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이탈리아11-폼페이 최후의 날 유적

큰누리 2016. 2. 19. 12:51

<5일째 일정>

로마 베스트웨스턴 호텔에서 폼페이로 - 1시간 40여분 만에 폼페이 유적지 도착 - 1시간 동안 폼페이 유적 관람 - 폼페이에서 점심식사 - 40여분 만에 나폴리 항구 도착하여 카프리행 배 승선 - 1시간 만에 카프리섬 도착 - 미니버스로 20분 정도 절벽도로를 지나 아나 카프리 관광 - 2시간 20분 정도 도보로 황제의 정원까지 관광 - 카프리에서 1시간 만에 나폴리항으로 돌아옴 - 나폴리항에서 우리 관광버스 탑승 - 로마 근교의 초원의 집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 - 30여분만에 로마 베스트웨스턴 호텔에 도착하여 이틀째 투숙

 

 

<폼페이>

폼페이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육로와 해로의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하며 BC 8세기에 고대 이탈리아 민족의 하나인 오스코 도시를 건설했다. 여러 나라의 지배를 거쳐 BC 5세기말에 산니타족이, BC 4세기에 로마가 정복했다.

 

로마에게 정복 당하기 이전에 폼페이는 이미 그리스인들에 의해 도시의 틀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에서 그 영향을 많이 볼 수 있다. 로마인들은 정복 후 도로와 수로, 위생시설을 정비하고 집정관을 두어 통치했으며 화산으로 사라지기 직전에는 20,000여명이 거주했다. 잘 구획된 도시에서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주민들은 포도 과수원과 농사를 지었으며, 황실과 귀족의 별장들이 포진한 휴양도시이기도 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

62년의 강진으로 도시가 반쯤 파괴되었으나 주민들은 화산폭발은 전혀 예상을 못하고 도시를 재건 중이었다. 79년 8월 24일 정오 쯤 베수비오산이 폭발하기 시작하여 사흘 동안 엄청난 용암과 분진을 내뿜고 해일이 일어 폼페이는 평균 6m가 넘는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이후 2,000년 동안 화산재와 용암에 묻혀있던 폼페이는 수로공사를 하다 납관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174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현재 2/3 정도 발굴이 완료되었고 발굴된 유물들 대부분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뿐 아니라 인근의 헤르쿨라네움, 오프론티스, 스타비아이까지 삼켜버렸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상황은 당시 화산권역인 미세눔에 살면서 로마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大 플리니우스의 조카 小 플리니우스의 기록으로 알려졌다.

 

대 플리니우스는 학문적인 호기심 때문에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에게 폼페이로 함께 가자고 했지만 소 플리니우스는 학업 때문에 동행을 포기했다. 출발 직전 렉티나 부인으로부터 구출을 요청하는 전갈을 받고 대 플리니우스는 전함을 출동 시키고 용암과 분진 속에서 구출작전을 벌였다.   기도가 약했던 대 플리니우스는 결국 다음 날 아침 분출 가스에 의한 기도 손상으로 죽고 말았다. 소 플리니우스의 편지에 현장 상황이 생생하게 전하는 것으로 보아 대 플리니우스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상당수는 구출된 것으로 보인다.

 

미세눔에 남아있던 소 플리니우스는 25일 밤부터 심해지는 지진을 느끼다 26일부터 강진과 폭발, 해일이 이어지자 어머니와 함께 피난했다. 피난하면서 본 화산 폭발 장면과 피난하는 사람들의 모습, 공포를 자세히 기록했고 그 기록을 2통의 편지로 써서 역사학자 타키투스에게 보내 세상에 알려졌다.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에는 휴양도시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7,000명 정도 있었고 그 중 2,000명 정도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베수비오 화산은 이후 수차례 더 폭발을 했고, 가장 최근의 폭발은 1979년에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신비의 집'은 근처에도 안 간 것 같고, 모자이크화가 있는 집들은 그림 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한 상태였다. 실제로 상당수의 모자이크화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림도 놓치고, 거리도 극히 일부만 보아서 아쉽지만 일부 건물 터만 본 것으로도 경이로웠다.

 

 

<차창으로 본 베수비오산>

나폴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 경계면에 있어서 분출은 없지만 현재까지도 활화산이다. 높이 1,281m이며 정상에 지름 500m, 깊이 250m의 분화구가 있다.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폼페이 유적지 입구>

'포르타'는 '출입문'을 말하며 폼페이로 들어가는 문은 포르타 마리나 외에 포르타 에르코라노, 포르타 베수비오, 포르타 놀라, 포르타 사르노, 포르타 누케리아, 포르타 스타비아가 있다. 사진 오른쪽 위의 두개의 구멍(!)이 출입문(포르타 마리나)이다. 전면의 성밖 건물들은 항구에서 폼페이로 드나들던 상인들을 위한 여관과 마굿간이라고 한다. 

