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요르단

이스라엘, 요르단 여행16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큰누리 2017. 3. 28. 00:02

이스라엘 요르단 여행 6일째인 1/17의 일정 암만 리완호텔 - 요르단:암만 알렌비 국경초소 통과(2시간) - 국경 너머 이스라엘쪽 사해를 따라 1시간쯤 걸려 마사다 도착 - 마사다 요새에서 2시간 - 쿰란국립공원에서 점심식사 및 쇼핑(1시간 20분) -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사해 칼리아 해변 - 머드 체험 및 부영(1시간 10분) - 1시간 30분만에 베들레헴 오리엔트 팔레스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 및 투숙

 

 

<요르단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는 복잡한 절차>

이른 아침에 요르단 암만 리완호텔을 출발하여 07:45, 베샨을 통한 요르단 입국 때와 달리 알렌비쪽으로 국경을 넘기 위해 도착했다.  요르단 쪽 초소에 도착한 후 여권 심사를 받기 위해 가이드는 우리 여권을 모두 거둬 국경 초소에 제출했다. 이어 우리가 탄 버스에서 캐리어를 모두 꺼내 폭발물 검사를 했다. 요르단 초소에는 상당히 높은 철탑에 싸이렌 1개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5분쯤 지나자 이스라엘 쪽 경찰(여경)이 걸쇠처럼 생긴 도구로 버스를 한 바퀴 돌며 폭발물 탐색 검사를 했다. -웰컴 투 킹 후세인 보더 싱..- 이라 적힌 프래카드가 걸린 작은 초소를 지나자 이스라엘 쪽의 본격적인 검색이 시작되었다국경에는 요르단(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보이는 몇 명만 있었는데도 우리는 버스 안에서 꽤 오래 기다렸다.

 

우리가 버스에서 대기하는 동안 짐 칸의 캐리어를 먼저 꺼내 X-Ray 검색대를 통과시켰고, 이어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따로 검색대를 통과했다. 이스라엘 비자 도장이 찍히면 아랍권 여행 시 입국 거부를 당할  수 있으므로 1회용 비자(전자 비자)를 발급 받았다. 여권 심사 후 이스라엘로 입국하기까지 두 나라를 합쳐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우리 일행은 단체 관광객이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히 끝난 것이 그 정도라고 하는데 자유 관광을 하는 젊은이, 특히 남자의 경우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다고 한다.

 

 

<알렌비 이스라엘-요르단 국경 초소>

중앙의 플래카드 너머는 요르단이다. 요르단 국경초소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1시간 정도 걸렸고, 사진 이쪽의 버스와 작은 입국장에서 1시간 정도를 기다려 이스라엘 입국심사를 통과했다. 국경 주변은 황토사막이지만 주변에 양국에 걸쳐 사해가 있다.

 

국경을 나서면 바로 사해가 철책 너머로 보이다가 점점 주변의 농장이 가끔 보이면서 철책은 어느 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왼쪽으로 사해, 오른쪽으로 삭막한 황토산 사이에 난 길을 따라 1시간을 달려 마사다 요새에 도착했다. 달리는 버스, 심지어는 우리가 부영과 머드체험을 한 칼리아 해변에서도 사해의 물이 말라붙어 '바다(DEAD SEA)'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때마침 떠오르는 태양을 안고 달려서 사해의 난반사가 심하고 말라붙은 수면이 멀어서 상태가 나빴지만 그나마 마사다 요새 사진 분량이 많아 이 글에서는 게재를 못하고 다음 글인 '사해'에 몇 컷 끼워 넣을 예정이다. 

 

 

<마사다 유적지>

사해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마사다는 고원의 서쪽 끝, 사해를 마주한 황량한 황토사막의 434m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마사다 유적지는 평균 너비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의 배 모양으로 사방이 수직으로 된 절벽에 위치한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이다

 BC 2세기에 만들어진 요새를 이스라엘의 헤롯 왕(Herod BC 73?~ BC4 재위)BC 37년부터 BC 31년 사이에 유사시에 대비해 은신처로 삼고자 재정비했다헤롯은 5가 넘는 성벽과 38개 탑, 교회, 궁전, 물 저장고 등 전쟁 시 자급자족하면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았다.

