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영주 부석사 - 조사당과 사과 따기 체험

큰누리 2012. 12. 8. 17:16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한 나머지 내가 동탑 앞에 있을 즈음에 대충 응진전, 취현암까지 둘러봤음직한 일행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매번 일행에 뒤처지는 나를 보면서 내가 유별나게 동작이 굼띤 것인지 일행들이 상대적으로 빠른 것인지 잣대질을 한번 해봤다.

 

부석사에 있는 3기의 탑중에서 무량수전 동쪽의 3층석탑만 보물이다. 규모가 천왕문 너머의 탑보다 크고 불국사 석가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화엄종찰에는 탑이 없는데 부석사에 탑이 3기나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변의 폐사지에서 옮겨왔기 때문이다. 마침 사진을 찍은 각도가 탑과 일직선 상에 놓인 석등에 눈길이 갔다. 위치가 그래서였는지 처음엔 탑의 특이한 부속물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화사석이 없어지고 지대석, 간주석 위에 지붕(옥개석)을 얹어 놓은 것이었다. 느낌이 상당히 묘했다. 위치도 그렇고 남아있는 상태도 온전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숲길을 조금 오르자 응진전과 조사당 갈림길 이정표가 보였다. 하나 밖에 볼 수 없는 시간인데... 결국 자인당, 응진전, 동부도, 원융국사비를 모두 포기하고 조사당만 좀 여유롭게 보기로 했다. 부석사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당우였다. 고려의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함이 느껴졌지만 측면에서 보니 처마 길이가 1칸 밖에 안 되는 건물의 두께(!)에 비해 길어 부담스러웠다. 부석사 조사당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왜 고려 때 건물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취미로 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간단하게 답을 찾았다. 목재가 석재보다 약해서라기 보다 잦은 전쟁 때문이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황룡사 등의 건물은 주로 몽고 침입 때, 운 좋게 살아남았거나 그 이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모두 불탄 것이다. 나무가 주 건축 재료이고 외침을 많이 당한 우리나라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조사당 오른편에 거슬리는 철책이 있어 들여다보니 관람객들이 던진 동전과 지폐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안내판을 보고 그 철책 안에 선비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살아난 것이라는데 학명이 골담초인 이 나무는 지팡이로 쓰기에는 불가능한 관목이다! 현재 남아있는 모습도 의상대사의 지팡이였다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나무의 상태가 상당히 부실했다.

 

계단 3단의 석축을 올라 열린 문 정면으로 보이는 노인상(!)을 보며 조사당에 들어섰다. 바로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상이다. 백분(흰가루)을 칠한데다 좀 도식적이어서 입체적인 불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 분 뒤로는 몇분의 조사상들이 있었다. 어라, 그 유명한 국보 제46호 벽화는 어디로 간 거지? 이래서 답사 전 사전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ㅠㅠ...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그 벽화는 벽면을 통째로 뗀 후 유리상자에 넣어 무량수전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사진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 같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판독이 쉽지 않은, 상당히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조사당 벽화는 조사당을 세운 고려 우왕 3년(1377) 때 그린 것으로 후대에 덧칠을 많이 해서 원래의 모습을 잃긴 했지만 그림의 품격이나 보존상태 모두 고려의 불화를 대표할만 하다고 한다. 후대에 먹으로 쓴 낙서들도 그림을 훼손시키는 한 원인이 된다나? 어떤 설명을 보니 조사당에 모신 의상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그린 벽화라고 했다. 와우,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긴 했지만 부처님과 동격이라니... 방위 별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동:지국천왕, 서:광목천왕, 남:증장천왕, 북:다문천왕)과 그들의 상사 격인 제석천, 범천으로 보는 것이 내 보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도 안 들어노는 틈을 타 무량수전에서 놓친 드러난 천정을 실컷 보고 사방의 현재 벽화들을 촬영했다. 의상대사상 앞까지 나가 문쪽 벽의 벽화를 찍어야 하는 미안함에 사죄하는 의미로 용서를 비는 절을 공손히 두번하고... 의상대사상 앞(차마 정면으로는 못 갔다!)에서 찍은 문쪽의 벽화들은 원래 조사당 벽화가 있던 곳이고 현재의 그림들은 근래에 그린 복제화인 듯 했다. 바닥은 장판을 덮어서 확인불가...

