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따라가기 7일차 일정3>
북경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경숭고속도로-태사둔휴게소-승덕(열하)-백가춘주루에서 현지식 점심 - 리프트 카로 경추봉 - 피서산장(열하천) - 자건대주루에서 현지식 저녁 - 강희대제 공연 관람 - 승덕 가화주점 투숙.
연암 연행록의 제목이 된 '열하(熱河)'는 현재의 승덕시로 북경에서 북동쪽으로 250km 떨어진 하북성에 있는 도시이다. '열하'라는 이름은 피서산장으로 유입되는 하천이 겨울에도 얼지 않은 데서 유래되었다. 1708년 강희제가 교통과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처음으로 행궁을 짓고, 1711년에 36경을 조성하고 확장하였다.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에 피서를 하면서 정무를 보는 행궁이 되었으며 궁궐 구역은 건륭제 재위 시기인 1792년에 완성되었다.
피서산장은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이며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실정원이다. 황제들은 피서산장에서 매년 3~4개월씩 머물렀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피서였지만, 실제로는 북쪽 변방의 요새인 열하에 황제가 자주 왕래함으로써 몽고와 다른 북쪽 변방의 유목민족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행궁 구역은 폐쇄된 사합원 형태로 정전인 담박경성(澹泊敬誠)을 비롯한 모든 전각들은 단청이나 채색을 하지 않고 녹나무와 재색 기와로 지었기 때문에 소박해 보이지만 장식들이 상당히 세련되고 정교하다. 현지 가이드는 기둥 하나하나를 보면서 몇 억을 호가한다고 말했는데 녹나무는 단단하고 뒤틀림이 없으며 썩지 않는 최고급 목재라고 한다.
산장 구역은 동남쪽의 호수를 중심으로 한 평지와 서북쪽의 산과 언덕을 중심으로 한 구역으로 크게 나뉜다. 호수 주변과 섬 속에 연우루 등의 건물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고, 산에는 광원궁, 주원사 등의 건물이 자연과 어우러져 배치되어 있다.
조선사행단(연행단)은 청의 수도인 연경(북경)이 목적지였지만 1780년, 1790년에 건륭제의 70세, 80세 생일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행, 1860년 9월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략으로 함풍제가 열하에 오래 머물자 황제의 안부를 묻는 1861년의 '열하문안사'를 파견해 총 3차례 열하에 갔다. 1780년 8월 1일 연암 일행이 진하사절로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제는 열하에 있었고, 건륭제는 이들을 열하로 오도록 명령했다. 북경에 머문 지 4일 만에 연암 일행은 74명을 추려 250여km 떨어진 열하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황제의 생일 전날 밤(8월 9일)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연암 일행은 6일 동안 열하의 태학관(열하문묘)에 머물며 황제를 만나 하례 표문을 전하고 황제의 명령으로 당시에 조선의 사행단처럼 건륭제의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온 판첸라마 6세를 수미복수지묘에서 만난다. 유학자로서 변방의 이교도 승려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연행단은 인사조차 독촉을 받은 후에야 주저앉는 것으로 넘기고, 판첸라마가 준 선물을 서로 떠넘기며 처치 곤란해 하기도 한다.
<피서산장 정문인 여정문(麗正門)>
편액에 '麗正門'이란 한자를 비롯하여 만주어 티베트어, 위그르어, 몽골어 5개 문자가 병기되어 있다.
<피서산장 배치도>
사진 중앙 앞은 행궁 구역, 왼쪽은 산지 구역, 중앙의 호수 주변은 평지 구역이다. 북쪽과 동쪽으로 외팔묘(外八廟)인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보녕사, 안원묘, 보락사, 부인사 등이 피서산장을 둘러싸고 있다.
<피서산장 행궁 배치도>
사합원 형태로 소박하지만 색깔이 우중충해서 다소 답답한 마음으로 왼쪽 구역의 전각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과하면 탁 트인 호수와 평지가 나온다. 다녀온 지금이야 대강의 피서산장 배치를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넓은 구역을 현지 가이드를 따라 다닐 때는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행궁 구역은 남쪽(앞)부터 북쪽으로 오문-궁문-담박경성전-사지서옥-구간조방-후침(연파치석)-운산성지-수운문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외팔묘(外八廟)>
외팔묘는 승덕시에 있는 황제의 이궁 피서산장을 북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둘러싼 절과 사당들을 말한다. 강희제, 건륭제가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믿는 몽고족과 티베트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주로 티베트의 건축양식을 따라 지었고 재정을 지원했다. 부인사, 보녕사, 안원묘, 보타종승지묘, 수상사, 수미복수지묘, 광연사 등 7개의 사찰 및 사당과 현재 남아있지 않은 부선사 등 8개를 말한다.
강희 52년(1713)에 세운 부선사(溥善寺)와 건륭 20년(1755)에 세운 보녕사(普寧寺)는 몽고족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고, 건륭 29년(1764)에 세운 안원묘(安遠廟)는 신장의 부족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고, 건륭 32년(1771)에 세운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는 소포탈라궁으로도 불리며 티베트의 달라이라마가 열하 체류 시 거주하던 곳이다. 건륭 45년(1780)에 세운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는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에 온 판첸라마 6세의 행궁으로 세운 것이다.