사진 오른쪽에서 잘린 건물은 귀족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고, 그 앞 목도는 박물관 통로이다.

 

 

<폼페이 포르타 마리나와 현재 관광객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마차로>

오른쪽의 높은 문은 마차나 짐이 드나들던 문이고, 왼쪽의 폐쇄된 낮은 문은 사람이 드나들던 문이다. 폼페이의 주 도로는 인도와 마찻길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마차길 중간중간에는 비올 때 오물들을 피하기 위해 3개의 징검다리(건널목) 같은 큰 돌들이 놓여있다. 도시의 중심이었던 대공회장(광장) 주변에는 마차들이 출입을 못하도록 돌기둥을 세워놓았다.

 

 

 

<성문 안의 저택>

기대를 안고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먼저 마주친 것은 자잘한 벽돌들로 된 건물 잔해와 붉은 벽돌과 자갈을 정교하게 짜맞춘 담장이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폴론 신전(좌)과 공회당(바실리카) 터(우) 사이를 지나 바로 대공회장(광장, 포룸)으로 연결된다. 대공회장은 폼페이 시민들이 모이던 가장 큰 공공장소(포룸, 광장)이자 시장이었다. 대공회장 주변에 무역이나 거래에 필요한 시설들과 관공서, 신전 등이 모여 있다. 사진의 저택은 대공회장으로 들어가기 전 폼페이 입구에 있는데 부유층 저택 마당에 의례 있는 수조가 보인다. 옆에 아폴론 신전이 있다.

 

 

<아폴론 신전>

오른쪽의 어린아이 같은 동상이 태양, 예술의 신 아폴론이다. 아폴론의 누이이면서 달, 수렵의 신인 다이아나 신상도 이 신전 안에 있다. 폼페이에는 다양한 신전이 남아있고, 그 중 집을 수호하는 신은 '라리'라고 한다.

 

 

<포목시장(에우마키아) 건물 앞 회랑>

대공회장(광장) 한쪽에 남아있는 회랑의 기둥으로 문 너머는 포목시장 터이다.

 

 

<폼페이 대공회장(광장)>

석단들 위에는 황제 가족 조각상이 있었다고 한다. 윗 사진의 정면은 베수비오산의 맞은편(시의회, 시 정부 청사)쪽이고, 주민들의 주거지는 베수비오산이 보이는 반대쪽에 주로 있다. 사진의 산 아래에 폼페이 신도시가 있다.

 

윗사진의 벽돌 단은 황제 가족(클라우디오, 아우구스토, 아그리피나, 네로) 조각상이 놓였던 곳, 두번째 사진의 단은 연설을 하던 연단(숫제스툼)이다.

 

 

 

<대공회장과 베수비오산>

사진의 왼쪽의 흰색, 붉은색 기둥 뒤쪽에 도량 측정소(멘사 폰테리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너머의 붉은 벽돌 기둥들은 현재 발굴된 유물을 보관하는 곡물시장(포룸 올리토리움) 터이다.  중앙의 건물 잔해는 제우스 신전이고, 신전 왼쪽 벽돌 아치는 제르마니코 개선문, 오른쪽 아치는 티베리오 개선문이다.

 

 

<도량 측정소(멘사 폰테리아), 곡물시장(포룸 올리토리움), 제르마니코 개선문>

 

 

<대공회장에서 본 곡물시장(포룸 올리토리움), 제르마니코 개선문, 제우스 신전>

 

 

<곡물시장 터에 보관 중인 발굴 유물들>

귀중한 유물들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이런 곳에 방치되고 있는 사실이 놀랍다! 선반이나 선반의 플라스틱 바구니에도 차곡차곡 쌓여있다.

 

주로 토기이고 철제품, 대리석 건축 부자재, 마차, 화산 폭발 당시에 죽은 이들의 시신이 썩거나 삭아 빈 자리에 석고를 부어 틀을 뜬 화석이 있다. 화석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이치에 안 맞지만 가스에 질식해서 죽은 이들이 화산재에 묻힌 후 시신은 썩고 그 자리가 비어있는 곳에 석고를 부어 모형을 뜬 것이다. 일부에서는 머리카락이나 이, 뼈가 발굴된 것도 있다고 한다.

 

 

 

<발굴된 토기, 철제품, 개의 화석>

고통에 겨워 사지를 뒤틀며 죽어간 개의 표정과 자세가 그 날의 참상을 대변한다.

 

 

<마부의 화석>

주인을 기다린 것이지, 마굿간 앞에서 쭈그린 채 죽은 마부상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불쌍하다며 앞에 동전을 던졌다. 모조품이겠지, 설마 진품을 이렇게...  동전이 가득 든 소형 분수로 보이는 석물도 동전을 던지면 안 되는 귀중한 유물인데, 적어도 분수대는 진품이 맞을 것 같다.

