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22.08.마곡 이대병원 보구녀관

큰누리 2022. 11. 11. 10:33

≪보구녀관(普救女館)≫

...이 건물은 전에는 한국인 신사의 거주지였으나 지금은 여자와 아이들의 진료소와 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원래 있던 창문은 외국 창문으로 바꾸었는데 햇빛을 잘 받기 위해서이다... 현관의 끝에는 큰 방이 있는데 여자들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방바닥은 돌로 되어있고 회반죽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한 후에 기름먹인 종이를 발라서 대리석처럼 매끄럽다. 돌 아래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한다. 여자들은 방석 위에 앉는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진료하는 방이 있다. 진료실에는 책장, 외과수술 도구가 들어있는 장, 수술대가 있다. 진료실 너머에 약제실이 있고 그 너머에 있는 방은 수술실로 만들어질 것이다. 병실은 이 건물의 뒤쪽과 이 건물 뒤편의 더 작은 건물에 있다. 10명 정도의 환자를 수용하는데 모든 병실은 온돌을 설치하고 온돌에서 여자들이 잔다. 그들은 침대는 너무 춥다고 생각한다. 두꺼운 요와 누비이불, 담요를 덮는다...

(메타 하워드, "The W.F.M. Hospital in Seoul, Korea" Heathen Woman's Friend(January 1890): 171~172)

 

 

≪보구녀관(普救女館) 연표≫

* 1885.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 의사가 자택을 개조해 민간 진료 시작. 1887년 시병원(施病院)으로 불림.

* 1886. 이화학당 창설자 메리 F. 스크랜튼 여사가 미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에 부인병원 설립 기금과 여의사 파견을 요청.

* 1887. 10월 31일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정동 시병원 내에 마련된 여성전용병원 공간에서 환자 진료 시작.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은 이 날을 개원기념일로 지정.

* 1888. 11월 시병원에서 여자 환자 진료소 독립. 12월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이름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음.

* 1892. 동대문에 보구녀관 분원 설치, 볼드윈 진료소로 명명.

* 1901. 보구녀관 7대 병원장에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취임.

* 1903. 12월 마가렛 에드먼즈가 보구녀관 내에 간호원양성학교 설립.

* 1908. 볼드윈 진료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당시 한국 최대 규모의 병원 착공.

* 1912. 9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준공, 보구녀관의 간호원양성학교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김.

* 1913. 보구녀관과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통합.

* 1930.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 산부인과를 주로 진료하는 동대문부인병원으로 개편.

* 1945. 10월 이화여자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개교하면서 행림원에 의학과와 약학과를 설치하고 동대문병원을 실습병원으로 지정.

* 1947. 의학과를 의학부를 변경하고 예과와 본과를 설치.

* 1952.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 중 부산시 대청동에 이화힐링센타 건립.

* 1973. 3월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발족. 9월 동대문병원 중앙진료부 준공 봉헌.

* 1993. 10월 이대목동병원 설립. 의과대학 신촌캠퍼스에서 목동으로 이전.

* 2009. 이대여성암병원 개원.

* 2019. 2월 이대 서울병원 준공 및 보구녀관 건물 복원. 5월 이대서울병원 개원 및 의과대학 마곡캠퍼스로 이전.

 

 

<마곡 이대병원의 보구녀관 내부>

 

 

<마곡 이대병원과 재현한 보구녀관 외관>

여성 앞쪽에 있는 작은 문을 현관문으로 보아야 할지, 마루가 있고 현판이 걸린 쪽 사진 오른쪽 면을 현관으로 보아야 할지 헷갈린다. 현관을 어디로 보는지 확인이 되면 위에 있는 메타 하워드의 '보구녀관'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건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 판단이 안 된다.

보구녀관의 원래 위치는 현재 정동제일교회 100주년기념 예배당이 자리한 정동 33번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 한옥 사랑채를 개조한 형태로 햇빛을 잘 받기 위해 서양식 창문을 설치했고, 모든 병실은 온돌방이었다.

 

 

<재현한 보구녀관(普救女館)과 현판>

 

 

<보구녀관(普救女館) 개관 시간>

 

 

<들어서서 정면으로 본 보구녀관(普救女館) 내부>

왼쪽은 딱 1개인 입식 방이고, 오른쪽은 오른쪽 첫번째의 가장 큰 방이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첫번째 방>

좌식 구조의 가장 넓은 방으로 환자들 진료를 보는 곳이었을 듯하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첫번째 방의 전시물들>

다구, 작은 여성 흉상 인형, 약병과 소독기구 등이 놓여있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왼쪽 방>

오른쪽은 5개의 방이 이어지는데 비해 왼쪽은 이 방 1개만 있다. 오른쪽 방들은 온돌이 깔린 좌식 방으로 환자들을 돌보거나 입원시키기 위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왼쪽 방은 테이블이 놓인 입식 구조로 수술을 하던 방이었거나 회의, 혹은 강의를 하기 위한 방인 듯하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왼쪽 방의 보구녀관 병원장들과 초대 간호원장 사진>

왼쪽 방에는 중앙의 대형 탁자 외에 2개의 오래된 작은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사진들이 놓여있다. 한쪽에는 사진처럼 역대 보구녀관의 원장들 사진이, 다른 탁자 위에는 독립운동가 의사 현덕신 관련 사진 2개가 놓여있다.

