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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동국사 환수문화재 근.현대 불교사 특별전

포스터의 사진은 수중에서 출토한 정병(수병), 오른쪽의 안내문은 일본에서 환수한 와 이다. 이하 설명은 현지의 안내문에 의함. 일본에서 환수. 조선전기. 가로224.5cm 세로87.0cm. 마본. 그림의 보존상태가 나쁘다. 현존하는 열반도 중 가장 시기가 앞선 500~600년 전에 조성한(서울대 탄소연대 측정) 세계 유일의 가로형 불화로 팔상성도 7폭 중 부처님의 장례식 장면을 묘사한 불화임. 뒷면에 채색하여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복채법)을 사용하였고 거는 고리가 남아 있다. 좌측에 사리를 배분하는(사리8분) 도상은 처음 발견되었으며, 진사, 공작석, 밀타승, 호분, 장단, 연백, 금니 등 천연안료를 사용하였다(한국전통문화대 고증). 항일승려 :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오성월, 운허 친일..

전라도 2015.06.14

군산 동국사의 개 - 동백이

동국사는 군산에 갈 때마다 들르는 단골 코스이다. 전에는 군산의 근대문화유적이 월명동, 영화동, 장미동쪽에 가까이 모여있어서였다. 지금은 동국사 법당 안에 침탈사료관이 생기고 들를 때마다 전시 내용이 바뀌지 않을까 해서 들른다. 이번에 들렀을 때 이 열리고 있었다. 동국사에 갈 때 빠지지 않고 둘러보는 것이 동국사 대웅전 뒤쪽에 사는(!) 개 동백이이다. 처음에 들렀을 때는 동백이가 집안에 있어서 그냥 개집이려니 했는데 몇 번 들르다 보니 쇠울타리 안에 갇힌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국이가 짖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입성도 깔끔하고, 개 눈에 흔한 눈꼽 한번 낀 적도 없었다.​ 눈빛이 형형해서 개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소 무섭기도 하지만 고독한 늑대 같기도 하고, 사람으로 치면 말이 없는 현인같..

군산 한일옥의 1930년대 골동품들

≪군산 한일옥≫ 글을 올리기 위해 '군산 한일옥'을 지도에서 검색하니 가까운 위치에 두 곳이 떴다. 상세보기로 다시 검색한 결과 한 곳은 '기사식당'이란 부제가 달린 낡은 건물이고, 다른 곳은 내가 찾던 초원사진관 맞은편의 한일옥이었다. 두 곳 모두 같은 분이 운영하는 것 같다. 한일옥은 건물이 아담하고 예뻐서 '군산 근대문화유산의 거리(탁류길)'에서 김혁종(舊 히로쓰)가옥, 동국사, 초원사진관, 게스트하우스 고우당 등을 들르다 지나치는 길에 매번 마주친 곳이고 식사 시간이면 건물 밖까지 대기줄이 길게 이어진 것을 자주 보아 얼핏 기억에 남았던 곳이다. 군산의 음식점에서 줄이 길게 이어진 곳은 빵집 이성당, 전국 5대 짬뽕 맛집이라는 복성루였는데 이곳도 (줄이 짧긴하지만) 그랬다. 지난 5월 연휴, 무작..

전라도 2015.06.12

철원 노동당사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 강원도 철원시 동송읍 소재. 철원 노동당사는 1945.8.15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정권 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1개 리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동원하는 한편 특히, 건물의 내부 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조적으로 된 3층 건물 구조인데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서 6.25전란 당시 여타 건물이 모두 파괴, 인멸되었음에도 유독 이 건물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강원도 2015.06.10

전주 전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사적 제288호.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 소재.전주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그리고 순조 2년(1801)의 신유박해 때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들의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Baudounet)가 성당 건립에 착수, 1914년에 완공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일자별로 본 전주지방에서 순교한 복자 24위≫♣ 1791. 12.8 : 윤지충(바오로. 34세. 전..

전라도 2015.06.04

전주한옥마을과 오목대

≪전주≫역사적으로 전주(全州)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으로 완산주를 전주로 개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900년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는 조선왕조의 뿌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전지역과 제주도까지 관할했던 전라도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행정중심지였다.현재의 전주는 판소리의 본고장이며 한옥, 한지, 한식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주변의 넓은 호남평야와 바다가 연결되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예로부터 풍요의 고장이었다. 이러한 풍요와 여유는 전통문화를 꽃피우고 멋과 맛의 고장으로 천년 세월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전주한옥마을(hanok.jeonju.go.kr)에서 발췌 요약- ≪전주한옥마을≫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

전라도 2015.06.02

전주 풍남문, 객사(풍패지관)

이 동상의 제목이 따로 있는지 확인은 못했다. 바닥에 이미 넘어진 여자가 앞 남자의 발목을 붙잡아서 남자가 넘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작품의 상황이나 표정이 너무 생동감이 있어서 전주에서 본 유적 못지 않게 기억에 각인된 작품이다. (여성) 자신이 위급한 나머지 남을 무조건 잡고 매달리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남성을 끌고 들어가는 것인지... 상황과 무관하게 넘어지려는 남성의 쭉 뻗은 손가락에 영화 ET처럼 손가락을 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품 정면에서 보면 남성의 표정과 손놀림이 훨씬 역동적이다. 이 절박한 상황의 남성상 뒤로 풍남문이 있다. 옛날 전주의 관문인 풍남문을 중심으로 유적들이 집결되어 있다. 바로 길 건너편에 전주전동성당이..

전라도 2015.06.01

종묘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左廟右社)'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종묘는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종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서울특별시 2015.05.13

미선나무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이며 갈잎떨기나무로 키는 1~2m이다. 개화기는 4월, 결실기는 9월이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자라며 관상수로 심기도 한다.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회색의 여린 가지는 매끈하지만 오래된 것은 세로로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12개의 뾰족한 타원형 잎은 서로 마주보며 난다. 잎겨드랑이에서 잎보다 먼저 밝은 상아색이나 밝은 분홍색이 꽃이 핀다. 꽃잎은 4~6개로 깊게 갈라지고 끝에 홈이 있다. 전체적인 수형이나 꽃 모양, 개화 시기,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점 등이 개나리와 비슷하다. 거꾸로 세운 하트모양의 둥글고 납작한 시과 열매는 '미선'이라는 부채와 닮아서 '미선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10.04.11. 같은 장소에 상아미선과 분홍미선이 식재되어 있다. ..

화성 궐리사와 오산의 고인돌 유적

화성 궐리사(실제로는 오산시에 소재)는 매년 유림과 후손들이 봄, 가을 공자의 탄신일과 기일을 기하여 석전의 예를 올리는 서원적 사당이다. (PS : 석전 -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 10철 72현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 궐리사는 원래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이 은행나무를 심고 서재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두드리며 제자들의 학문을 독려했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한다. 공서린선생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대사간을 역임하고 좌승지로 부임할 당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경기황해 양도 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선정되는 등 성품이 곧고 기개가 높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궐리사 안의 은행나무 옆에는 2010년에 세운 선생의 유허비..

경기도, 인천 2015.05.02