초기에 세운 부인사와 부선사를 제외하고 모두 한족, 티베트족, 몽골족 양식이 혼합되었으며, 지붕을 유리기와나 금박을 입힌 동기와로 덮는 등 화려하게 장식했다. 외팔묘는 규모가 웅장하고 양식이 독특하여 청나라의 건축예술의 정수로 불린다.
<피서산장 주변의 사묘(寺廟, 외팔묘) 배치도>
왼쪽부터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보녕사, 안원묘, 보락사이다. 오른쪽 위 맨 끝에 승덕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경추봉이 있다.
<피서산장 궁문의 건륭제 친필 편액>
<피서산장 정전인 담박경성(澹泊敬誠)>
소수민족 사절들이 황제를 알현하는 등 주로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용도로 사용된 피서산장의 정전이다.
기와나 건물 모두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지만 기둥이나 문의 장식은 대단히 세련되고 섬세하다. 자금성이나 심양고궁처럼 화려한 궁궐을 보다가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행궁을 보자니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문에 걸린 편액 바탕과 문 하단의 전통무늬 조각은 솜씨가 탁월하다. 섬세한 조각을 한 문은 유리창을 씌워 보호하고 있다.
<담박경성전의 바탕 조각이 빼어난 편액들>
무늬와 글씨를 높이 차를 두고 함께 조각을 할 생각을 한 자체가 대단하다.
<담박경성전 내부>
심양고궁처럼 좌식 구조이지만 심양고궁보다 천정이나 내부 장식이 훨씬 격조가 있다.
<사지서옥(四知書屋)>
황제가 대신을 접견하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니 경복궁으로 치면 사정전 쯤 된다. 담박경성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문의 조각이 빼어나고 이곳 역시 조각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문을 씌워 놓았다.
<사지서옥(四知書屋) 내부>
<구간조방(九間照房)과 사지서옥(四知書屋) 사이 공간>
피서산장 행궁 전각 사이, 혹은 마당은 이런 식으로 소나무를 심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다.
<구간조방(九間照房)의 와기전(瓦器展)과 법랑전(琺琅展)>
건물이 일자로 통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방으로 이용되었을 듯 하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데 유리로나마 공개된 공간은 통로 양쪽에 있는 도자기를 전시한 와기전과 기와로 된 편액이나 주련을 전시한 법랑전이었다.
<피서산장 후침(연파치석) 문의 건륭제와 강희제 초상화>
강희제와 건륭제는 청대를 통털어 가장 칭송받는 황제이면서 열하를 성장 시켰기 때문에 이들을 빼고 피서산장이나 열하를 논하기 어렵다.
<피서산장 후침(연파치석 烟波致奭)>
<피서산장 후침(연파치석 烟波致奭) 내부>
후침은 황제의 생활, 휴식공간이다. 중후한 피서산장 행궁의 전각들 중에서 그나마 내부장식이 가장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피서산장 행궁 가장 북쪽 전각 운산성지(雲山胜地)>
행궁 중 유일한 2층 건물인데 용도는 잘 모르겠다. 마당에 괴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회를 베풀거나 행궁 안에서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을 것 같다.
<피서산장 행궁 북문인 수운문>
<수운문을 나서 이어지는 피서산장 평지 공간>
좀 무겁고 답답한 마음으로 행궁을 나서자마자 탁 트인 초록색 공간이 나타나 놀랐다. 이곳부터가 진짜 피서산장이란 느낌이 든다. 사진 오른쪽의 '세계문화유산 피서산장'이라 쓰인 커다란 바위 앞에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념촬영을 한다.
<피서산장 호수 주변의 전각과 풍경들>
중국의 4대 정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만큼 평지 구역 중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일직선으로 관통하는데만 해도 대략 1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평지 구역을 거의 일직선으로 걸어 열하천만 보고 후문으로 나왔다. 사진 중 경회루를 축소한 것 같은 호수 위의 건물은 연우루이다.
해질녘이라 사진이 우중충하고 인파에 치이긴 했지만 상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무가 없는 곳 어디에서나 동쪽의 경추봉이 보였다.
<피서산장 어과포(御瓜圃)>
피서산장에 머무는 황제의 식단에 오른 야채나 과일을 심어 가꾼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수박이 아주 맛있었다고 한다.
<호수 풍경>
돈을 내고 호수에서 다양한 크기의 관광용 배를 탈 수 있다.
<피서산장 열하천>
겨울에는 일반 강물보다 좀 온도가 높을지 모르나 여름이어서인지 손을 담궈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熱河'라 쓰인 바위 주변에서 발을 담그고 사진촬영을 하느라 북새통이었다. 나는 밀고 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포기...
<밖에서 본 피서산장 평지 구역 북쪽 끝에 있는 팔각구층탑>
원래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이 탑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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