사진 속 보구녀관 원장들은 왼쪽부터 이화학당 설립자이자 보구녀관의 설립자인 대스크랜튼 부인(Mary Scranton), 7대 병원장 박에스더(김점동), 초대 간호원장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 초대 병원장 메타 하워드(Dr. Meta Howard), 3대 병원장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 Hall)이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좌, 우 방 사이에 있는 거실과 복도>

 

 

<보구녀관(普救女館) 거실 오른쪽의 전시물들>

윗사진은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전화기와 스탠드, 책이고, 두번째 사진은 이화학당 설립자이자 보구녀관의 설립자인 Mary Scranton과 그녀의 어록이다.

 

 

 

<보구녀관(普救女館) 거실(!) 너머 복도와 오른쪽 두번째, 세번째 방>

오른쪽의 두번째와 세번째 방은 벽 대신 접이식 여닫이 문을 설치해서 상황에 따라 방을 1개, 혹은 2개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두번째 방>

이 방과 네번째 방에는 담요들이 많이 쌓여있어서 환자들이 쉬거나 누워있었던 방으로 추측된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두번째 방과 안의 인물 사진들>

두번째 사진은 보구녀관 출신 의사 박에스터와 관련 신문기사이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세번째 방과 안의 인물 사진들>

이 방에는 1대~10까지 보구녀관의 역대 원장들 명단과 사진들이 걸려있다.

 

≪보구녀관(普救女館) 역대 병원장≫

* 1887. 초대 병원장 메타 하워드(Dr. Meta Howard)

* 1889. 2대 병원장 윌리엄 스크랜튼과 윌리엄 맥길(Dr. William B. Scranton, Dr. William B. McGill) 

* 1890. 3대 병원장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 Hall)

* 1893. 4대 병원장 메리 마리아 커틀러(Dr. Mary M. Cutler)  

* 1897. 5대 병원장 릴리안 해리스(Dr. Lillan Harris)

* 1899. 6대 병원장 엠마 언스버거(Dr. Emma Ernsberger)

* 1901. 7대 병원장 박에스더(Dr. Esther K. Pak)

* 1903. 8대 병원장 메리 마리아 커틀러(Dr. Mary M. Cutler) 

* 1909. 9대 병원장 엠마 언스버거(Dr. Emma Ernsberger)

* 1912. 10대 병원장 아만다 프란시스 힐만(Dr. Amanda F. Hillman)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세번째 방의 전시물>

돋보기, 편지, 책...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세번째 방에서 네번째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계단>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네번째 방>

간호원양성학교 연표와 간호원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방에도 옆 방에 이어 방석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환자들이 대기하거나 병실로 사용된 방이었을 듯...

 

 

<보구녀관(普救女館) 오른쪽 네번째 방의 간호원 관련 사진들>

 

 

 

<보구녀관(普救女館) 야외 전시장>

 

 

 

<야외 전시장 - 1.이화의료원의 시작>

이화의료원의 시작은 1885년 윌리엄 스크랜튼(사진 속의 남성)이 내한해 정동에 施병원을 설립했다. 더불어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사진 속의 여성)의 요청으로 조선 여성 환자들을 위한 전문병원을 설립하고 "많은 여자 환자를 치료하는 집"이란 뜻으로 고종이 하사한 '보구녀관'이란 이름을 쓰게 되었다.

 

 

<야외 전시장 - 2.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녀관 1887~1913)>

여성 의료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땅을 밟은 보구녀관 초대 원장인 메타 하워드 의사는 서울에 도착한지 3일만인 1887년 10월 31일부터 진료를 시작했고, 독립 건물이 생긴 10개월만에 1,423명의 환자를 돌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야외 전시장 - 3.보구녀관의 사람들>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 박에스더는 1901년부터 매년 평균 3,200명의 환자를 돌봤다. 병원을 찾은 조선 여성들은 질병 뿐 아니라 보구녀관에서 상주한 전도부인들을 통해 신앙을 통한 영혼의 풍성함도 얻어갔다.

 

 

<야외 전시장 - 4.간호원양성학교 1903~>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1대 간호원장인 마가렛 에드먼즈(맨 오른쪽 윗 사진)는 커틀러 의사의 요청으로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1903년 보구녀관에 간호원양성학교를 설립했고, 1908년 3월, 간호사 쉴즈와 함께 대한정규간호사회를 창설했다.

 

 

<야외 전시장 - 5.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1912~1930>

1903년 3월 서울 동대문에 문을 연 볼드윈진료소는 예배당과 나란히 있었다. 미 북감리회 선교단은 가난하고 낮은 계층의 여성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이곳에 동대문병원을 설립했고 이 병원은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과 의과대학으로 1933년까지 운영되다 목동으로 이전했다.

 

 

<야외 전시장 - 6.최고의 여성병원, 동대문부인병원 1930~1945>

1930년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은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산부인과 중심 병원으로 재탄생했다. 안수경, 한소제 등 한국인 여의사가 있는 산과 전문병원으로 명성을 얻었고, 특이한 어린이 환자를 치료하는 어린이 전문병원으로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야외 전시장>

7.로제타 홀이 만든 한국 여성 의료인 : 로제타 홀은 평생 여성 의료인 양성에 앞장 섰고, 그녀의 도움으로 김점동(박에스더)는 한국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왔고, 1928년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함으로써 조선에서 조선인 여의사를 양성하겠다는 꿈을 이뤘다.

8. 독립운동가 의사 현덕신 : 이화학당을 졸업한 현덕신은 로제타 홀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2·8 독립선언 준비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1년 귀국 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최원순을 만나 결혼하고 근우회, YWCA, 대한부인회 등에서 활발히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