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울의 관우 사당들

큰누리 2012. 11. 29. 21:48

<동(관)묘>

 

 

<관성묘>

 

 

<성제묘>

 

 

 <관왕묘 남묘>

 

 

서울에 남아있는 관우 관련 사당은 4개이다대표적인 사당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했던 동(관)묘이고 나머지 관왕묘 남묘 성제묘, 관성묘는 민간 차원의 사당이다. 기타, 제갈공명을 모시는 남산의 와룡묘에도 관우상이 봉안되어 있다.

 

최영장군이나 남이장군처럼 호국충정하다 죽었거나 큰 업적을 남긴 대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일종의 민간신앙이다. 중국의 장군인 관우를 신으로 모시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관우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명나라 장수들의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 측 자금으로 처음 세운 남묘와 뒤를 이어 명나라 장수의 요청으로 추가된 동묘, 고종 때에 세워진 북(관)묘와 서묘(숭의전) 등 동서남북 사방에서 중국의 관우장군이 다소 엉뚱하게 우리 땅에서 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일제 때 우여곡절을 겪으며 북관묘와 서묘는 동묘와 합치거나 사라지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관우 관련 사당은 남대문파출소 뒤에 있다가 1979년에 사당동으로 이전한 남묘, 방산시장 외곽의 성제묘, 앰배서더호텔 앞 장충동의 관성묘이다. 북묘나 서묘가 일제에 의해 동묘로 통합되었다면 해방 후 민간단체에 불하되어 그 자리를 지켰던 남묘는 1979년 재개발사업으로 서울역 맞은편에 현재의 대우빌딩과 힐튼호텔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당동으로 밀려났다.

 

 

♣ 첫번째로 들른 동관묘는 보물 제142호이다.

동묘란 이름 외에 '관묘', '관성묘', '관제묘'라고도 불리고 공자를 모시는 '문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무묘' 로도 불린다. 선조 때 남묘에 이어 명나라 측의 요청으로 그들이 원래 요청한 남쪽이 아니라 흥인지문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현재의 자리에 지어진 이래 숙종 17년(1691)이 능행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들른 것을 시작으로 역대 왕들이 자주 들르게 되었고 영조는 '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정조는 '사조어제무안왕묘비'를 세우는 등 국가로부터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고종 때 세워진 북묘 명성황후와 진령군 이씨, 묘(숭의묘) 고종의 계비인 엄귀비와 현령군 윤씨라는 무녀가 관련이 있다. 지금은 민간에서 관리하는 장충동의 관성묘도 고종의 계비 엄귀비가 세운 걸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서묘(숭의묘)는 관우 사당이라기보다 후한의 소열제(유비)를 주로 모시고 장비, 제갈공명 이외에 다수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함께 배향했다고 한다. 

근세 격동의 시기에 불안하게 보좌를 지켰던 고종은 관우 사당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서 북(관)묘 '관왕'이라는 호칭 대신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라는 황제의 칭호친필로 써서 내렸다. 하지만 북(관)묘는 서묘와 함께 일제에 의해 동(관)묘에 합사되고 말았다. 사라진 북묘와 서묘의 현판이나 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동묘에 나뉘어 보관, 혹은 전시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동(관)묘의 정전에는 현판이 두개나 달려있다.

 

 두번째로, 방산 시장 외곽 골목에 박혀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찾기 힘든 성제묘를 들렀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골목이 좁고 문이 잠겨있어 제를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사당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건물 안에는 관우장군 부부상이 화려한 닫집 안에 걸려있는데 관우장군 머리 위에는 붉은 해가, 부인의 머리 위에는 흰색의 달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골목 끝 건물 2층으로 올라 조망을 하니 사당과 좁은 마당이 보이고 꼭 잠긴 사당 앞으로 좌측에 동자상 1기, 우측에 2기가 보였다. 좌측의 동자상 1기는 아마 파손 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수선한 시장통 끝에 위치한 탓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사당 자체가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관우 사당은 예장동 앰배서더호텔 맞은편의 관성묘이다.

(관왕묘 남묘는 거리가 멀어서 일정에서 제외되었다.) 관성묘는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6호로 관성묘관리위원회에서 1년에 4번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시장 바깥 상가 틈에 낀 성제묘보다는 형편이 좀 나았지만 관성묘 역시 다세대주택과 주유소 틈에 끼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내부를 볼 수 없었지만 인터넷을 뒤져서 안에 모셔진 관우부부상 사진을 찾았다. 녹색 전투복에 금빛 견장을 붙이고 투구를 쓴 붉은 얼굴의 관우와 긴 녹색 상의에 붉은 치마를 입은 관우부인, 그리고 시녀 1명의 도상이었다.

 

 중간에 제갈공명을 모신 남산의 와룡묘 들렀다.

여러 번 들렀지만 관리하는 분의 눈초리가 매서워 감히 사당 내부는 언감생심이었는데 이 날은 운 좋게 사진촬영만 안 하면 들어가서 참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와룡묘 사당 안에는 이름처럼 제갈공명상이 있고, 왼쪽에 나란히 붉은 얼굴을 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었다. 좁은 사당을 두 조상이 꽉 채울 정도로 크고, 관리를 잘 해서인지 도상의 입성이 깨끗했다. 와룡묘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네 곳을 둘러보면서 신앙의 대상이 내 나라 출신이야 아니냐를 따질 것 없이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의 주류를 이루는 종교는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왔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의 안녕과 재복을 기원하며 섬겼던 우리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 차원에서 만든 관우 사당 동(관왕)묘>

보수공사를 끝내고 깨끗한 모습으로 공개 중이다.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오른쪽)' 외에 '금잡인비'가 왼쪽에 더 있다.

 

 

<동(관왕)묘 정전>

 

 

<동묘 정전의 똑같은 현판>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는 고종의 친필로 알려졌는데 2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 이유는 북묘가 1910년 훼손되어 비품이 동묘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따라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묘 정전 안의 관우상>

긴 수염에 금색을 칠한 모습이다. 중앙의푸른 바탕에 금색으로 쓴 '현령소덕무안왕묘'는 영조가 내린 현판일 것이다.

 

 

 

<전형적인 중국사당의 모습이라는 동묘 정전의 측면> 

 

 

 

<방산동의 성제묘(문 왼쪽과 오른쪽에서 촬영)>

시장통 골목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 청계천 마전교를 지나 남산을 바라보고 오른쪽 첫번째 골목에 콕 박혀 있다. 

 

 

 

<성제묘 사당>

골목이 좁아 시야 확보가 안되기 때문에 골목 끝에 있는 아이디어회관 2층에서 본 모습이다. 동자상이 왼쪽에 1기, 오른쪽에 2기가 있는데 왼쪽에 1기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앰배서더호텔 앞 장충동의 관성묘>

문은 대로 평지에 있으나 사당은 1층쯤 낮은 아래에 있다. 고종의 계비인 엄비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로쪽 관성묘 문과 대로에서 내려다 본 관성묘>

사당에서 보면 뒤쪽이다. 

 

 

 

<관성묘와 오른쪽문>

 

 

 

<담 너머로 본 관성묘>

1년에 4번 제사를 지내며 사당 안에는 녹색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관우와 녹색 상의에 붉은 치마를 입은 관우부인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당 오른쪽 문 너머로 본 뒤쪽문과 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