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큰누리 2017. 6. 19. 22:36

 

-≪오대산 월정사≫-

♣ 창건기 :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聖山으로, 산 전체가 불교성지가 되는 곳은 남한에서 오대산이 유일하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서,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된다. 자장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산서성 오대산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이때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준 뒤,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후 귀국하여 찾게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이며, 이때 월정사를 창건하고 오대 중 중대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게 된다. 

♣ 중창기 : 자장에 의한 문수신앙은 통일신라에 이르면, 보천태자와 성덕왕에 의해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5만 보살신앙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때부터 월정사는 오대산의 다양한 신앙과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사찰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월정사는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는 선문 중 하나인 강릉 사굴산문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나옹스님이 주석하게 되고, 조선 초에는 나옹문도들에 의한 불사와 정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명당이 주석하고, 조선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기에도 사세가 번성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번에는 역으로 사굴산문의 본찰인 굴산사가 오대산의 영향권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 현대 : 현대에 이르러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의 위상을 확립하고, 동국대학교 건립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1.4후퇴 과정 중에 아군에 의해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암자들이 전소되면서, 오대산은 開山 이래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화엄의 대가이며 불교경전은 물론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른 탄허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월정사는 점차 추슬러진다. 탄허스님의 제자 만화스님이 현 적광전을 중건하고, 이후 현해스님이 대법륜전을 건립한다. 그리고 현 주지인 정념스님의 노력으로 가람이 일신되면서 오대산의 성세가 재현되기에 이른다.  --이하 전각,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월정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오대산의 오대(五臺)≫-

오대산은 5개의 봉우리와 5개의 암자가 있다고 하여 오대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의 오대산 문수신앙을 신라에 받아들여 수용한 곳이 바로 오대산이며 이후로 오대산은 문수도량의 성지로 여겨져 왔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문수신앙으로 시작, 오대에 각각 1만의 보살이 계신다는 5만 보살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산 가장 아래에 있는 지장암은 남대(南臺)1만의 지장보살이 머문다고 여겼으며 스님들의 참선도량이다.

 동쪽의 관음암은 동대(東臺)로 이곳에도 1만의 관세음보살이 머문다고 여겼으며, 구정선사가 출가하여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

 서쪽의 염불암은 서대(西臺)이며 이곳에는 1만의 대세지보살이 머문다고 여겼으며 이전에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졌던 우통수가 있다.

 상원사와 오대산 적멸보궁 부근의 사자암은 중대(中臺)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여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문다고 여겼다.

 상왕봉의 미륵암은 북대(北臺)이며 1만의 미륵보살이 머문다고 여겼으며 법당 안에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을 본떠 만든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월정사 금강교와 연등>

월정사를 오대천이 삼면으로 끼고 돌기 때문에 몇 개의 다리가 주변에 놓여 있다. 전나무 숲이 시작되는 일주문 옆의 해탈교를 비롯하여 금강교, 피안교, 자장교가 상류를 따라 놓여 있다.

 

<월정사 천왕문>

 

<월정사 천왕문의 사천왕상>

 

<월정사 금강루와 금강문>

 

<월정사 금강문의 인왕(금강역사)상>

금강역사(인왕)는 불상이나 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이다. 첫 번째 사진의 검은 피부의 나라연금강역사 범어의 첫글자인 '아' 모양으로 입을 벌려 시작을 의미하며 '아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두 번째 사진의 밀적금강역사 범어의 끝 글자인 '훔' 모양으로 입을 다물고 있어 끝을 의미하며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두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한다고 한다.

 

<월정사 금강문을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

문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역사(아금강역사)이고 문 왼쪽은 밀적금강역사(훔금강역사)이다. 비교적 고부조로 표현된 금강역사상은 금강역사가 가진 본래의 무서운 표정에 역동적인 움직임이 더해져 예술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월정사 금강루의 윤장대>

팔각형의 윤장대는 돌릴 수 있으며 안에는 불경이 들어있다.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해 만든 불구로 중국 양나라의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월정사 요사채인 해행당>

 

<월정사 강당인 대법륜전(중앙)>

 

<월정사 서별당(대강당)과 팔각구층석탑, 적광전>

 

<월정사 용금루, 종고루(석경원), 불유각(우물)>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건물은 서별당(강당)이다.

 

<월정사 종고루(석경원), 불유각(우물)>

 

<월정사 불유각(우물), 서별당(강당)>

 

<월정사 적광전, 팔각구층석탑, 동별당>

 

<월정사 서별당, 수광전(지장전)>

수광전(壽光殿)/무량수전(無量壽殿) : 무량수전은 서방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이라고도 한다. 월정사 무량수전(수광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불을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으며 뒤쪽에 목각탱화 <극락회상도>가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과 지장시왕(地藏十王)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 금선묘 탱화가 있다.

 

<월정사 삼성각>

삼성각은 독성 나반존자, 산신, 칠성을 함께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반존자는 단군을, 칠성은 도교신앙의 북두칠성을 신격화하여 토착화되었다. 신은 호랑이와 함께 표현된다.

 

<월정사의 석가탄신일 연등>

하얀 등은 죽은 이를 위한 것으로 주로 명부전 앞에 걸려 있다. 월정사는 따로 명부전이 없으므로 지장전 수광전(지장전, 무량수전, 극락전) 앞에 걸었다.

 

<월정사 개산조각, 진영각 - 적광전 사이의 연등>

개산조각(開山祖閣)은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전각으로 월정사 창건자인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진영각(眞影閣)은 개창주나 중창주와 같은 고승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개산조각에 개창주(자장율사)를 모셨기 때문에 진영각에는 근대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스님, 현대 불교학의 아버지인 탄허스님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지암스님, 6.25전쟁 후 월정사를  중건한 만화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월정사 적광전>

적광전(寂光殿)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다. 월정사에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근대에 신축된 법당 중 으뜸으로 꼽힌다. 원래는 이 자리에 과거에 나타난 일곱 분의 부처님을 모신 칠불보전(七佛寶殿)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아군에 의해 다른  전각과 함께 전소되었다. 1969년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사용하여 중건하였다.

적광전에 모신 부처님은 경주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은 대웅전이라 하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적광전이 통례이나 월정사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을 적광전이라 하였다. 이는 오대산이 화엄, 문수도량이며 한암, 탄허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면서 불교  최고 경전인 화엄사상을 널리 펼쳤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탄허선사께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함께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적광전'이라 한 것이다. 적광전 외벽은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뒷면에는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한 심우도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적광전 4개의 기둥에는 탄허선사 친필의 자장율사 불탑게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지정 : 국보 제48호

제작 시기 :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식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당시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3층 또는 5층의 탑인데 비해 평면 팔각형에 9층인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이다.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했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더러 손상을 입었지만 본래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장식을 했다. 그 위로 굄돌을 놓아 기단 전체가 부처님의 연꽃대좌처럼 장식되었다.

여러 차례의 화재로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해 1, 2, 6,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청동거울, 금동 향합과 향 주머니, 진신사리경총 12점의 유물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지정되었다. 또한 2008년 8월 월정사석조보살좌상 보수 공사 시에 지하 1m 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되어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m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

지정 : 보물 139호에서 2017. 1월에 국보 제48-2호로 변경 지정

소재지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제작 시기 : 고려 초기로 추정

높이 180cm.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서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석조보살좌상이다. 이 보살은 일명 약왕(藥王)보살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머리 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 작품은 보존처리를 이유로 10여년간 성보박물관에 있고 현재의 석조보살좌상은 복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