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77

16.12. 서산 둔당리 지석묘

≪서산 둔당리 지석묘(瑞山 屯堂里 支石墓)≫ 기념물 제63호 충남 서산시 인지면 둔당리 189. 청동기시대 무덤의 한 양식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 모양의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이 있는데, 둔당리 지석묘는 남방식 고인돌이다. 직사각형의 덮개돌은 길이 350cm, 폭 290cm, 두께 109cm 정도의 화강암이며, 가장자리에 다듬은 흔적이 있다. 덮개돌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았다.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만들어진 4개의 굄돌은 현재 기울어 있으며, 북쪽과 남쪽의 것이 길고 동쪽과 서쪽의 것은 짧다. 이곳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1기가 파괴되어 없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것도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인돌에서 주로 나오는 유물로는 돌칼, 돌화살촉, 토기 등이 있다. 주민들은 이 고..

충청도 2017.05.31

서산 부장리 고분군

지정별 : 사적 제 475호(국가지정 : 2006. 11. 6.) 위치 :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10번지.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2004~2005년에 발굴하였으며, 청동기시대 주거지 31기와 수혈유구 6기, 백제시대 주거지 40기, 분구묘 13기, 조선시대 움무덤 83기 등 총 260여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 가운데 백제시대 분구묘가 주목되는데, 분구묘는 흙을 쌓아서 분구를 만들고 위에 매장시설을 하는 매장시설을 하는 무덤 양식으로, 부장리 유적에서는 모두 13기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한변의 길이가 20~40m정도이며, 봉분은 잘 남아있는 것의 높이가 3~4m정도이다. 무덤의 형태는 말각방형(사각형속에 마름모-마름모 속에 사각형의 형태 반복)이며 주구(周溝)가 시설되어 있다. 매장..

충청도 2017.05.31

서산 보원사지 유적, 출토 유물들

지정별 : 사적 제 316호 지정년월일 : 1987. 7. 18 위치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48외 70필지 규모 : 102.866㎡ 시대 : 백제.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 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 양식..

충청도 2017.05.30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산 2-10 국보 제 84호. 마애여래삼존상을 바라보았을 때, 중앙의 석가여래 입상 기준으로 왼쪽에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에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백제 후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선을 새겨 넣거나 도톰하게 솟아오르도록 다듬어 만든 불상을 말한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불상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2.8m의 거대한 불상으로, 단정하고 유연하게 조각된 솜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자리한 이곳 충남 서산시 운산..

충청도 2017.04.28

서산 유상묵 가옥

민속자료 제 22호. 야산을 배경으로 'U' 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동쪽에 안채와 서쪽에 사랑채를 막돌담장으로 구분하였다. 1925년 소유주의 선친인 유상묵(구한말 종5품)이 명당이라 전해지는 현재의 위치에 서울의 운현궁을 본떠서 건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一' 자형의 사랑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두 공간은 행랑채와 담장으로 명확히 구별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내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ㄴ' 자형의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대지 전체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대지 전면 담장과 사잇담은 막돌담장으로 되어 있고, 후면 담장은 토담 위에 서까래를 걸고 토기와를 얹어 놓았다. 서산지역에 남아 있는 전통적인 양반..

충청도 2017.04.24

서산 유기방 가옥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203-1 도지정 민속자료 제23호. 서산 지역 전통 양반가옥으로 야산을 뒤로 하고 'U' 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동쪽에 사랑채 공간과 서쪽에 안채 공간을 토담으로 구분하였다. 안채는 '一' 자형으로 부엌, 방, 대청마루, 건넛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뒷마당에는 석축 위로 장독대를 설치하여 장독마다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이채롭다. 안채 앞에는 원래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나 후대(1980년대)에 헐어내고 현재의 목조주택을 건축하였다. 행랑채는 안채 좌측에 위치해 있고 중앙칸에 협문을 달아 외부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굴뚝이 뒤로 흐르는 배수로 위를 지나도록 설치한 기법이 눈여겨 볼만하다. 사랑채는 'ㄴ' 자형으로 들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사랑방에서 마루까지 한 공간..

충청도 2017.04.23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 서산 여미리 비자나무

유형문화재 제132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산1. 불상 높이 : 3.1m. 재료 : 화강암.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화된 양식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 현 위치에서 1km쯤 떨어진 용장천에 묻혀 있었던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여 옮긴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냇가에서 5km쯤 상류지역에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떠내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불상은 화강암의 전면에 얼굴과 손등을 조각했으나 옆과 뒷면에는 거친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마모가 심하다. 목은 부러졌던 것을 복원하였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간략하고 형식적이며, 입체감이 없다. --현지 안내문--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이 놓인 위치에서 서북쪽 바로 뒤로 조선 2대 왕 정..

충청도 2017.01.02

진천 송인사당(상산재), 송인묘소

송인(?~1126)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며 진천 송씨의 중시조로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증되었고,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송인의 묘는 직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고려시대의 특유한 묘제이며, 조선 후기에 세운 묘비 2기가 있다. 상산(常山)은 진천 송씨의 관향인 진천의 별칭이다. 상산재는 125.6㎡의 재실과 36.4㎡의 행랑채로 1992년에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번째로 지었다고 한다. 상산제 바로 뒤편에 송인선생의 묘소가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이다. 비석은 새로 만들었지만 적힌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송인선생 후손들로 보인다. ..

충청도 2016.05.31

청주 영조대왕 태실

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 영조대왕 태실 유적은 조선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태어난 이듬해인 1695(숙종21)년에 무성리 뒷산에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인 1729(영조5)년에 왕의 태실 규모에 맞도록 가봉(加封)하였다. 태실 앞에는 '1694년(강희33) 9월 13일 인시에 태어난 왕자 아지씨 태실' 이라고 한 초기의 비와, 가봉 후에 '주상전하태실' 이라고 한 태실비가 있다. 이 태실은 조선 말기까지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일제하에서 항아리를 서울 창경궁으로 옮긴 후 크게 파손되었고 그 자리에는 민묘가 들어섰다. 1982년에 흩어진 석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복원하였다. '아지씨 태실비'는 1991년 대구의 골동품사에 있..

충청도 2016.05.13

괴산 송시열 묘와 청천리 백로, 왜가리 서식지

사적 제417호.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101.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신도비와 묘소는 원래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영조 33년(1757)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묘소에는 2기의 묘비와 문인석, 망부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의 비각 안에 정조의 어필로 정조 3년(1779)에 세운 것이다. 국난이 있을 때에는 땀을 흘린다고 한다. 송시열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노론의 영수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반..

충청도 201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