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1. 해녀박물관-해녀의 역사, 제주해녀 항일운동, 해녀공동체

큰누리 2021. 3. 10. 22:25

<해녀의 역사>

제주 해녀는 바다에 의지하여 전복이나 소라, 해삼, 천초, 톳 등을 채취하여 생업을 이끌어 가는 여성으로서 제주에서는 그녀들을 잠수, 잠네라고 한다. 해녀들은 제주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같이 했으며 이들이 하는 일을 '물질'이라고 부른다.

 

아래의 원형은 위의 그림 속의 원형 부분을 확대한 것으로 조선시대 이형상 목사가 제주도를 순력하는 장면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탐라순력도> 중 <병담범주>이다. 용연에서 뱃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지금의 용두암 부근에서 물질하고 있는 해녀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목사 허공명 휼민청정비(복제품)>

 해녀들이 미역을 캐고 내는 수세를 폐지(1814)하는 등 청렴한 행정을 베푼 제주목사 허명(1814~1815 재임)을 기리며 백성들이 세운 공덕비이다. 조선시대 해녀는 진상이나 공물로 1년 동안 적게는 7필, 많게는 28필에 달하는 전복과 미역을 책임져야 했다. 이러한 수탈은 18세기 전반 <잠녀안(潛女案)> 혁파를 시작으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해녀는 19세기 후반 역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문헌 속의 해녀>

물질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들이 전복을 채취해 진상해 온 것으로 나와 있으며 1629년 이건의 <제주 풍토기>에 해녀들이 전복을 채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이익태의 <지영록>, 위백규의 <존재전서>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두번째 사진은 이건의 <제주풍토기>와 이익태의 <지영록>이다. <제주풍토기>에서는 미역을 캐는 잠녀가 5월에 미역을 캐고 남녀가 뒤섞여 일하며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미역을 관가에 징수 당하고 남은 것을 팔아서 먹고 산다고 하였다. <지영록>에서는 진상하는 말린전복(추인복)을 90명의 늙고 병든 해녀에게 부담시킨 점, 징수를 피하는 행위, 부담스런 징수로 전복을 캐는 사람이 없어지자 미역 캐는 해녀에게 나누어 분담시킨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부터 18세기까지는 잠수라는 특수 기술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반면 수요량이 크자 국가에서 해녀들에게 너무 무거운 부담을 지워 문제가 컸고, 결국 잠수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물질을 했지만 조세가 과다해서 삶이 지난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해녀 항일운동>

제주해녀들은 예로부터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혹독한 노동과 과다한 조세로 인해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제주해녀들은 억척스럽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삶을 지켜왔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을 거듭해 왔다. 제주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맞선 생존권 수호를 위한 투쟁인 동시에, 일제의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제시대 제주해녀들이 항일운동이 실린 신문기사>

(제주도 구좌리에서) 18개조를 요구하고 300명의 해녀들이 시위했다는 1932년 1월 14일의 조선일보 기사, (제주도 세화리에서) 500여명의 해녀들이 주재소를 대거 습격하여 경찰대와 충돌, 사태는 험악 등을 보도한 1932년 1월 26일의 동아일보 기사이다.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해녀 대표 5인>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5인의 해녀 대표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 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제주해녀 항일운동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공헌하였다. 이들은 일제 경찰의 폭력진압에 의해 동료 해녀 30명과 함께 구속된 이후에도 자신들이 주모자임을 자임하여 동료 해녀들을 석방시키는 등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해녀 대표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두번째 사진은 제주항일운동 해녀 대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지사가 받은 건국포장과 포장증이다. 2005년 8월 15일 노무현대통령이 수여했고, 부춘화, 부덕량 지사는 이미 고인이 된 상태이다. 고순효, 김계석 두분은 왜 제외가 되었는지 궁금... 색이 다른 오른쪽의 훈장은 해녀들의 민족교육 지도자 김순종 지사가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이다.

 

 

 

 

-≪해녀 공동체≫-

물질작업은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다. 함부로 바다에 뛰어들어 혼자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해 놓은 규약과 법에 따라 행동한다. 물질은 언제나 공동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동으로 위험상황에 대처한다. 해녀들은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구한말부터 '계'의 형태로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출가 해녀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어업공동체가 조직되었다.

 

 

-≪해녀들의 바다밭≫-

해녀들은 바다밭의 관리와 마을어장 규약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로 정해놓고 운영하고 있다. 제주도에는 수산업협동조합에 소속된 마을 단위의 어촌계가 100개 있는데 해녀들은 어장을 '바다밭'이라고 한다. 각 어촌계에는 어장의 경계, 해산물의 채취 자격, 해산물 종류에 따른 채취 방법과 채취기간 및 금채 기간 등 제주해녀의 물질 관행을 마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의 규약으로 정해놓고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다.

 

 

<해녀공동체의 위계질서>

해녀들은 연령과 물질 기량, 덕성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며, 불턱에서도 해녀의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는 등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다. 해녀공동체에서는 연장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웃어른은 그만큼 해녀사회의 귀감이 된다.

 

 

 

<제주어업조합 및 제주해녀 관련 규약들>

 

 

 

 

<제주도어업조합연합회 발족 축사>

1948년 6월 30일 성산포어업조합 개소식에 제주도어업조합연합회 이사장 임관호가 쓴 축사이다.

 

 

<나잠어업입어 허가증>

나잠어업입어허가증은 1954년에 (어업조합) 이사가 발행한 것이다. 구좌읍 평대리 해안 일대에서 1년간 전복, 소라, 화포, 천초 등의 해조류 채취를 허가한다는 증서이다.

 

**해녀박물관에 등장하는 고문헌에서 천초(川椒)가 자꾸 등장하길래 궁금해서 찾아보니, 우뭇가사리과에 속하는 해조의 통칭이었다. 여름에 냉국처럼 먹는 '우뭇가사리', '한천'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생산된다고 한다. 

 

 

<어촌계 관련 서류와 및 각종 증명서>

윗사진은 어촌계 관련 서류철과 도민증 및 각종 증명서이고, 두번째 사진은 1975년 수산업협동조합에서 작성한 잠수실태 조사집이다.

 

 

 

<온평초등학교의 해녀 공로비와 졸업기념 사진>

해방 직후 제주도의 실정은 4.3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1946년에 온평교 설립 인가를 받았으나 학교운영이 매우 어려웠다. 1950년 화재로 전 교실이 소실되자 성산읍 온평리 해녀들은 신산리와 신양리 양쪽 경계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삼아 미역채취 수익금 전부를 학교 건립자금으로 헌납하여 1951~1958년에 걸쳐 학교를 재건하였다. 이후 학교 기성회에서는 1961년 온평초등학교에 공로비를 세워 해녀들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해녀들의 역사관 전경>

 

 

<해녀박물관 - 해녀들의 숨비소리>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잠수한 후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로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약 1분에서 2분 가량 잠수하며 생긴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에서 '호오이호오이'하는 소리가 난다. 해녀들은 '숨비소리'를 통해 빠른 시간 내에 신선한 공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짧은 휴식으로도 물질을 지속할 수 있다.

 

 

<해녀박물관 - 물질기술>

물질기술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로 보통 8살부터 마을의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15세 무렵에 애기해녀가 된다. 신체적 조건으로 폐활량, 수압에 견디는 눈과 귀, 찬물에서 견딜 수 있는 능력 등이 필요하며 커다란 바다생물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는 담대함도 필요하다. 제주해녀들은 불턱에서 바다에서의 효과적인 체력 운용과 바다에 대한 지식을 선배 해녀들로부터 전수 받으며 기량과 지혜를 확장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