 

마사다(Masada)는 '요새'라는 뜻으로 로마에 대항해 이스라엘 저항군이 항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자 960여 명이 자살한 곳으로 유명하다현재 마사다 요새 위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과 창고, 병영, 무기고, 궁정, 저수조, 거주지, 수로 등이요새 밖에는 요새를 둘러싼 로마군의 병영 터, 공성 보루들이 남아있다.

 

AD 70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유대 저항군 960명은 마사다 요새에 모여 2년 넘게 저항을 벌이다 최후를 맞이했다960명을 두고 2년 넘게 요새 밖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지존심에 상처가 난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성벽에 공격을 위한 누벽(壘壁, ramp)을 세웠다마사다 요새 밖에 요새보다 더 높은 흙벽을 쌓아 올려 사다리를 타고 넘는 방법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킨 것이다.

 

AD73최후가 다가오자 지도자 엘리아 벤 야일은 적의 노예로 사느니 죽음을 택하자고 호소하였다유대인 율법상 자살을 할 수 없었으므로 저항군은 각자 자신의 가족을 죽인 후 모여 열 명씩 조를 짜 한 명이 9명을 죽이고최후에 남은 사람이 나머지를 죽인 후 자결했다남은 사람은 지하동굴에 숨어있던 아이 5명과 여성 2명뿐이었다생존자를 통해 마사다 항전이 세상에 알려지고 마사다는 유대인의 저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군이 3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헤롯왕이 반란에 대비해 각종 군사적 시설, 식량, 식수 등을 미리 비축했기 때문이다특히 완벽한 물 저장 탱크가 유명한데 용적이 4,000인 열두 개의 저수지가 바위 속에 파여 있었고그 물을 요새의 모든 곳에 체계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하루 동안 내린 빗물을 모으면 1,000명에게 2년 동안 식수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5년부터 1963년에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마사다 유적을 발굴했으며 그 결과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등이 발견되었다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해쪽에서 본 마사다 유적지(요새)>

사방이 절벽인 오른쪽의 황토산이 마사다 유적지(요새)이다. 두 산 아래의 허연 부분은 마사다 요새 박물관, 입장을 위한 시설, 주차장이다.

 

 

<마사다 유적지의 마사다 요새 그림>

산 정상의 이스라엘 저항군 요새 뿐 아니라 산 아래의 병영 터도 문화유산이다. 마사다는 삭막한 곳이라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덕분에 지구상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로마 시대의 병영 터라고 한다. 산 왼쪽의 로마 병영과 정상 사이에 난공불락의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누벽(공성, 램프)이 보인다.

 

 

<1965년부터 1963년에 마사다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

우리는 들르지 않았지만 마사다 유적지 입구 박물관 앞에 동상과 발굴된 물건 등이 전시 중이다. 

 

 

<마사다 유적지(요새)로 오르내리는 로프웨이와 뱀의 길(Snake Path)>

로프웨이로 정상까지 오르는데 1분 30초 정도 걸린다. 산 경사로를 따라 구불구불 허옇게 보이는 선은 걸어오르는 뱀의 길(Snake Path)이다.

 

 

<마사다 유적지(요새)로 오르내리는 로프웨이에서 내려다 본 로마 병영 터>

병영 터도 평지가 아닌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저항군은 가끔 로마인 거주지를 습격 했다고 하니 평지에 병영이 있었다면 로마군도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사다 유적지(요새)로 오르내리는 로프웨이의 모든 구간>

2개의 로마 병영 터가 또렷이 보이고 멀리 사해가 보인다. 반대편(서쪽)의 로마 병영 터는 훨씬 규모가 크다. 로마군은 평지 중 지대가 높은 서쪽에 누벽(공성, 램프)을 구축해 요새를 함락시켰다.

