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이탈리아6-라벤나의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단테 묘

큰누리 2016. 2. 14. 03:29

<동, 서로마 분리>

갈라 플라치디아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의붓딸이며 황제에게는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두 아들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로마제국의 동쪽을,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서쪽을 나눠주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와 터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로마로 양분된 것이다. 서로마제국은 이후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고,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천년 뒤인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했다. 

로마의 양분은 종교적으로도 서로마제국의 로마 카톨릭,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정교로 분리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천년 넘게 영화를 누리다가 주변에서 성장한 이슬람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하여 중세까지 떠안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일생>

당시 로마는 서고트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서코트의 로마 침략 시 로마에 있던 갈라는 인질이 되었다가 서고트의 아타울프스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곧 죽었다. 서로마제국의 황제인 차남 호노리우스는 서고트의 침략에 불안을 느껴 수도를 라벤나로 옮겼고 갈라는 남편 사후에 이복 오빠가 있는 라벤나로 돌아온다갈라 플라치디아는 라벤나에 머물면서 서로마제국의 장군인 콘스탄티누스(콘스탄초) 3세와 재혼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았다. 이복 오빠 호노리우스 황제 사후 아들이 5세에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자 25년간 섭정하며 아들을 잘 지켜냈고 문화발전에 기여했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에는 그녀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남편 콘스탄초 3세, 아들 발렌티니아노 3세의 묘가 함께 있다영묘는 십자가 형태로 외부는 소박하지만 내부는 17종류의 다른 톤의 파란 돌을 써서 섬세하게 모자이크를 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유리에 안료를 섞어 가열한 다양한 푸른색 유리조각을 사용하여 장식한 갈라의 영묘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스럽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는 규모는 작지만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영묘 보호를 위해 관람은 5분만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단체라 직접 돈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따로 9.5유로의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외관>

산 비탈레 성당 뒷뜰에 있다. 영묘 외관은 작지만 안은 작은 보물상자 같다. 그래서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를 '보석상자'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지나쳤지만 영묘 뒤편의 건물은 라벤나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라고 한다.

 

성당은 좌우 길이가 똑같은 라틴 십자가 모양이다. 중앙의 튀어나온 부분은 파란 바탕에 별이 영롱하게 장식된 둥근 천정, 사진 앞으로 나온 부분은 아들의 묘, 사진의 십자가 오른쪽은 갈라의 묘이다. 사진 왼쪽의 통로로 들어가면 정면에 갈라 플라치디아의 관이 보인다.

 

 

<통로에서 본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그 동안 어둡고 관람객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훼손된 묘의 내부만 보다가 이곳을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란... 바닥도 대리석 모자이크로 아름답다. 작은 공간이지만 사방이 너무 아름다워 어디를 먼저 보아야 할지 헤맬 정도였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이고 오른쪽에는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관이, 왼쪽에는 남편 콘스탄쵸 3세의 관이 있다.

 

 

 

<영묘 입구 천정 장식>

관쪽에서 되돌아본 천정 모습으로 천정이 끝나는 면에 지팡이를 든 예수님이 양떼에 둘려싸여 앉아 있다. 사진이라 제 빛깔이 아니지만 바탕의 파란색과 섬세한 무늬들이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산 비탈레 성당 안에 있는데도 별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벽>

시간에 쫓겨 사진을 대충 찍고 나중에 대조하느라 애를 먹었다. 갈라 플라치디아 관 위에는 화형 당한 성인 라우렌시오의 순교 장면이 있고, 아들과 남편 관 위에는 동양 자수 느낌이 나는 두 마리의 사슴과 당초문이 있다. 두 사도의 손 동작, 바닥에서 모이를 먹는 두 마리의 새의 위치가 약간 달라 구분이 가능하다.

 

십자가를 들고 불로 걸어가는 성 라우렌시오 앞의 열린 함에는 신약성서 4권(마르코, 루카, 마테우스, 요하네스라 쓰임)이 들어있다. 어릴 적 친구 따라 교회에 갔다가 수도 없이 들은 신약성서 맨 앞에 등장하는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천정>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석관)>

 

 

<갈라 플라치디아의 아들 발렌티니아노 3세 묘와 석관의 부조>

중앙의 양이나 좌우 십자가 위의 조개 장식 등,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처럼 고대 로마 양식이 잘 남아있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남편 콘스탄초 3세의 묘(석관)>

아들과 남편의 석관 위에는 동양 자수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동물, 덩굴식물 무늬 모자이크가 있다.

 

 

<산 비탈레 성당의 석관들>

석관에 간단한 무늬가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민무늬 석관이다. 이 관들도 5세기 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깔끔하고 예쁜 라벤나 중심가>

 

 

<라벤나 포폴로 광장>

'포폴로(popolo)'는 이탈리아어로 민중을 뜻한다라벤나 시내 중심에 있으며, 광장의 두 개의 기둥에는 라벤나의 수호 성인인 산타 폴리네와 산 비탈레 동상이 있다기둥 뒤의 아담한 건물이 시청이다.

 

 

 

 

<라벤나 포폴로 광장 밖의 가리발디 장군像>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함께 19세기 후반에 도시국가로 나뉘어있던 이탈리아를 통일시켰다.

 

 

<단테 묘 옆 수도원>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라고 한다. 입간판에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사람 얼굴을 한 새를 타고 나는 그림이 있고, 무슨 박물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단테 묘 옆 건물 뜰의 작은 나무 사이에도 '단테...' 어쩌고 하는 것을 얼핏 보았는데 피렌체에서 단테 묘(관)를 찾으러 왔을 때 숨긴 곳이 아닌가 한다. 

 

 

<라벤나 시의 단테 묘>

정치적인 이유로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 당한 단테는 생전에 피렌체에서 사면을 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에 피렌체는 단테의 관을 돌려받고자 했지만 라벤나는 단테의 관을 우물에 숨겨 이곳에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피렌체는 현재까지 단테의 묘 천정에 매달린 촛불을 대신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을 일컬어 중세를 물리치고 르네상스를 부른 역사적인 저서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피렌체는 본의 아니게 역사적인 인물을 놓쳤다. 하지만 피렌체에는 아직도 단테의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곳들이 많이 있어서 단테에 대한 피렌체의 짝사랑은 여전한 것 같다.

 

사진 오른쪽 벽에는 '단테, 여기에 잠들다'란 작은 안내문이 붙어있다. 고등학교 시절, 정말 열심히 <신곡>을 읽었는데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는지 큰 골격만 기억하고 너무나 두꺼운 <신곡>을 그 뒤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

 

 

 

<단테 사후부터 지금까지 피렌체시에서 제공한다는 단테 묘의 촛불>

 

 

 

 

 

<단테 묘와 수도원>

 

 

<라벤나시 거리 풍경>

 

 

 

 

<점심을 먹은 라벤나의 중식집 한궁반점과 식단>

점심을 먹고 2시간 반쯤 걸리는 피렌체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