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성북동 길상사

큰누리 2014. 6. 21. 21:35

<길상사 찾아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삼선교)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간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 슬슬 올라가면 개성이 있는 주택들과 외교관 주택 및 대사관, 성락원, 카톨릭수도원 등 다양한 주택들을 볼 수 있다. 시간을 좀더 투자하면 주변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 심우장, 수연산방, 이재준집 등의 한옥과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당시 싯가 1천억대의 길상사를 시주한 공덕주 길상화(김영한)>

싯가 얼마라는 것이 얼마나 속물적인 접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기증, 사회환원이 서구에 비해 일반화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나 같은 속물에게 눈이 튀어나오는 이야기이다.

 

김영한(법명 길상화)은 1916년에 태어나 1999년까지 살았다. 16세에 가난 때문에 결혼했으나 바로 남편이 자살하여 금하 이규일의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평양의 연회에서 만난 시인 백석과 눈이 맞아 '자야'라는 이름을 얻고 3년 동안 동거했으나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백석 혼자 만주로 갔고, 6.25 동란 때 백석이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둘의 인연은 끝났다. 하지만 김영한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면서 백석을 그리워했고, 말년에 2억원을 백석장학금으로 기증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몇편의 수필, 저서 등을 '자야'라는 필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길상사가 있는 배밭골 7,000여평을 사들여 운영하던 한식당은 제3공화국 때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으로 바뀌었다. 말년에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대원각 시주를 청했으나 법정스님이 10년 간 사양하여 1995년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1997년 대원각은 대법사를 거쳐 길상사로 바뀌었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은 길상헌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유언대로 유골을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렸다. 길상사에서 그 자리에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었으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그녀의 뜻을 기리고 추모한다.

 

 

<김영한이 사랑한 백석(백기행)>

천재시인으로 불리며 평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연회에서 김영한을 만나 3년 동안 동거했다. 부모의 반대로 김영한과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가 골라준 여인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정착하지 못했다. 김영한과 만주로 가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39년에 혼자 떠났고, 6.25 전쟁 후 북한에 남았다.

북한시인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작품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에 작품이 소개된 후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70년대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은 고급요정의 대명사 3대 요정>

오진암 :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다. 마당에 오동나무가 있어서 梧珍庵으로 불렸으며 본채, 별채의 한옥이 아름다워 소궁궐로도 불렸다. 1953년 한정식집으로 개조되어 서울 음식점 1호 등록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국회의원 김두한 등 정관계 인사의 단골집이었다. 1972년 중정부장 이후락과 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이 7.4공동성명 사전 작업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2010년에 철거될 때 종로구에서 건축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자재를 거두어 부암동에 전통문화 공간 '무계원'으로 복원했다. 

 

삼청각 : 1972년 중정부장이던 이후락이 북한에 갔을 때 본 평양의 옥류관을 본떠 만든 접대전용 건물이다. 주 건물인 일화당을 비롯하여 청천당, 천추당, 취한당, 동백헌, 유하정 등 6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三淸도교의 신선이 머무는 太淸, 玉淸, 上淸 말한다.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릴 때 이곳에서 북쪽 대표단을 접대했으며 나중에는 정치인들의 회동이나 외국 바이어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전통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바뀌어 공연, 체험교육, 전시, 국제회의, 기업 세미나, 전통혼례, 가족모임 등의 장소로 이용된다.

 

대원각 : 김영한이 북악산 자락 아래에서 운영하던 고급요정으로 밀실 정치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1995년 법정스님에게 기증을 해서 1997년에 현재의 길상사가 되었다.

 

 

<길상사>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북악산) 남쪽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승려이자 수필가인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부터 10여년에 걸쳐 법정스님을 설득한 끝에 시주하였다. 1995년 6월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 '대법사'로 등록하였다가 198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에 봉축법회와 장애우, 결식아동, 해외의 아동, 탈북자 등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길상사가 된 후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 일주문, 범종각, 관음보살 석상,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적묵당, 종무소, 길상화공덕비 등이 있다.

 

법정스님은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법회를 주석하다 2010년 3월 11일에 입적하였고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길상화)은 1999년 11월 14일 길상헌에서 숨을 거두었다.

 

 

<길상사 일주문의 안팎>

다포식 지붕이 상당히 화려하다.

 

 

 

<길상사 안내도>

전각의 규모들이 비교적 작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처음부터 절집으로 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랑은 화장실을 말한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가 종교 간의 화합을 기원하며 제작한 관음보살상>

같은 작가의 작품인 혜화동 천주교회의 그리스도상과 닮은꼴이다.

 

 

 <관세음보살상 쪽에서 본 범종각(좌), 설법전(우)>

 

 

<길상사 설법전>

대규모의 설법이 이뤄지는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길상사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신 길상사의 본전이다. 극락전은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정토신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처로 무량수불, 무량광불로 불리기도 한다. 길상사 극락전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다.

 

 

 

<홍예문을 통해 본 길상사 극락전>

 

 

<어른스님의 처소인 길상헌>

사찰 안 계곡 건너편에 있는 아담하고 운치있는 전각이다. 이곳에서 공덕주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두었고 유골을 뒤편 언덕에 뿌렸다고 한다. 그래서 뒤쪽에 길상화공덕비가 있다.

 

 

 

 <길상헌 뒤쪽의 길상화(김영한)공덕비>

당시 싯가 1천억에 해당하는 길상사를 기부한 장본인이다. 그녀는 나머지 재산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고 한다.

 

 

<길상사의 자연 친화적인 의자>

 

 

<계곡 위에 흩어진 스님들의 처소>

저마다 송월각, 능인당, 죽림당, 반야당, 옥화당 등의 이름이 있다. 하지만 바라크처럼 생긴 흩어진 이 건물들 때문에 이곳이 예전에 고관대작(!)이 드나들었던 고급요정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에 경호원들이 머무는 공간? 아니면 밀실? 

 

 

 

<길상선원>

재가자들을 위한 시민 선원으로 선원장 스님으로부터 1년 내내 참선을 받는 좌선방이라고 한다. 길상사나 다른 도량에서 3회 이상 수련을 마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스님들의 처소 중의 하나인 청향당과 다른 전각>

 

 

 

<침묵의 집>

누구에게나 열린 명상의 공간이라고 한다. 왼쪽의 대나무 담장 안에는 유마선방이 있다.

 

 

 <유마선방과 연못, 죽책>

스님들을 위한 선방인 듯...

 

 

 

<길상사 극락전 뒤쪽>

 

 

 

 <길상사 극락전 뒤쪽에서 본 지붕>

두 건물의 꺾인 지붕을 이은 선이 재미있다. 왼쪽 앞에 보이는 가로등은 법정스님이 17년간 수행한 송광사의 불일암에 있는 것과 너무나 닮았다.

 

 

<홍예문에서 본 극락전과 설법전>

 

 

 <길상사 주불전인 극락전>

 

 

 

 

<길상사 범종각>

범종, 목어, 운판 등이 보인다.

 

 

<대원각에서 길상사로 바뀐 후 새로 지은 지장전>

절 밖에서 올려다 본 모습이다. 아래 층은 각각 도서관과 선열당(공양간)으로 사용된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보통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석가모니 열반 후 미륵불이 현생할 때까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 보살이다. 길상사 지장보살은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이 모델이라고 하며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좌우에서 협시한다.

 

 

<길상사 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