 

 

<마사다 요새 뱀의 길(The Snake Path Gate) 문>

사방이 절벽인 험준한 마사다 요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로프웨이에서 내려 문까지 걷는 이 구간을 지나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왼쪽 맨 끝의 문이 뱀의 길 문이고, 그 아래의 계단(뱀의 길)으로 걸어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설명을 들은 바는 없지만 로프웨이와 뱀의 문을 잇는 통로 아래로 보이는 선 같은 홈은 빗물을 모아 저수조로 보내는 물길일 것이다. 

 

 

<마사다 유적지(요새) 미니어처>

마사다 요새를 배 모양이라고 한다. 우리는 건물 터가 모여있는 느낌표가 있는 곳으로 입장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요새를 한 바퀴 돌았다. 건물이 터만 남았음에도 유적지가 생각보다 넓어 나는 자주 일행을 놓쳤고 따라붙느라 애를 먹었다.

 

요새의 중요한 출입문인 뱀의 길 문(느낌표) 주변에 군사시설(총사령부, 식량창고 등)과 대형 목욕탕, 헤롯이 정교하게 만든 북궁전이 모여 있고 중앙과 그 아래쪽에는 행정관청과 비잔틴 교회, 물 탱크, 유대인 교회 등이, 두번째로 많은 건물이 모여있는 곳에는 서궁전, 각종 방어시설, 서문이 있다. 

중앙 위쪽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건물은 수영장, 물 탱크 등의 시설이다.

 

 

<마사다 요새 총사령부, 뱀의 문 방향과 멀리 보이는 사해>

시계는 살짝 뿌옇지만 겨울이면서 나무 한 그루, 번듯한 건물 하나 없는 이날 날씨, 초겨울 차림이었던 내겐 정말 더웠다!

 

 

<윗 사진 왼쪽 위로 이어지는 총사령부 터>

생각보다 넓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정도로 걸음이 빠른 현지 가이드를 사진을 찍으며 따라 다니느라 바빠 당시엔 건물 구분이 불가능했다. 벽돌 같은 터만 남은 현지에서 당시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북(쪽) 궁전과 대형 목욕탕뿐이었다. 총사령부는 건물 터 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비슷한 시설물을 보고 가늠했다.

 

 

<총사령부 아래의 건물 터들>

왼쪽 위의 건물이 총사령부 터이니 이 건물은 저장고이거나 사령부에 딸린 부속건물이었을 것 같다. 마사다 유적지를 돌다보면 우리 눈에는 거의 똑같아 보이는 벽돌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한 건축 부재들이 보이고 건물 윗부분에 검은 선들이 보인다. 검은 선 아래는 원래 남아있던 부분이고, 위는 복원된 부분이다. 

 

 

<마사다 요새 식량창고>

 

 

<헤롯이 유사시에 대피하기 위해 지은 마사다 요새 북쪽 궁전 모형도와 남아 있는 궁전 모습>

이곳도 헤롯왕이 반란에 대비해 정비했지만 베들레헴의 헤로디움 요새도 같은 목적으로 헤롯왕이 인공산을 쌓고 요새를 만들었기 때문에 두 요새는 닮은 꼴이다. 우리에게는 예수 탄생 시기에 이스라엘의 어린 장자를 모두 죽인 폭군으로 알려졌지만 비유대인 왕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도시와 건물을 세워 오늘날 이스라엘을 관광으로 먹여살리는데 공헌한 왕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마사다 요새에서 용도를 알아내지 못한 건물 터>

북쪽 궁전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건물들이다. 요새 위의 건물들은 앞으로부터 유대인 교회, 비둘기 사육장 등이란 것은 알겠는데 바닥이 하얀 아래쪽 건물의 용도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감시 초소가 있는 방향이긴 하지만 감시초소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넓고...

