방수도 안 되는 캐리어를 들고 호텔까지 간다? 다들 어이 없어 하면서 엄두가 안나 버스에 마냥 앉아있는데 비가 좀 누그러들었다. 결국 비를 맞으며 우비를 둘러쓰고 캐리어를 들어 옮겼다. 다행히 호텔은 지척에 있었지만 우산을 쓴 분들은 몸이 다 젖었다.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니 왜 버스가 못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당시 승덕은 관광 최성수기라 현지 가이드와 버스 기사는 방을 못 잡아서 애를 먹었다고 하니 이런 숙소나마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연행 기간 동안 수 차례 폭우를 만나 고생한 연암 일행처럼 우리도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려는가 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화주점 앞의 열하문묘>

가화주점에서 묵은 것 중 좋았던 단 한 가지는 바로 앞에 열하문묘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지 가이드나 지기님도 처음에는 몰랐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숙소 바로 앞의 패루가 예사롭지 않아 촬영을 하며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기님이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이곳이 바로 연암 일행이 묵었던 열하문묘라며 얼른 들어가 보라고 했다.

연암이 묘사한 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 승덕(열하)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위치가 높은 문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대성전은 굳게 닫혀 있어서 명륜당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진 왼쪽은 대성전, 대성전과 명륜당 앞에 있는 동, 서, 중앙 총 3개의 패루 중 2개이다. 대성전과 나란히 이쪽으로 학부(學府, 명륜당)가 있다.

 

열하문묘는 1776년 건륭제의 명으로 짓기 시작하여 1779년에 완공했으며 건륭제는 재위 기간 중 17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곳에 딸린 태학관에 외빈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연암 일행은 열하에 있는 동안 현재의 명륜당 뒤에 있는 방에서 머물렀다. 건륭제의 생신에 맞추기 위해 북경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비로 물이 넘치는 강을 하룻밤에 아홉개나 건너며 달려온 이들은 그야말로 녹아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의 사신을 연경(북경)에서 열하로 불러들인 황제의 명에 따라 가는 곳마다 청나라 관리들이 나와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물이 불은 강에서 어렵게 배에 오른 다른 나라 사신이나 조공품을 끌어내리면서까지 연암 일행을 태웠을 정도로 과한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먹거리나 숙소 제공은 관행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황제를 배알할 때 파격적으로 윗 자리를 배치하기도 했다.

연암은 이곳에서 혼자 잠을 못 이루고 숙소를 배회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일 이가 없음을 한탄하다 술을 마시고 잠이 든다. 현재 이곳은 연암의 열하일기 사생 팬이 찾는 관광지일 뿐 현지인들에게는 주차를 하거나 아침 운동을 하는 조금 넓은 공터일 뿐이다. 중국인에게는 별 볼일 없는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세운 '열하운묘'라고 오역한 엉터리 안내문을 어이 없어 하며 보았다.

 

<열하문묘 배치도>

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오자가 너무 많고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아 번역 수준으로 정정해서 옮긴 것이다.

 

-현지의 '열하 문묘 소개'-

열하문묘는 피서산장 서남쪽 궁장 바깥의 1.67만㎡ 부지에 1776년(건륭41)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779년(건륭44)에 완공되었다. 문묘 정중앙의 대전은 대성전이라 한다. 왼쪽(동쪽)에 존경각이 있고, 오른쪽에 부학이 있는 중국 삼대 공자묘 중의 하나이다. 산동성에 있는 곡부 공자묘와 북경에 있는 공자묘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자묘이다.

 

열하문묘는 공자에게 제사를 올릴 뿐 아니라 승덕부의 교육 중심이기도 했다. 열하문묘가 완공될 때 건륭제가 직접 와서 황궁 내무부에 수장한 주나라의 동으로 만든 제기 10개, 악기, 잡기 등을 하사했다. 후에 예부상서 조수선에 청하여 <聖祖詩文전집>, <세종시문기> 등을 존경각에 장서하게 하였다. 열하문묘는 황가 사묘로 보녕사,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등의 사묘와 함께 사묘군을 구성하여 역사 문화유산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열하문묘 학부(명륜당)>

문 안에 보이는 공간은 명륜당이다.

 

<열하문묘 명륜당 문>

 

<열하문묘 명륜당과 내부>

 

<열하문묘 명륜당-존경각 통로>

개방된 곳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열하문묘 대성전 패루와 문틈으로 본 대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