 

 

<화석이 된 어린아이>

화석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대로 시신이 썩어서 빈 자리로 남은 곳에 석고를 부은 것이다. 이 방법은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유명한 학자가 고안한 방법이다. 여러 명이 공동으로 엉켜 떼죽음을 당한 것도 있고 임산부도 있다고 한다.

 

 

 

 

 

<공회장 공중화장실>

왼쪽 건물이 제우스 신전 옆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다.

 

 

<칼리쿨라 개선문>

37~41년에 재위한 잔인무도하기로 악명이 높은 로마의 황제 칼리쿨라 개선문이다. 

 

내가 본 내용 중에서 해결 못한 부분은 도로이다. 개선문 너머가 메르쿠리오 길이라는 것은 책자와 대조를 했기 때문에 확실한데 유감스럽게 다른 도로는 자료가 없어서 구분을 못했다. 기억에 남는 도로명은 아폰단자 거리, 놀라의 길, 사창가, 스타비아 길, 공동묘지 길 정도이다.

 

 

<공중목욕탕 정원 출입구>

목욕탕에 딸린 정원이었던 것 같다. 공중목욕탕은 폼페이에 3개가 있었다고 한다.

 

 

<공중목욕탕 미온탕과 내부장식>

남탕, 여탕이 구분되어 있다. 남, 녀 목욕탕 안에는 탈의실, 미온탕, 냉탕, 온탕이 있다. 아래 사진은 미온탕으로 수증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천정에 구멍이 있고, 벽의 네모난 칸은 옷장이다. 벽과 천정장식이 아름답다.

 

 

 

<공중목욕탕 온탕>

천정의 골을 따라 수증기가 아래로 흐르고, 지붕의 구멍으로 수증기가 빠져 나가는 과학적인 구조이다. 냉탕은 지붕에 환기구가 따로 없었다.

 

 

 

<'ㄷ'자형 화덕>

'비극 시인의 집' 주인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공간의 조리대(화덕)이다. 규모가 크고 길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빵가게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극 시인의 집의 '개 조심' 모자이크와 내부>

공중목욕탕 앞에 있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의 집으로 고급 예술작품 장식과 그림이 많이 있던 집이다. '비극 시인의 집'이란 이름은 이 집 응접실에서 비극 리허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현관과 정원 회랑에서 <이피제니아의 희생>, <브리제이데의 납치>, <헤라와 제우스> 등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바닥에 '개 조심(CAVE CANEM)'이라고 써있고, 줄에 묶인 사나운 개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림 보호를 위해 유리로 막아놓았다. 'CAVE'의 'V'는 'U'이다.

두번째 사진은 개 조심 모자이크화 너머로 본 '비극 시인의 집' 내부이다. 현관 홀 중앙에 있는 낙수받이 수조신성한 탁자의 밑단, 가장 안쪽에 집의 수호신인 라리를 모신 사당이 보인다.

 

 

 

<도로와 건널목>

집 규모로 보아 중산층 이상이 살던 거리인데 이름은 모르겠다. 사진 맨 아래에 3개의 건널목이 보이는 것만 보더라도 (마찻길이니까) 부유층이 살던 곳이다. 

 

 

<방앗간, 빵 가게의 멧돌과 화덕>

왼쪽은 멧돌이고, 중앙과 오른쪽에 화덕이 보인다. 방앗간과 빵 가게를 함께 한 것 같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도로>

 

 

<공동수도>

수도꼭지는 최근에 박았겠지만 나머지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점이 그저 신기하다. 도로와 수로에 관한 로마인들의 도시계획은 대단하다!

 

 

<대저택이 있는 거리>

이름은 모르겠고, 오른쪽 아래에 공동수도가 또 있다.

 

 

<대공회장 부근의 벽돌이 아름다운 집>

 

 

<출구 쪽의 베네레 궁전 터>

이 건물 터 오른쪽 아래에 폼페이 구시가지 출구가 있다. 내 기억으로는 입구 바로 오른쪽의 이 길로 나왔는데 지도를 아무리 뒤져도 지도에는 출구라 부를 만한 도로가 없다. 아마 포르타 마리나(출입문)에 붙어있는 박물관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갔다가 오른쪽으로 나온 것 같다. 출구 밖에는 현대 도로가 있고 주변에 호텔, 식당 등이 몰려있다.

 

유적지 안에서 이 위쪽 방향으로 더 나아갔다면 대극장을 비롯한 극장들과 대체육관, 원형 경기장 등이 있었을 것이다.

 

 

 

<점심을 먹은 폼페이 유적지 밖의 레스토랑 베수비오>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입구에서 파는 강남 스타일 춤 포즈를 취한 싸이 캐릭터 티셔츠, 악사가 기억에 남는다. 어설픈 한국어 몇 마디를 하면서 포즈까지 취해준 서빙하는 아저씨가 우리 테이블에 스파게티를 나눠주는 중이다. 어찌나 시끄럽고 어수선한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헛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