 

내가 용도를 모르는 아래의 건물 터에서 로마군이 쌓은 누벽(공성) 흔적이 잘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아래쪽에 로마 병영이 있었고, 요새 중 바깥쪽 지대가 가장 높은 방향이다. 

 

 

<비잔틴 교회 터>

 

 

<식량창고 터>

 

 

<대형 목욕탕 터>

벽돌과 잔해만 남은 다른 건물과 달리 바닥의 모자이크, 물을 끓이는 아궁이 터, 벽면의 프레스코화 등이 고루 남아있어서 마사다 유적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대형 목욕탕 터의 프레스코화와 아궁이(!)>

 

 

 

 

<대형 목욕탕의 아궁이(!)를 밖에서 본 모습>

검정 선으로 표시된 위쪽은 복원된 부분이다.

 

 

<마사다 요새 서쪽 문>

 

 

<마사다 요새에서 용도를 알아내지 못한 건물 터>

바로 아래에 로마 병영 터, 누벽(공성, 램프)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감시초소이거나 요새 안의 마지막 격전장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진 속에 인물들은 우리 일행이고, 이 만큼의 거리를 두고 일행을 놓친 나는 설명도 놓쳤다. 요새 아래 중앙 평지의 대형 네모는 로마 병영 터이다.

 

 

<마사다 요새 저수조(물탱크)>

열두 개의 저수조(물탱크)가 이런 식으로 바위 속에 파여 있고, 그 물을 요새의 모든 곳에 체계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하루 동안 내린 빗물을 모으면 2년 동안 1,000명에게 식수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메마른 황무지에서 960명이 적과 대항하며 2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양의 비축 식량과 이런 완벽한 저수 시스템 덕분이었다.

 

 

<마사다 요새의 빗물을 모으는 장치와 미니어처>

 

 

 

<마사다 요새 비둘기 사육장>

비상 시에 식용으로 쓸 비둘기를 사육한 곳이라고 한다.

 

 

<유대인 교회(시나고그)에서 총사령부에 이르는 마사다 요새 북쪽 구간>

 

 

<마사다 요새 누벽(ramp)>

왼쪽의 마사다 요새보다 더 높이 쌓은 요새 밖의 누벽에서 램프를 놓는 로마군들(실제로는 유대인 죄수) 그림이 보인다. *사다 요새의 유대인 저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군이 유대인 죄수를 동원해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한 누벽을 쌓았고, 저항군은 자신이 살고자 동족을 향해 무기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이런 약점을 이용해 마지막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사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지만)할 수 있었다. 이 항전을 마지막으로 유대인은 또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어 2,000여년 동안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게 된다.

 

 

<마사다 북쪽의 총사령부(원경)와 요새 서쪽의 로마군이 쏜 돌 대포 탄알(근경)>

 

 

<마사다 요새 서쪽 밖의 로마군이 쌓은 공성 보루 터>

요새의 유대인 저항군을 2년 넘게 진압하지 못한 로마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유대인 죄수를 동원하여 지대가 높은 서쪽에 마사다 요새보다 더 높게 공성을 쌓고 ramp로 연결하여 요새에 진입했지만 5명의 아이와 부녀자를 제외한 저항군 전원이 자결(!)한 후였다.

 

 

<세례당, 소궁전, 저항군 주거지>

 

 

<마사다 요새 북-동-남쪽>

북쪽 총사령부에서 요새 중앙에 있는 저항군 주거지, 세례당, 풀장 등과 서쪽의 격전지를 파노라마로 촬영한 것이다. 

 

 

<마사다 요새 서쪽>

로마군과의 최후의 격전지, 비둘기 사육장, 감시초소, 유대 교회(시나고그) 등이다.

 

 

<마사다 요새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난 유대인 여학생들>

젊은 선생님과 여학생들이 차일 안에서 현장견학 형태의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픈 역사적인 의미야 충분히 숙지했겠지만 젊은이답게 잘 웃고 사진촬영 양해를 구한 우리 일행에게 이런 예쁜 모습까지 연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