 

밖으로 다시 나가 조사당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일행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달려가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사과따기 체험농장으로 갔다. 앉자마자 도착한 사과농장에서 끕끕한 몸상태가 귀찮았지만 눈총 때문에 할 수 없이 내렸다. 본인이 딴 사과는 몽땅 구입해야 하고 일정 kg 이하는 직접 들고와야 하는 좀 까다로운 조건에다 가격도 싼 편이 아니었다. 동행한 딸을 위해 7개를 땄는데 의외로 따는 재미가 쏠쏠했다. 1만원 남짓 돈을 냈고(오래 돼서 가격이 가물가물...) 덤으로 1개를 더 받았다. 

알고보니 일종의 농민과의 직거래였다. 일손이 달려 수확시기를 놓치거나 우박 등으로 상품성을 잃은 양질의 사과를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서 농민과 도시의 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자체에서 보장하는 무농약, 혹은 저농약 과일이란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참 괜찮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고 사과봉투를 들고 귀경 길에 올랐는데 집에서 먹어보니 정말 맛있는 꿀사과였다.

 

난 이가 시려 사과를 잘 못 먹는데다 식구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사과는 1달 하고도 열흘도 더 지난 지금까지 무려 4개나 약간 쭈글거리긴 하지만 우리집 거실에서 상온상태로 안녕하시다. 생각 난 김에 1개 먹어야겠다, ㅎㅎ... 이 글 작성하다 말고 먹어보니 아직까지 싱싱하고 맛있다!

 

 

<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에서 본 풍경>

우중이라 칙칙하지만 무량수전, 안양루, 범종각이 소백산맥과 어울려 아름답다. 

 

 

 

<부석사 삼층석탑과 온전하지 못한 석등>

삼층석탑의 윗부분은 무언가(보주 등) 더 있었야 맞은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복발까지? 석등은 부석사에 2기가 있는데 무량수전 앞의 국보 석등, 그리고 이 석등이다.

 

 

<삼층동탑과 석등과 무량수전>

 

 

<부석사 조사당과 선비화를 둘러친 철책>

조사당 정면에서는 단정한 고려 건축의 특징이 잘 느껴졌는데 측면에서 보니 처마가 좀 부담스러웠다.

 

 

 

 

<부석사 조사당 내부>

작은 당우라 그대로 드러난 비교적 낮은 천정의 구조를 관찰하기에 딱 좋다. 유리상자 속의 의상대사상은 도식적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주변의 벽화나 탱화 속의 조사상들 모두 조사당을 세울 당시(고려 우왕 3년, 1377)의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동쪽 벽에는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의 탱화가 선묘각과 똑같은 모습으로 걸려있고 문쪽에는 보존문제로 유리상자 속에 담긴 채 무량수전으로 옮긴 벽화의 모사본으로 짐작되는 불법 수호신들을 그린 벽화가 있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사진>

 

 

<영주 사과따기 체험>

지자체에서 과수원을 들르는 조건으로 지원하기 때문에 여행경비가 거의 거저 수준이다. 소비자는 싸게 여행도 하고 양질의 농산품을 직거래 할 수 있어 좋고 농민들 입장에서는 중간 마진 없이 제 값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부사는 당시(10/27) 보름 정도 뒤에나 딸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딴 사과는 품종이 다르다. 하지만 생김새나 맛은 시중에서 사먹는 부사랑 거의 똑같고 맛은 훨씬 더 좋았다.

 

과수원에 도착하면 시식부터 한 후에 사과를 딴다. 농장주가 제공하는 바구니에 가득 따면 대강 5kg정도 되는데 택배는 5kg들이 상자부터 해준다. 이런 행사는 처음이어서 약간 불신했는데 이번 체험을 해본 결과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참가할 예정이다. 

 

 

 

 

 

<이 글을 쓰다가 생각난 김에 찍고 깎아먹은 영주 사과따기 체험의 그 사과>

따온지 40일이 더 지났는데 껍질만 약간 쪼글거릴 뿐 당도가 높고(꿀도 박혀있다.) 싱싱하며 맛있다. 

 

 

'경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녕 우포늪2  (0) 2013.10.13
창녕 우포늪1  (0) 2013.10.13
영주 부석사 - 안양문에서 선묘각  (0) 2012.12.04
영주 부석사 - 입구에서 범종각  (0) 2012.12.04
봉화 청량사  (0) 201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